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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에서 혼자 보내는 28번째 생일

Day20. 영국 런던 세인트판크라스 - 피츠로비아 - 메릴본

by 이리터

새벽에 눈을 뜨니 카톡이 여러 개 와있었다. 오늘은 내 생일. 타지에 혼자 나와있어서 그런지 생일 축하한다고 챙겨주는 사람들이 특히 더 고맙다. 그중에는 서로 바빠 몇 년 동안 연락이 뜸했던 친구들도 있었다. 고맙다고, 한국 가면 오랜만에 꼭 한번 얼굴 보자고 답했다.


딱 생일날에 맞춰 런던에 입성하는 계획이었다. 아직 어두컴컴한 새벽에 짐을 싸고 나와 유로스타를 타러 브뤼셀 미디역에 도착했다. 유로스타는 처음 타보는데 기차역에서 공항처럼 수속을 밟는 절차가 신기했다. 그동안은 옆 동네 놀러 가듯 국경을 넘나들곤 했는데 이번엔 뭔가 다르다. 새삼 영국에 간다는 게 실감 났다.

이미 45분 딜레이

새벽 일찍 숙소를 떠난 게 무색하게 유로스타가 한참 지연됐다. 탑승이 45분 지연됐는데 중간에 갑자기 열차가 멈춰서 또 한참을 기다렸다. 막연한 기다림을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겠냐만은, 시간 많은 장기 여행자는 너그럽게 기다릴 수 있었다. 어차피 런던 도착해서 오늘 꼭 해야만 하는 일정 같은 건 없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예정보다 두 시간 정도 늦게 도착했고, 간단한 절차를 거쳐 표 값의 일부를 보상받을 수 있었다.

그래도 긴 여정 끝에 땅 밟으니 좋더라

날씨 안 좋기로 소문난 런던 답게 먹구름이 잔뜩 끼었고, 우산을 쓰기도 애매하게 빗방울이 미스트처럼 흩뿌리고 있었다. 그동안 날씨운이 잘 따랐던 편이라 겨우 이 정도 비에도 멘탈이 깨진다. 지친 몸으로 캐리어를 끌고 헤쳐나갈 자신이 없어 우선 간단히 배를 채우기로 했다.


음식 맛없기로 소문난 런던에서 그나마 Nandos 페리페리 치킨은 먹을만했다는 지인의 추천이 떠올랐다. 기차역 바로 앞 지점이라 그런지 사람이 너무 많아 한참을 기다렸고, 딱히 사이드 메뉴가 안 끌려서 안 시켰더니 이렇게 휑한 접시를 갖다 줘서 눈물이 찔끔 날 뻔했다. 게다가 오늘은 건강을 생각해서 맥주를 안 마시기로 다짐한 날이라, 콜라와 함께 퍽퍽한 치킨 반쪽을 꾸역꾸역 먹었다. 서러워도 먹어야 산다.

휑한 것도 서러운데 맛도 없다

숙소에 체크인하러 갔다. 그동안 주로 호스텔 도미토리를 떠돌아다녔는데, 런던에서만큼은 잠깐이나마 살아보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싶어 큰 마음먹고 아파트형 스튜디오를 빌렸다. 여행 후반부니까 바쁘게 돌아다니기보다는 편하게 쉬면서, 장 봐와서 혼자 요리도 해 먹고 싶었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낡은 건물에, 다른 사람과는 절대 같이 쓸 수 없을 정도로 좁은 방이지만, 딱 이 정도만이라도 편안한 나만의 보금자리가 있다는 게 기뻤다.

나름 공원뷰 전망에, 부엌과 각종 조리기구까지 풀셋

짐을 풀고 옷장과 서랍에 필요한 물건들을 넣어놨다. 오늘 저녁에 바로 쓸 수 있게 프라이팬과 식기 등 주방용품도 한 번씩 닦아 놓고, 밀린 빨래도 해치웠다.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역시 사람은 집이 있어야 하나 보다.




그래도 런던 첫날인데 집안일만 하며 보낼 수는 없으니, 숙소 근처 동네인 피츠로비아 일대를 구경해보기로 했다. 다행히 이제 비는 조금 그친 듯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래피티

영국에 오니 좋은 점, 길 가다 보이는 표지판, 간판, 포스터의 내용을 다 이해할 수 있었다. 독일이나 프랑스를 여행하면서는 여기는 뭐하는 곳일까, 저 광고는 무슨 뜻일까, 궁금해도 알지 못한 채 그냥 넘어가야만 했던 순간이 많았는데. 영어는 다 이해할 수 있으니 작은 메시지 하나하나도 크게 와 닿았다. 활자 중독인 사람처럼 눈에 보이는 모든 걸 읽고 해석했고 다녔다.

런던 여행을 준비하며 가장 궁금했던 곳은 꼭 가봐야 할 명소나 관광지, 박물관이 아닌, 작은 카페였다. 엄청 유명하지도, 눈에 띄지도, 그렇다고 예쁘지도 않은 카페. 무려 옛날 지하 공중 화장실을 개조했다는 카페 Attendant Fitzrovia였다.

컨셉이 아니다 이건 찐이다

밖에서 볼 땐 썩 들어가고 싶지 않은 느낌이었는데, 계단을 내려가 보니 지하에 정말 작고 꽤 아늑한 카페가 숨어 있었다. 벽을 보고 앉는 1인석 자리에 앉아 따뜻한 라떼와 브라우니를 시켰다. 프라이빗하고 조용한 느낌이 좋았다. 물론 한때 화장실이었다는 사실이 좀 꺼림칙하긴 하고, 문득 내가 앉은 테이블이 변기 같아 보여서 잠깐 비위가 상하기도 했지만. 옛 공간을 보존·개조한 공간들은 그런 순간순간의 느낌으로 평가되기에는 아쉬운, 오랜 세월을 잇는 특별함이 있다고 믿는다.


