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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렇게 감흥이 없지,
여행 권태기인가

Day19. 벨기에 브뤼헤 - 겐트

by 이리터

이렇게나 눈 뜨기 싫었던 아침은 처음이다. 알람은 울리고, 방 안에 다른 투숙객들도 나갈 채비를 하는데 내 정신은 깨어날 생각을 안 한다. 술병이 난 건 아닌데, 머리가 아프고 무기력했다. 어제 과음하긴 했나 보다. 오늘 일정을 취소할까 싶기도 했지만 브뤼셀 안에 있어봤자 또 맥주 마시는 거밖에 할 일이 없으니까. 그럼 안될 것 같았다.

IMG_1141.jpg 특히 자몽에 감동

그래도 힘을 내보겠다고 조식부터 먹으러 갔다. 이 호스텔, 어제 나를 화나게 하긴 했지만 솔직히 시설도 준수하고, 조식은 아주 훌륭하다. 무료 조식에 따뜻한 요리와 신선한 과일과 야채가 나오는 건 처음 봤다. 덕분에 조금 나아진 상태로 다시 브뤼셀 북역을 찾았다. 왕복 기차표를 사서 근교 도시 브뤼헤에 간다.




IMG_1285.jpg 나는 누구, 여긴 어디

기차 타고 버스 타고 브뤼헤의 중심인 마르크트 광장에 두 발을 내디뎠을 때,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멍-했다. 즐거워 보이는 사람들과 수많은 관광객 속에 나 혼자 영혼 없는 투명인간이 된 것만 같았다. 그냥 전형적인 유럽의 소도시 광장 느낌이네. 쓱 둘러보고 사진도 대충 찍었다. 사실 브뤼헤는 잘못이 없는데, 그냥 그 당시의 내가 열정이 없었던 거겠지.

IMG_1282.jpg 정신 놓고 있다 말에 치일 뻔

관광지가 노잼일 땐 샵 구경으로 노선을 갈아탄다. 거리 곳곳에 초콜릿 전문점이 눈에 띈다. 벨기에 사람들은 정말 초콜릿을 좋아하는구나. 예쁘고 귀여운 모양부터 좀 기괴한 가면 모양의 초콜릿까지. 할로윈 용인가보다. 아직 10월 중순인데 벌써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나는 것도 신기했다. 역시 서양 사람들은 우리보다 크리스마스를 훨씬 더 큰 의미로 생각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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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과 극의 할로윈 vs 크리스마스




아침부터 아팠다고 징징대 놓고 이런 얘기 좀 뭐하지만. 사실 그냥 패스할까 싶었던 브뤼헤에 굳이 온 이유가 있었다. 바로 브뤼헤 맥주박물관. 양조장 투어처럼 스케일이 큰 것도 아니고, 하이네켄 익스피리언스 같이 재미 요소가 있는 건 아니지만, 나름 소박한 규모에 구성이 알차다고 해서 보러 왔다. 그냥 입장 티켓과 입장료에 맥주 3종 테이스팅이 포함된 티켓이 있었는데 당연히 후자 선택.

IMG_1192.jpg 언제 숙취가 있었냐는 듯이

맥주를 만드는 기본 재료인 물과 맥아, 효소에 대한 설명부터. 다양한 맥주의 종류, 국가/지역별 맥주, 음식 페어링, 맥주 광고와 마케팅, 맥주가 건강에 미치는 영향까지. '맥주'라는 하나의 주제에서 이렇게 수많은 이야기를 뽑아내고, 직접 체험해볼 수 있는 공간으로 구현해낸 게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박물관이면 절대 안 그랬을 텐데 맥주라 그런가. 설명도 하나씩 다 읽어보고, 오디오 가이드도 빼놓지 않고 듣게 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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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구열이 불타오른다

그리고 이건 좀 웃퍼서. 지구본을 각 국가/지역별 맥주 브랜드로 꾸며놓은 건데, 저기 한반도 너무나 휑하고 외로워 보인다. 클라우드라도 붙여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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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대망의 테이스팅 코너! 그냥 맛보기 정도일 줄 알았는데 웬 큰 맥주 펍 하나가 통째로 박물관 안에 숨어 있더라. 무려 14가지 드래프트 중에서 1인당 3잔씩을 고를 수 있고, 나름 제대로 된 맥주잔에 따라줘서 문화충격. 이게 테이스팅이라고? 아니 많이 줘서 좋긴 한데. 빈 속에 맥주 3잔 마시게 될 줄 알았으면 준비를 좀 하고 올걸 그랬다.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나 이제 맥주 좀 질리는 것 같아..

IMG_1254 2.jpg Estaminet, Boon Kriek, Palm Royale

술은 남기는 거 아니라고 배워서 대낮부터 안주도 없이 꾸역꾸역 다 마셨다. 미련하게도 그러고 바로 해장할 거리를 찾으러 나갔다. 마침 근처에 수프 잘하는 집이 있다고 해서, 그중에서 가장 해장이 잘될 것 같은 토마토 수프를 시켰다. 속이 따뜻해지면서 편안해지는 느낌. 왜 서양 사람들이 아프면 수프 끓이는지 알겠더라.

