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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재희 Apr 28. 2024

봄이 오면 <상실의 시대>를 다시 읽는다

봄의 이미지와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봄이 오면 <상실의 시대>를 다시 읽는다. ‘상실’의 이미지에 어울리는 계절은 단연 봄이 아니라 겨울이겠지만, 늘 추위가 가고 따뜻한 봄이 올 때 즈음 이 소설이 떠오른다. 아마도 그건 봄의 이미지가 사랑하는, 혹은 은 사랑했던 사람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루키는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를 그려내고 싶어 이 이야기를 썼다고 했으니까.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봄이 가장 어려운 계절인지도 모르겠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아름다운 것들을 홀로 눈에 담아야 한다는 것이 늘 가장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법이니까.



요즘은 이런 것이 궁금하다. 사람은 지나간 기억을 하나씩 잊으며 살아가야 하는 걸까, 아니면 붙잡고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상실의 시대>를 아무리 반복해서 읽어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내리는 것은 좀처럼 쉽지 않다.


물론 잊고자 하는 것도, 잊지 않고자 하는 것도 무엇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이런 질문은 고민해 봐야 아무런 도움도 안 되는 잡념일지도 모르겠지만, <상실의 시대>의 화자 와타나베가 나오코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애쓰며 글을 쓰는 모습을 그려보면 늘 그런 기억에 관한 잡념들이 스쳐 지나간다.


“정말 언제까지나 나를 잊지 않을 거지?”하고 그녀는 작은 소리로 속삭이듯이 물었다.

“언제까지나 잊지 않을 거야.” 하고 나는 말했다. “내가 어떻게 너를 잊을 수가 있겠어.”

- 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 22p, 문학사상


같은 책, 특히 장편 소설을 다시 읽을 때면 늘 생각보다 잊어버린 부분이 많다는 것에 놀라고는 한다. 내가 상실의 시대를 두 번째로 완독 했을 때 스스로 놀랐던 점은 책의 결말이라 할 수 있는 마지막 한 페이지를 까맣게 잊은 채 이 책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상실의 시대>를 처음 읽으면서 나는 나오코를 잃은 와타나베의 감정에 몰입한 나머지, 그가 마지막에 또 다른 연인 - 다소 이상한 표현이지만 더 적합한 표현을 찾지 못하겠다 - 인 미도리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원하는 것은 너뿐이다."라는 말을 전한다는 사실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은 듯했다. 아마 그때 나는 미도리의 존재가 나오코를 잃은 슬픔을 대체할 수 있으리라고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레이코와 와타나베가 함께 '나오코의 장례식'을 새로이 치르는 모습을 이 소설의 결말로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을 읽어보면 '상실'의 아픔을 겪은 와타나베가 또 다른 사랑을 통해서 회복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 책이 표지의 설명 대로 '상실 그리고 재생'의 이야기라면, 여기서 '재생'은 역시나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밖에는 종류의 것이다. 미도리는 와타나베에게 묻는다. '자기 지금 어디에 있는 거야?'. 누군가 깊은 '우물'과 같은 어둠에 빠져있다면 그를 구원해 줄 사람은 꼭 그런 질문을 하며 다가올 것이다. 너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다만 이 이야기를 반복해서 읽으면서 나는 역시나 미도리의 존재가 죽은 사람들의 세계로부터 와타나베를 완전히 구원하지는 못했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나오코의 죽음 직후인 책의 결말 부분에서로부터 십 수년이 흐른 책의 첫 장으로 다시 돌아오면, 중년이 다 되어가는 와타나베는 여전히 나오코를 그리워하며 잊지 않기 위해 글을 쓰고 있다. 기즈키의 죽음이 나오코의 일부를 영원히 죽은 자의 세계로 끌고 가 버렸듯, 나오코의 죽음 - 기즈키, 하쓰미의 죽음에 더해 - 은 화자인 와타나베의 삶의 상당 부분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만 죽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죽음은 삶을 구성하는 일부다. 가까운 친구, 혹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마주하는 순간에야 사람은 그 사실을 몸소 느끼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와타나베는 기즈키의 죽음에서 이것을 깨달았다고 했고, 나오코의 죽음에서는 한 가지를 더 배웠다고 말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깨닫는 어떠한 사실도 상실의 아픔을 치유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죽음은 삶의 반대편 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 내재해 있는 것이다.'


분명히 그것은 진리였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시에 죽음을 키워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배워야 할 진리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나오코의 죽음이 내게 가르쳐준 것은 이런 것이었다. 그 어떤 진리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 어떤 진리도, 그 어떤 성실함도, 그 어떤 강인함도, 그 어떤 부드러움도 그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 슬픔을 실컷 슬퍼한 끝에 그것으로부터 무언가를 배우는 길밖에 없으며, 그리고 그렇게 배운 무엇인가도 다음에 닥쳐오는 예기치 않은 슬픔에 대해서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혼자서 그 밤의 파도소리를 듣고,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매일 골똘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387p)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에 관한 이야기를 정돈되게 하기는 아직 어려울 듯하다. 나는 여전히 이 책의 많은 부분을, 그들의 삶과 죽음을 명료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하루키가 쓴 이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에 관한 이야기는, 늘 이해하며 읽는다기 보다는, 복잡한 생각 없이 그저 어렴풋이 느끼고 때로는 깊이 공감하면서 읽게 되는 책인 듯하다.


하지만 지금 나의 뇌리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그 초원의 풍경이다. 풀 냄새, 약간 한기를 머금은 바람, 산의 능선, 개 짖는 소리, 그런 것들이 우선 가장 먼저 떠오른다. 너무나 선명하게. 그것들은 너무나도 선명해서 손을 뻗으면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만질 수 있을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그 풍경 속에는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아무도 없다. 나오코도 없고 나도 없다. 우리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나는 생각한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그토록 소중해 보였던 것, 그녀와 그때의 나와 나의 세계는 모두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그래, 나로선 나오코의 얼굴을 바로 떠올릴 수조차 없는 것이다. 내가 지니고 있는 건 사람 그림자 하나 없는 배경뿐인 것이다.  (1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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