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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는 그냥
맥주 마시러 온 건데요

Day18. 네덜란드 로테르담 - 벨기에 브뤼셀

by 이리터
큐브하우스에서 조식을

아침부터 밖에 사람들이 북적이길래 봤더니 오늘 마침 플리 마켓 하는 날인가 보다. 날짜를 확인해보니 토요일, 우연히 타이밍이 잘 맞은 덕에 소소한 구경거리가 하나 더 늘었다. 빈티지 소품과 그릇들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아직 여행이 한참 남아서 시계, 액자, 촛대.. 이렇게 예쁜 것들을 한국에 사갈 수 없다는 게 슬프다.

빈티지 천국

아쉬운 대로 작은 빈티지 뱃지 두 개를 골랐다. 2유로에 득템. 이 작은 것들로 여행 18일 차 로테르담의 아침을 두고두고 기억하리라.

나를 위한 선물 1

걷다가 우연히 HAY를 발견했다. 전부터 HAY의 레인보우 트레이를 사고 싶었는데, 유럽 와서 사면 조금이라도 더 싸지 않을까 싶었다. 결국 한국이랑 큰 가격 차이는 없었지만, 평소 갖고 싶었던 걸 여행 와서 사면 더 기억에 남을 것 같아서 그냥 질렀다. 기분 좋게 포장도 해달라고 했다. 한국 가서 방에 놓아둘 상상을 해보니 벌써 예쁘다, 이미 잘 샀다.

나를 위한 선물 2

어제는 숙소에서 가까운 Blaak 지역 위주로 구경했다면, 오늘은 로테르담 시내까지 깊숙이 들어와 샅샅이 구경했다. 시장이나 도서관만큼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이 쪽도 평범한 건물 안 짓는 건 분명하다. 민트색 경찰서는 말도 안 되잖아. 특색 있는 건물 보는 재미에 다리 아픈 줄도 몰랐다.

경찰서 (좌) 아파트? (우)

건축이나 인테리어뿐 아니라 공공 디자인에도 로테르담의 센스가 묻어난다. 너무 세련돼서 '역시 미래도시스럽다' 생각하다가도,

공사 현수막까지 예쁘면 어쩌자고

또 한편으로는 전형적인 유럽의 작은 도시다운 면도 있다. 작은 개울을 따라 쭉 나있는 가로수길과, 여전히 시내를 가로지르며 중요한 이동수단이 되어주는 낡은 트램. 신기하게도 이 모든 요소들이 로테르담이라는 도시 안에서 조화로워 보인다.




로테르담에서 가장 기대한 곳, 로테르담에 오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준 손네펠트 하우스 (Huis Sonneveld)를 보러 갔다. 손네펠트라는 사람이 자기 가족과 함께 살기 위해 직접 설계하고 디자인한 가정집을 그대로 보존해서 박물관처럼 구경할 수 있는 곳이다. 반전은 그게 1933년, 무려 86년 전의 디자인이라는 것. 네덜란드 기능주의의 정수라는 평가를 받으며, 국가유산으로 지정되었을 정도다.

디자인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듣고 싶어 오디오 투어 기계를 들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손네펠트 집에 입성했다. 그런데 세상에, 1층 첫 번째 방부터 기절각. 두 딸의 공부방이자, 놀이방이자, 친구들이 오면 어울려 놀 수 있는 게스트룸이란다. 아니 그냥 인테리어만 봐도 가구 너무 예쁘고, 색감 미쳤는데. 심지어 노래 틀고 놀 수 있도록 오디오-스피커 시스템까지 갖춰져 있단다. 여기 뭐지?

첫 번째 방부터 취향저격

2층에 있는 다이닝룸과 거실. 가구나 식기가 너무 요즘 스타일인 데다 하나같이 다 예뻐서 놀랐는데, 더 놀라운 건 '디테일'이었다. 다이닝룸의 서랍은 그릇이나 포크 크기까지 고려하여 설계되었단다. 거실 서재에는 엄마 의자와 아빠 의자가 따로 있는데, 여자와 남자의 신체적 차이를 고려하여 디자인을 다르게 했다고. 미쳤다..

다이닝룸, 거실, 서재

취향 차이 분명한 두 딸의 침실. 놀랍게도 1층 공부방 겸 놀이방에서 트는 노래를 2층 침실에서도 듣거나 끌 수 있도록 오디오 시스템이 연결되어 있단다. 그리고 요즘 트렌디한 디자인 호텔에나 있을 법한 안방 화장대. 이건 진짜 갖고 싶었다.