IMG_1276.jpg 벨기에 할머니의 손맛

한결 편안해진 몸과 마음으로 브뤼헤 산책. 유럽의 중세시대 모습을 잘 간직한 도시다. 운하가 흐르고 마차가 지나다니는 모습이 어색하지 않아 보인다. 마침 일요일이라 플리 마켓이 열렸는데,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마을을 배경으로 빈티지 물건들이 진열되어있으니 또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역시 빈티지 핀 뱃지 두 개 득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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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엄청난 감흥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브뤼셀과는 또 다른 정취를 느껴볼 수 있었던 브뤼헤.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이제 겐트로 향한다.

IMG_1314.jpg 날씨는 끝내줬다




여행을 준비하면서부터 이상하게 브뤼셀, 브뤼헤는 별로 안 궁금한데 겐트는 한번 가보고 싶었다. 특별히 끌리는 포인트가 있어서는 아니고, 그냥 그 도시가 주는 느낌이 좋았다. 로테르담에서 만났던 벨기에에서 교환학생을 한다는 친구도 다른 도시는 몰라도 겐트는 추천한다고 말했을 정도니. 역시 내 느낌은 틀리지 않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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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인상은 브뤼셀보다는 인간적이면서, 브뤼헤보다는 세련됐다고 느꼈다. 옛 건축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으면서도 현대적인 요소가 조화롭게 잘 어우러지고, 젊은이들이 많아 생기가 있어 보였다. 문화도 역사도 전혀 다르지만 이번 여행에서 가봤던 도시 중에서는 스위스 베른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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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길게 줄 서있길래 뭔가 하고 봤더니 와플 가게였다. 벨기에 왔으니 와플 하나쯤은 먹어줘야 예의겠지. 초콜릿, 딸기, 크림 같은 걸 별로 안 좋아해서 플레인으로 먹었다. 놀라울 정도는 아니지만 맛없을 수 없는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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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 중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와-' 하고 현실 감탄한 순간. 겐트를 가로지르는 레이에 강. 시원한 강바람이 꽉 막힌 체증을 시원하게 뚫어줬다. 레스토랑 테라스에 앉아 식사하는 사람들, 강변 둑에 앉아 병맥주를 마시는 사람들, 보트 타는 관광객들, 카약 타는 사람들. 모두들 세상에서 더 부러울 것이 없다는 듯 행복한 일요일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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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게 완벽한 풍경

이 여유로운 분위기를 즐기고 싶어 나도 한참 앉아있었다. 바쁠 일 없이 마음에 드는 곳에서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

IMG_1411 2.jpg 보트도 한번 타볼 걸 그랬나

노을 지기 시작할 무렵, 노란빛으로 물들어버린 운하가 그렇게 예뻐 보였다. 하늘도 햇빛도 바람도, 지금 이 풍경을 완벽하게 연출하기 위해 도와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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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지기 전에 조금 이른 저녁을 먹으러 갔다. 암스테르담에서 만났던 대학생 친구들이 강력 추천한 립 레스토랑. 무한리필인데 퀄리티도 맛도 상당하다고 들었다. 주문하기도 전에 앤티크한 분위기에 우선 반해버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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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으로 주는 립 한 덩어리와 버터 넣은 감자. 진짜 맛있었다. 이렇게 고기 뜯는 게 정말 오랜만이라 영양 보충한다 치고 최선을 다해 먹었다. 그런데 점심을 늦게 먹은 탓인지 너무 배불러서 이것도 겨우 먹었다. 무한리필 가게에서 리필을 못했다니. 더 분발하지 못한 나 자신에 실망했다. (아까 와플 왜 먹었냐..)

IMG_1458.jpg 고기는 늘 옳다

저녁이 되니 전체적으로 색감이 한 톤 다운된 듯한 차분함이 겐트와 잘 어울렸다. 딱 이때쯤이 제일 예쁜 것 같지만, 기차를 놓칠까 봐 서둘러 중앙역으로 돌아가야 했다. 브뤼헤도, 겐트도 잠깐 왔다 스쳐 지나가는 느낌이라 아쉬웠지만 또 아쉬울 때 떠나는 게 맞는 것 같다는 생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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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소화가 안 되는 것 같아, 브뤼셀에 도착하자마자 속을 뻥 뚫어줄 무언가를 찾았다. 마트에 스프라이트 종류가 엄청 다양하길래 쓸데없는 호기심에 라임&오이맛 스프라이트를 사버렸다. 맛은? 예.. 오이비누로 세수하며 스프라이트를 마시는 느낌. 눈 딱 감고 소화제라고 생각하고 시원하게 원샷했다.

IMG_1498.jpg 시원하긴 했고, 두 번 다신 만나지 말자

사실 오늘 하루는 그렇게 놀랍지도, 그렇게 즐겁지도 않은, 그저 그런 잔잔한 여행이었다. '어떻게 매일매일 좋을 수 있겠어'라며 쿨하게 숙소로 돌아갔다.


'28'이라고 쓰여있는 네온사인에 눈길이 갔다. 내일은 나의 28번째 생일이다. 머나먼 유럽 땅에서 혼자 보내는 생일은 어떨까. 오늘 최저점을 찍었으니 내일은 오늘보다는 재미있고 행복한 하루가 될 거다. 아, 그리고 내일은 진짜 맥주 안 마실 거다. 내 몸을 위해 딱 하루만 쉬자.

IMG_1495 2.jpg 해피 미리 버스데이 투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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