쿠폰 모양까지 이렇게 디테일할 필요는 없었잖아요..

따뜻한 커피 한잔을 마시니 몸의 피로가 싹 가시는 듯했다. 딱히 목적지를 정해두지는 않은 채 그냥 마음 가는 대로 걸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피츠로비아랑 메릴본까지 싹 한번 둘러보자.

피츠로비아와 메릴본의 온도차




런던의 흔한 거리 풍경을 보며 걷다 보니, 구글맵 지도에 별표를 달아뒀던 '모노클 카페'가 나왔다. 밖에서만 봐도 이미 분위기 있고 멋있다. 곧바로 커피를 한 잔 더 마실 자신은 없어 잠시 망설였지만, 일단 들어가 보기로.

잡지에서 방금 튀어나온 듯한 카페

일본인 주인이 반겨주고, 소녀시대와 씨엔블루 노래가 나오길래 순간 시부야 모노클에 온 듯한 친근함이 들었다. 얼그레이 티를 시켰는데 우유 타 마시라고 주는 거 보고 새삼 영국 온 걸 실감했다. 뜻밖의 밀크티를 마시며 테이블 위에 있는 모노클 두세권 정도 집어서 관심 있는 부분 위주로 슥슥 읽어봤다. 집에서는 사놓고도 안 읽던 게 여행 왔다고 너무 재밌게 술술 읽히는 거다.

서비스로 챙겨주는 초콜릿까지

그중에서도 유독 내 시선이 오래 머물렀던 한 페이지. Have an experience without rating it. 굳이 평가하려 하기보다는 우선 많이 경험해보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지 말고, 철벽 치지 말고, 남의 평가에 휩쓸리지 말고. 내가 스스로 보는 눈을 기를 수 있게 닥치는 대로 더 찾아보고, 더 만나보고, 더 여행하자.

나의 새해 다짐

런던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 중 하나라는 Daunt Books. 세월의 흔적이 깃든 책방의 느낌이 좋다. 양쪽으로 쭉 가지런히 서가가 진열돼있는 모습을 2층에서 내려다볼 땐 약간의 짜릿함도 느껴졌다.

여행 서적 전문 서점이라, 크게는 대륙별로 작게는 국가별로 나뉘어 관련 책을 진열해 놨다. 외국 서점에서 나라별 여행책을 살펴보면 참 재미있다. 이 나라에서 다른 나라들을 어떻게 보는지, 얼마나 신경 쓰는지를 책꽂이의 크기와 책의 종류로 한눈에 알 수 있다. 아무래도 영국에서는 프랑스·이탈리아 등 주변 유럽권 국가와 미국에 대한 책을 많이 볼 수 있었다.

그 외 눈에 띄었던 건 일본 칸이었다. 크게 'JAPAN'이라고 쓰여있는 책장의 존재감은 꽤 컸다. 우리의 KOREA는 그 뒤편에, 따로 국가명이 명시되어있지는 않고 홍콩·대만 등과 섞여있었다. 그마저도 한국의 멋진 곳을 소개하는 여행책보다는 북한에 대한 수필이나 소설책이 더 많았다. 한국의 존재감을 실감하고, 이렇게 세계가 넓다는 게 새삼 피부로 와 닿았다.

마지막으로 근처에 있는 The Conran Shop까지 구경했다. 잡지부터 각종 소품, 생활 용품, 가구까지 내가 좋아하는 것만 다 모아놓고 파네. 탐난 물건이 한두 개가 아니었지만 캐리어가 좁으니 빈 손으로 나올 수밖에.

그대로 내 방에 옮겨와주세요..




어느덧 해가 지고 푸르른 저녁이 됐다. 오늘 저녁에는 중요한 할 일이 있으니 이만 숙소로 돌아가야 한다. 가는 길에 Sainsbury에 들러 간단히 장을 봤다. 앞으로 나흘 동안 요리해먹으려면 꼭 필요한 올리브유·버터·양념, 내일 아침에 먹을 과일, 그리고 오늘 저녁 만찬을 위한 스테이크용 고기·샐러드용 야채·그리고 와인을 샀다.

요리 준비

노래 틀어놓고 흥얼거리며 야채를 다듬고 고기를 구웠다. 거기다 오늘을 위해 한국에서부터 가져온 미역국 컵밥도 개시! 금세 그럴듯한 생일상이 완성되었다. 엄마는 타지에서 나 혼자 생일을 맞아 미역국도 못 먹어 어떡하냐고 했는데, 잘 챙겨 먹고 있으니 걱정 마시라고 사진 찍어 보내드렸다. 내가 나를 위해 차린 셀프 생일상이 보기에는 좀 그래도 맛있었고, 혼자 먹으면서도 전혀 외롭지 않고 오히려 뿌듯하고 따뜻했다.

잊지 못할 셀프 생일상

1년에 한 번씩 찾아오는 생일이 뭐 대단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내 생일을 이렇게까지 나 하고 싶은 대로, 나 자신에게만 집중하며, 주체적으로 보낼 수 있는 기회가 내 인생에 몇 번이나 될까 싶어서. 이만하면 감히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었던 나의 28번째 생일이었다. 남은 와인을 비우며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런던을 여행할 마음의 준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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