아버지, 저는 노란 방 쓸게요!

이밖에도 드레스룸 조명, 화장실 개인 세면대와 수건걸이, 메이드 침실 등. 이게 정녕 1933년의 센스인가, 어떻게 당시에 이런 생각을 했지 싶을 정도로 충격적인 포인트가 많았다. 손네펠트가 뛰어난 디자이너이기도 했겠지만 무엇보다도 가족을 가장 잘 아는 아빠이자 남편으로서, 우리 가족을 고려한 디자인을 했기 때문에 이런 디테일이 나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또 한편으로는 내 취향도 저격했을 정도로 요즘에도 통하는 스타일이라. 정말 좋은 디자인은 세월이 변해도 좋은 디자인이구나, 유행을 타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오늘날의 로테르담이 괜히 미래도시스러운 게 아니다. 조상님들부터 시대를 앞서 나가셨어.




네덜란드 수제버거 대회에서 1등 했다는 Ter Marsch & co에서 점심을 먹었다. 버거가 아무리 수제버거라 봤자 버거지 생각했던 지난날의 나, 반성한다. 거의 미디엄 레어 스테이크가 빵 이랑 야채 사이 들어가 있다고 보면 된다. 미친 듯이 흘러내리는 육즙에 트러플 감자튀김, 생맥주를 곁들이니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TMI지만 서빙하는 언니가 너무 멋있어서 심쿵했다.

인생 버거

비교적 평범하다 싶은 건물에는 이렇게 전혀 평범하지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 정도 위트와 디자인만으로도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

워크 스페이스에 찰떡인 그림

이제 로테르담과의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떠날 시간이다. 아침에는 조용했던 토요일 마켓이 이제야 사람들로 북적인다. 지금쯤 더 예쁜 물건도 많이 팔겠지. 마음에 드는 도시는 꼭 떠나려는 순간에 가장 아름답다.

떠나는 순간, 중앙역 건물마저 예사롭지 않다. 높이 치솟은 한쪽 지붕이 진취적인 느낌을 준다. 어딘가 더 큰 세상으로 떠나야 할 것만 같은 느낌. 아비뇽에서 니스 가는 길에 마지막으로 쓰고 아껴뒀던 유레일 패스의 마지막 칸을 마저 채우고, 이제 벨기에 가는 기차를 탄다. 언젠가 꼭 한 번 살아보고 싶은 네덜란드, 다시 올게. 안녕!

로테르담 중앙역




기대했던 것보다 로테르담이 훨씬 마음에 들어버려서, 브뤼셀 가는 길에는 걱정부터 앞섰다. 벨기에에는 전혀 기대하는 포인트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필 네덜란드와 영국 사이에 있어서, 마침 유로스타가 닿길래, 잠깐 맥주 마시러 들렀다 가는 정도. 딱 그 정도로 기대감이라고는 거의 없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걱정은 현실이 되었다. 하필 벨기에 국경을 넘자마자, 그동안 문제없이 잘 써오던 유심 LTE가 먹통이 됐다. 손을 써보려고 하기도 전에 브뤼셀 북역에 도착했고, 치안 안 좋다는 소문답게 북역은 참 낡고 더럽고 으스스했다. 빨리 안전한 숙소로 도망치고 싶었는데, 구글맵을 못 쓰니 길 찾기가 쉽지 않았다. 날씨는 또 왜 이렇게 더운지,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한참을 헤매다 겨우 호스텔을 찾았다.


너무 힘들어서 빨리 들어가 뻗고 싶은 나와는 달리, 호스텔 직원은 세상만사 여유로웠다. 다른 업무부터 처리해야 하니 체크인은 좀 기다리라고 해서 내 체감상 20분을 기다렸고, 응대하는 부분에서도 이건 좀 아니다 싶은 부분이 있었다. 컴플레인할까 하다 너무 몸과 마음이 지쳐버려서, 그냥 내가 불편하고 말지 하고 방에 들어가자마자 가방 다 내팽개치고 누웠다. 벨기에 땅 밟은 지 한 시간 만에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다.

두 번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브뤼셀 북역

좀 쉬다가 슬슬 해가 지기 시작하는 저녁 무렵 밖으로 나섰다. 오로지 맥주를 마시기 위해서 지친 몸을 이끌고 나왔다. 무려 3000여 종이 넘는 맥주를 판매하는 곳으로 기네스북 기록에 오른 곳, 델리리움 카페로 향했다. 큰 펍 같은 공간일 줄 알았는데 실내가 그렇게 넓지는 않았고, 그냥 이 막다른 골목 전체가 델리리움이라고 보면 된다.

