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19. 벨기에 브뤼헤 - 겐트
이렇게나 눈 뜨기 싫었던 아침은 처음이다. 알람은 울리고, 방 안에 다른 투숙객들도 나갈 채비를 하는데 내 정신은 깨어날 생각을 안 한다. 술병이 난 건 아닌데, 머리가 아프고 무기력했다. 어제 과음하긴 했나 보다. 오늘 일정을 취소할까 싶기도 했지만 브뤼셀 안에 있어봤자 또 맥주 마시는 거밖에 할 일이 없으니까. 그럼 안될 것 같았다.
그래도 힘을 내보겠다고 조식부터 먹으러 갔다. 이 호스텔, 어제 나를 화나게 하긴 했지만 솔직히 시설도 준수하고, 조식은 아주 훌륭하다. 무료 조식에 따뜻한 요리와 신선한 과일과 야채가 나오는 건 처음 봤다. 덕분에 조금 나아진 상태로 다시 브뤼셀 북역을 찾았다. 왕복 기차표를 사서 근교 도시 브뤼헤에 간다.
기차 타고 버스 타고 브뤼헤의 중심인 마르크트 광장에 두 발을 내디뎠을 때,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멍-했다. 즐거워 보이는 사람들과 수많은 관광객 속에 나 혼자 영혼 없는 투명인간이 된 것만 같았다. 그냥 전형적인 유럽의 소도시 광장 느낌이네. 쓱 둘러보고 사진도 대충 찍었다. 사실 브뤼헤는 잘못이 없는데, 그냥 그 당시의 내가 열정이 없었던 거겠지.
관광지가 노잼일 땐 샵 구경으로 노선을 갈아탄다. 거리 곳곳에 초콜릿 전문점이 눈에 띈다. 벨기에 사람들은 정말 초콜릿을 좋아하는구나. 예쁘고 귀여운 모양부터 좀 기괴한 가면 모양의 초콜릿까지. 할로윈 용인가보다. 아직 10월 중순인데 벌써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나는 것도 신기했다. 역시 서양 사람들은 우리보다 크리스마스를 훨씬 더 큰 의미로 생각하는구나.
아침부터 아팠다고 징징대 놓고 이런 얘기 좀 뭐하지만. 사실 그냥 패스할까 싶었던 브뤼헤에 굳이 온 이유가 있었다. 바로 브뤼헤 맥주박물관. 양조장 투어처럼 스케일이 큰 것도 아니고, 하이네켄 익스피리언스 같이 재미 요소가 있는 건 아니지만, 나름 소박한 규모에 구성이 알차다고 해서 보러 왔다. 그냥 입장 티켓과 입장료에 맥주 3종 테이스팅이 포함된 티켓이 있었는데 당연히 후자 선택.
맥주를 만드는 기본 재료인 물과 맥아, 효소에 대한 설명부터. 다양한 맥주의 종류, 국가/지역별 맥주, 음식 페어링, 맥주 광고와 마케팅, 맥주가 건강에 미치는 영향까지. '맥주'라는 하나의 주제에서 이렇게 수많은 이야기를 뽑아내고, 직접 체험해볼 수 있는 공간으로 구현해낸 게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박물관이면 절대 안 그랬을 텐데 맥주라 그런가. 설명도 하나씩 다 읽어보고, 오디오 가이드도 빼놓지 않고 듣게 되더라.
그리고 이건 좀 웃퍼서. 지구본을 각 국가/지역별 맥주 브랜드로 꾸며놓은 건데, 저기 한반도 너무나 휑하고 외로워 보인다. 클라우드라도 붙여주고 싶었다.
그리고 대망의 테이스팅 코너! 그냥 맛보기 정도일 줄 알았는데 웬 큰 맥주 펍 하나가 통째로 박물관 안에 숨어 있더라. 무려 14가지 드래프트 중에서 1인당 3잔씩을 고를 수 있고, 나름 제대로 된 맥주잔에 따라줘서 문화충격. 이게 테이스팅이라고? 아니 많이 줘서 좋긴 한데. 빈 속에 맥주 3잔 마시게 될 줄 알았으면 준비를 좀 하고 올걸 그랬다.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나 이제 맥주 좀 질리는 것 같아..
술은 남기는 거 아니라고 배워서 대낮부터 안주도 없이 꾸역꾸역 다 마셨다. 미련하게도 그러고 바로 해장할 거리를 찾으러 나갔다. 마침 근처에 수프 잘하는 집이 있다고 해서, 그중에서 가장 해장이 잘될 것 같은 토마토 수프를 시켰다. 속이 따뜻해지면서 편안해지는 느낌. 왜 서양 사람들이 아프면 수프 끓이는지 알겠더라.
