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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에서 파란 하늘을 볼 확률

Day21. 영국 런던 서더크 - 웨스트민스터 - 프림로즈힐

by 이리터

생전 처음 와본 도시에서 눈을 떴는데도 전혀 낯설거나 불안하지 않다. 익숙한 사물들이 널브러져 있는, 온전한 나만의 방은 마음에 편안함을 준다.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따뜻한 커피를 내려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차렸다.

토피훕 요거트 짱맛

숙소가 세인트 판크라스 바로 앞이라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세인트 판크라스 호텔이 보인다. 어제도 이 앞을 서너 번은 지나다녔을 텐데, 비 때문에 올려다볼 겨를이 없었나 보다. 호텔의 웅장함에 압도되어, 해리포터의 나라에 온 걸 실감했다.

킹스크로스 역에서 오이스터 카드를 구매해 지하철 타고, 오늘의 첫 행선지인 '타워 오브 런던'으로 향했다. 중세시대 성이 도시 고층건물들 사이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광경이 신기했다. 물론 유적지는 내 취향이 아니라 관람은 패스.

Tower of London

사실 '타워브릿지' 보러 온 거다. 별 이유는 없지만 그냥 '런던'하면 가장 먼저 떠올랐던 명소. 웅장하면서도, 잘 보면 무슨 장난감처럼 귀여운 구석이 있다. 어떻게 이런 도시 상징물에 저렇게 퓨어한 하늘색 컬러를 쓸 생각을 했을까.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보니 더욱 잘 어울려 보였다.

런던의 상징들

귀여운 타워브릿지를 건너, 템즈강 아래쪽 동네인 서더크(Southwark)에 입성했다. 길거리에 빨간 표지판의 무인 자전거 대여소가 눈에 띄었다. 지하철, 버스, 기차 같은 도시의 공식 교통수단 중 하나로 자전거가 있는 게 신기했다. 애매한 거리를 이동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편리한 수단이겠지만, 나는 자전거를 탈 줄 모른다는 반전.

런던의 따릉이는 역시 빨간색

아침에 마신 커피의 약빨이 떨어져 갈 때쯤, 한 잔 더 하러 근처 카페를 찾았다. 이름부터 강렬한 'Fuckoffee'. 분명 여기 사장님은 왠지 남들을 신경 쓰기보다는, 자기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사는 사람일 것만 같다. chill한 분위기였지만 너무 힙해버려서, 잠깐 앉아있다 나와야 했다.

쿠폰도 예사롭지 않다




남은 커피를 들고 한참을 걸으며, 런던 브릿지까지 건넜다가 다시 돌아왔다. 큰 강이 가로질러 흐르는 도시는 역시 매력적이다. 끊임없이 움직이며 발전하고, 늘 깨어있는 듯한 생동감이 느껴진다.

런던 브릿지에서 바라본 타워 브릿지

도시의 생생한 일상을 느낄 수 있는 곳 하면 또 시장을 빼놓을 수 없다. 런던에서 가장 오래된 시장 '버로우 마켓'. 물론 세월이 흐르며 수 없이 많이 바뀌었겠지만 700년이 넘은 시장인데, 지붕이나 기둥, 상점 간판, 벤치나 쓰레기통 등에 일관된 컬러와 디자인을 써서 전반적으로 깔끔해 보이는 점이 인상 깊었다. 길거리에서 오이스터나 빠에야 같은 음식을 저렴한 가격으로 즐기는 사람들을 보며 살짝 혹하기도 했지만.

Borough Market

사실 점심 먹을 곳을 미리 정해뒀었다. 생면 파스타 레스토랑 파델라(Padella). 여기서 직접 뽑은 면을 말도 안 되는 착한 가격에 먹을 수 있는 곳이다. 싼 만큼 양이 적은 편이긴 해서, 나는 두 접시를 시켰고, 둘이서 세 접시 시키면 딱 맞을 것 같다. 엄청 기대하고 먹었는데 솔직히 내가 메뉴를 잘못 골랐구나 싶었다. 하나는 너무 짜고, 하나는 희한하게 신맛이 나서 둘 다 조금씩 먹다 남겨야 했다.