좁고, 붐비는 데다가 손님들이 다들 취해 있어서 여기서 맨 정신에 주문하는 게 보통 일은 아니었다.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서 바텐더가 눈길을 줄 때까지 기다린 끝에 비로소 주문할 수 있다. 맥주 휙휙 따르고, 나이프로 잔 표면을 커팅해서 거품 쳐내고, 잠깐 기다렸다 주는 간지 폭발 장면을 눈앞에서 생생하게 보는 건 하나의 쇼처럼 흥미로웠다.


가장 궁금했던 '델리리움 레드'를 마셔보기로 했다. 빨간색의 체리맛 맥주인데, 나름 8도짜리 술이라 우습게 봐서는 안된다. 과일의 단 맛이 과하지 않고 딱 기분 좋을 정도로 상큼하면서도, 도수가 센 게 느껴져서 천천히 음미하기에 좋은 술이었다. 네덜란드에서 내내 하이네켄만 마시다가 확실히 맥주 종류가 다양한 나라에 오니 신선했다. 이렇게 맛있는 술이 많은 곳에 살면 나는 진작에 알콜중독자가 됐을 수도 있겠다.

한국에도 팔아줘요

그래도 벨기에 왔는데 홍합요리는 한번 먹어봐야겠다 싶어 저녁식사 동행을 구했다. 연락이 됐다 안 됐다가, 우여곡절 끝에 한 분을 만나 식사를 하게 됐다. 벨기에에는 출장으로 오셨다고 한다. 해외 출장에 로망을 가진 나는 신기해서 이것저것 여쭤봤는데, 그는 출장이 썩 반갑지는 않은 눈치였다. 일 얘기해서 그런지 이상하게 긴장돼서 홍합이 무슨 맛이었는지, 와인은 코로 마셨는지 입으로 마셨는지 사실 기억도 안 난다.

홍합 파티

내일 출근하셔야 하는 분을 보내드리고 다시 혼자가 됐다. 시원한 밤공기를 맞으며 산책을 했다. 취기가 살짝 올랐는지, 첫인상이 영 별로였던 브뤼셀에도 낭만적인 모습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브뤼셀 관광지 중 유일하게 궁금하긴 했던 그랑플라스. 한밤중인데도 대낮인 양 밝았다. 어마어마하고 휘황찬란해서 입이 떡 벌어지긴 했는데 딱 거기까지였다. 놀라움 이상의 어떤 것은 아닌. 한정된 공간 안에 워낙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다 보니 생각보다 질서 정연한 모양새는 아니었다. 어디나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구나 싶었다.

어찌나 소리를 질러 대던지

이 시끌벅적한 광장에 나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게 외롭다고 느껴질 즈음, 저녁 동행을 구하는 글에 조금 늦게 연락 주신 분이 계셨다. 맥주 한 잔 하자고. 나 오늘 피곤해서 일찍 들어가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게 됐네. 함께해줄 사람이 다가오기를 내심 기다렸나 보다.

아이코 눈부셔

운 좋게 그랑플라스에 있는 식당 야외 테라스 자리를 잡았다. 여기서도 빨간 체리맛 맥주와 찐 홍합요리를 먹었다. 오늘 하루 만에 1년 치 먹을 홍합은 다 먹은 것 같다. 두 분은 전 직장동료신데 각자 유럽여행을 왔다가 마침 브뤼셀에 있는 일정이 같아서 오랜만에 만나셨다고 한다. 그런 재회 현장에 내가 끼어도 되는 건가 머쓱했지만 같이 여행 얘기하면서 편하게 대해주셨다. 어떤 대화가 오고 갔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무튼 많이 웃고 떠든 유쾌한 자리였다.

그리고 한 잔 더. 정신 차려 보니 오늘 벌써 다섯 잔째다. 그래, 벨기에에 순전히 맥주 마시러 온 건데, 오늘 밤이 아니면 또 언제 이렇게 마셔볼까 하는 생각에 과감해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그랑플라스의 화려한 불빛들이 금방이라도 나에게 쏟아질 것만 같아 보였다. 낭만적이었지만 취하긴 취했나 보다. 마지막 건배를 외치고, 정신 똑바로 차리고 숙소로 돌아왔다. 그리고 바로 곯아떨어졌지. 벨기에 와서 한 일은 빡치다가 맥주 마시고, 외롭다가 맥주 마시고, 그냥 맥주 마신 거밖에 없구나. 잘 왔다.

che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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