한결 편안해진 몸과 마음으로 브뤼헤 산책. 유럽의 중세시대 모습을 잘 간직한 도시다. 운하가 흐르고 마차가 지나다니는 모습이 어색하지 않아 보인다. 마침 일요일이라 플리 마켓이 열렸는데,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마을을 배경으로 빈티지 물건들이 진열되어있으니 또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역시 빈티지 핀 뱃지 두 개 득템.
솔직히 엄청난 감흥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브뤼셀과는 또 다른 정취를 느껴볼 수 있었던 브뤼헤.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이제 겐트로 향한다.
여행을 준비하면서부터 이상하게 브뤼셀, 브뤼헤는 별로 안 궁금한데 겐트는 한번 가보고 싶었다. 특별히 끌리는 포인트가 있어서는 아니고, 그냥 그 도시가 주는 느낌이 좋았다. 로테르담에서 만났던 벨기에에서 교환학생을 한다는 친구도 다른 도시는 몰라도 겐트는 추천한다고 말했을 정도니. 역시 내 느낌은 틀리지 않았구나.
첫인상은 브뤼셀보다는 인간적이면서, 브뤼헤보다는 세련됐다고 느꼈다. 옛 건축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으면서도 현대적인 요소가 조화롭게 잘 어우러지고, 젊은이들이 많아 생기가 있어 보였다. 문화도 역사도 전혀 다르지만 이번 여행에서 가봤던 도시 중에서는 스위스 베른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길게 줄 서있길래 뭔가 하고 봤더니 와플 가게였다. 벨기에 왔으니 와플 하나쯤은 먹어줘야 예의겠지. 초콜릿, 딸기, 크림 같은 걸 별로 안 좋아해서 플레인으로 먹었다. 놀라울 정도는 아니지만 맛없을 수 없는 맛.
오늘 하루 중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와-' 하고 현실 감탄한 순간. 겐트를 가로지르는 레이에 강. 시원한 강바람이 꽉 막힌 체증을 시원하게 뚫어줬다. 레스토랑 테라스에 앉아 식사하는 사람들, 강변 둑에 앉아 병맥주를 마시는 사람들, 보트 타는 관광객들, 카약 타는 사람들. 모두들 세상에서 더 부러울 것이 없다는 듯 행복한 일요일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이 여유로운 분위기를 즐기고 싶어 나도 한참 앉아있었다. 바쁠 일 없이 마음에 드는 곳에서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노을 지기 시작할 무렵, 노란빛으로 물들어버린 운하가 그렇게 예뻐 보였다. 하늘도 햇빛도 바람도, 지금 이 풍경을 완벽하게 연출하기 위해 도와주고 있다.
해가 지기 전에 조금 이른 저녁을 먹으러 갔다. 암스테르담에서 만났던 대학생 친구들이 강력 추천한 립 레스토랑. 무한리필인데 퀄리티도 맛도 상당하다고 들었다. 주문하기도 전에 앤티크한 분위기에 우선 반해버렸고.
기본으로 주는 립 한 덩어리와 버터 넣은 감자. 진짜 맛있었다. 이렇게 고기 뜯는 게 정말 오랜만이라 영양 보충한다 치고 최선을 다해 먹었다. 그런데 점심을 늦게 먹은 탓인지 너무 배불러서 이것도 겨우 먹었다. 무한리필 가게에서 리필을 못했다니. 더 분발하지 못한 나 자신에 실망했다. (아까 와플 왜 먹었냐..)
저녁이 되니 전체적으로 색감이 한 톤 다운된 듯한 차분함이 겐트와 잘 어울렸다. 딱 이때쯤이 제일 예쁜 것 같지만, 기차를 놓칠까 봐 서둘러 중앙역으로 돌아가야 했다. 브뤼헤도, 겐트도 잠깐 왔다 스쳐 지나가는 느낌이라 아쉬웠지만 또 아쉬울 때 떠나는 게 맞는 것 같다는 생각도.
아무래도 소화가 안 되는 것 같아, 브뤼셀에 도착하자마자 속을 뻥 뚫어줄 무언가를 찾았다. 마트에 스프라이트 종류가 엄청 다양하길래 쓸데없는 호기심에 라임&오이맛 스프라이트를 사버렸다. 맛은? 예.. 오이비누로 세수하며 스프라이트를 마시는 느낌. 눈 딱 감고 소화제라고 생각하고 시원하게 원샷했다.
사실 오늘 하루는 그렇게 놀랍지도, 그렇게 즐겁지도 않은, 그저 그런 잔잔한 여행이었다. '어떻게 매일매일 좋을 수 있겠어'라며 쿨하게 숙소로 돌아갔다.
'28'이라고 쓰여있는 네온사인에 눈길이 갔다. 내일은 나의 28번째 생일이다. 머나먼 유럽 땅에서 혼자 보내는 생일은 어떨까. 오늘 최저점을 찍었으니 내일은 오늘보다는 재미있고 행복한 하루가 될 거다. 아, 그리고 내일은 진짜 맥주 안 마실 거다. 내 몸을 위해 딱 하루만 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