이 두 가지는 비추

다시 템즈강을 따라 걷는다. 아침부터 느낀 거지만 오늘 런던의 날씨는 진짜 미쳤다. 비바람이 부는 어제의 하늘을 기억하고 있어서인지 더욱. 청량하고 푸른 가을 하늘에 마시멜로우처럼 뭉게뭉게 피어있는 흰 구름이 어찌나 예뻐 보이던지.

시원하고 청량했던 템즈강

런던에서 이렇게 완벽한 하늘을 만나는 건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멍하니 서서 하늘 구경, 건너편 세인트폴 성당 구경, 다리 건너는 사람들, 유람선 탄 사람들 구경. 더욱 꼼꼼히 그 순간을 느끼려 애썼다.




런던에 왔으니 잠깐이나마 예술을 즐겨줘야 한다. 테이트 모던은 그 자체로 모던함의 끝판왕이다. 과거에 버려진 화력발전소 건물이 현대미술관으로 다시 생명을 얻었다는 배경부터 이미 '설정 과다'.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열려있다

무료입장이라 그런지, 평일 낮인데도 불구하고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부담 없이 이곳을 찾은 듯했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예술을 감상하는 편안한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다. 멍하니 한 작품 앞에서 한참을 서있는 사람, 단체로 다니며 큐레이터의 설명에 집중하는 사람들, 아예 바닥에 자리 잡고 앉아 작품을 따라 스케치하는 사람들. 예술 앞에는 정해진 방식도, 정답도 없다.


전시관이 너무 커서 하루 종일 있어도 다 못 볼 것 같아 나도 선택과 집중을 했다. 개인적으로 4층 전시관에 있던 미디어 관련 전시가 가장 흥미로웠다.

인상 깊었던 작품들

2층 카페 테라스에서는 이렇게 멋진 뷰를 감상할 수 있다. 미술알못이라 그렇겠지만, 사실 나는 그 어느 미술작품도 현실보다 아름다울 수는 없다고 믿기 때문에. 조금 미안하지만 테이트 모던에서 본 것 중 가장 멋진 건 바로 이 풍경, 이 순간이었다.

배는 별로 안 고픈데 뭘 좀 마시면 좋겠다 싶어 근처에 미리 알아봐 둔 펍으로 향했다. 1676년에 문을 연 'The George Inn'은 런던에서 가장 오래된 펍 중 하나로, 셰익스피어와 찰스 디킨스의 단골 아지트였다고 한다. 서울로 치면 통의동 보안여관 옆에 있는 노포 같은 느낌이려나. 낡았다기보다는 중후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세월의 멋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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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골집에 여전히 남아있는 그의 흔적




나름 '본격적인' 런던 여행 첫날이니 유명한 랜드마크들에 발도장 찍어줘야 할 것 같아서. 지하철을 타고 런던아이와 빅벤을 볼 수 있는 웨스트민스터로 넘어왔다. 아마도 가장 런던스러운 곳 아닐까 하는 기대감을 품고. 그런데..

이런 걸 기대한 게 아닌데

날씨가 심상치 않다. 먹구름이 잔뜩 뒤덮이니 아침에 본 청량한 런던은 어디 가고 칙칙한 회색 도시만 남았다. 관람차가 이렇게 안 예쁜 곳에 있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현실은 우중충함 그 자체였다. 칼바람까지 불어오니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추웠다. 살짝 우울해질 뻔해서 미련 없이 떠났다.

빅벤은 공사 중

그냥 이곳을 떠나고 싶어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바로 오는 버스에 올라탔다. 2층 창가 자리에 앉아 바깥 풍경을 보는 재미에 빠졌다. 시선이 살짝 더 높아졌을 뿐인데, 훨씬 더 멀리 폭넓게 보인다. 얼마 안 가서 방금 뭔가 엄청난 걸 본 것 같다는 느낌에 홀린 듯이 사람들을 따라 내렸다.

여기가 내셔널 갤러리 앞 트라팔가 광장이라는 건 나중에 지도를 보고 알았다. 하루에 미술관 한 군데 이상 보기는 힘든 사람이라 과감히 내셔널 갤러리 관람은 스킵. 대신 광장에서 벌어지는 길거리 예술가들의 자유로운 퍼포먼스를 보는 재미가 있었다. 버스킹, 마술쇼, 각종 묘기, 바닥에 대형 그림을 그리는 아트쇼까지. 눈과 귀를 사로잡는 요소가 넘쳐나는 곳.

Trafalgar Square

언뜻 햇살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해서, 해질 무렵에는 다시 구름이 조금 걷힐 수도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잠깐이었지만 악명 높은 런던의 날씨 변화를 실감한 하루였다. 이 정도 나아진 게 어디냐며 이왕이면 날이 좋을 때 가보고 싶었던 곳, 프림로즈힐을 오늘의 마지막 행선지로 정했다.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경치가 볼 만하다는 프림로즈힐은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한적한 주택가에 있다.

나이스 타이밍. 프림로즈힐에서 꼭 노을을 보고 싶었는데 딱 맞춰왔다. 이미 노을을 감상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언덕 위에 올라가 있었다. 혼자, 또는 연인이나 친구들과 자리 잡고 앉아 오늘 저녁의 낭만을 즐기는 사람들. 나도 시내 스카이라인이 적당히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이어폰을 꼈다. 잔잔한 발라드를 혼자 감상하기에 완벽하다.

이렇게 멋진 뷰를 보며 감성에 젖어보려는 나의 노력은 애석하게도 오래가지 못했다. 한 커플이 내 앞에 자리를 잡았는데 애정행각이 너무 심해서 안 쳐다보려고 해도 눈에 거슬렸다. 어떻게 1초도 안 쉬고 뽀뽀를 하지. 그리고 한국말이 너무 크게 들려서 보니 앞에도, 옆에도, 뒤에도 한국인들이었다. 친구들끼리 와서 놀 수는 있지만, 시끄럽게 술판 벌이는 건 너무 하잖아요.. 내가 자리를 옮기거나 이어폰 볼륨을 높였으면 되는 문제이기는 했는데, 결정적으로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추웠다. 나름 언덕이라고 칼바람이 불어서 덜덜 떨다가 결국 기권.

이 정도 야경으로 만족한다

결국 야경까지는 못 보고 해가 지기 직전의 보랏빛 하늘을 뒤로한 채 내려왔다. 내려오니 세상 조용하고, 그렇게 춥지도 않아서 살짝 배신감이 들긴 했지만. 오늘 아침부터 쉬지도 않고 이곳저곳 너무 바쁘게 돌아다녔다. 열심히 여행한 자, 저녁 먹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구글맵에서 asian market을 검색해봤는데, 마침 숙소 근처에 한인마트가 있길래 감격했다. 이름도 정겹게 'Oseyo'라니, 오라길래 갔다. 오랜만에 보는 고국의 음식에 정신 놓고 구경하다 결국 햇반과 김치, 비빔면 정도 소박하게 사서 나왔다.

정겨운 이름

그리고 맞은편 Sainsbury에 갔는데 마침 pork belly를 말도 안 되는 가격에 세일을 하는 거다. 이거 삼겹살이잖아. 어떻게 런던에서 삼겹살을 먹을 줄 알고 김치와 비빔면 살 생각을 했을까. (먹을 거에 촉이 좋은 편) 한껏 신이 나서 뚝딱 한 상을 차렸다. 진심 행복해서 창문 열고 소리 지를 뻔했다. 런던, 너네도 이렇게 맛있는 것 좀 먹고살아라!

이번 여행 통틀어서 제일 맛있고 든든한 저녁식사를 한 덕분에 한껏 기분이 좋아졌다. 과연 내일 날씨는 어떨까. 일기 예보는 하루 종일 비가 온다고 하던데. 내일은 런던의 파란 하늘을 볼 수 없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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