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비 오는 런던, 그리고 릴리 알렌

Day22. 영국 런던 코벤트가든 - 소호 - 노팅힐

by 이리터

눈을 떠도, 커튼을 걷어도 햇빛이 전혀 들어오지 않는 아침. 종일 비 소식에 험난한 여정이 예상된다. 이틀 만에 영국 음식이 맛없음을 몸소 깨닫고, 든든한 아침식사를 준비했다. 모닝 삼겹살은 나도 처음 해보는데, 나름 콘티넨탈 조식st 메뉴 사이에 껴있으니 그냥 베이컨인 셈 치고 넘어가 주자.

베이컨임 암튼 베이컨임

딱히 목적지를 정해두진 않았고, 우선 피카딜리 서커스 같은 번화가로 한번 나가보자 하고 나섰는데. 별생각 없이 사람들을 따라 걷고 있다 보니 웬 공원이 나오더니.

축축한 낙엽을 밟으며

알고 보니 버킹엄 궁전 가는 길. 마침 근위병 교대식을 하는 시간이었나 보다. 맞아, 이런 게 있었지. 이거 보려고 일찍부터 오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지. 뒤늦게 생각났다. 교대식 같은 거엔 그만큼 관심이 없었다는 거다. 온 김에 볼까 했는데 사람이 많아 잘 보이지도 않고, 계속 비 맞고 있기도 힘들어서 한 3분 정도 보다가 미련 없이 떠났다.

비 오는데 고생이 많으세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벌써 지친다. 잠깐 쉬어가기 위해 TAP Coffee에 들렀다. 아침에 블랙커피 마시고 나왔는데, 한 시간도 안돼서 따뜻한 플랫화이트가 당기는 런던의 가을 날씨.

빈티지 설탕 캔이 마음에 들었다




흐린 날씨, 고풍스러운 건축양식, 빨간 공중전화 박스와 2층 버스, 킹스맨 st 슈트 입은 신사들. 딱 내가 상상했던 런던의 풍경, 런던의 공기 그 자체였던 리젠트 스트리트 일대. 복잡하고 바쁜 도시지만 차분하고 정적인 분위기가 깔려있다.

빨간 버스와 빨간 공중전화 부스

런던에서는 좀 차려입는 게 좋다고 조언해준 지인들의 말이 떠올랐다. 여기 사람들은 그냥 친구 만날 때나 놀러 갈 때도 어느 정도 옷을 갖춰 입는 편이기에, 혼자 너무 여행객처럼 입으면 자신이 너무 초라해 보일 수 있다고 했다. 그냥 웃어넘겼지만 막상 와보니 확실히 다른 도시와는 다르긴 하다. 이 거리에서 제일 캐주얼하게 입은 사람, 나야 나.

킹스맨 그 거리

계속 날은 흐리지만 그래도 비는 어느 정도 그친 것 같다. 시야 다 가려버리는 우산 안 써도 되는 게 어디냐며. 어제는 맑았다 흐리니 나라 잃은 듯이 우울했는데, 오늘은 비 오다 그치고 흐리니 그저 감사하다.

영국 음식이 하도 맛없어서 런던에서 그나마 먹을 만한 음식은 다 다른 나라 음식이란다. 다행인 건, 외국 음식 중에서도 맛있는 것만 들어온다고. 소호 쪽으로 넘어오니 확실히 다른 나라 느낌이 많이 난다. 이탈리아부터 중국까지 커버하는 이곳, 약간 이태원 같은 동네일까.

일정 주기로 런던에서 핫한 외국 음식 트렌드가 있는데, 지금은 페루 음식이 뜨고 있다고 책에서 본 적 있다. 한국에서는 먹어보기 힘들 것 같아 오늘 점심은 페루 음식 레스토랑에서 세비체를 먹으러 갔다. 회를 좋아하지만 세비체는 상상 이상으로 신 맛이 강해 먹기 힘들었다. 식초로 추정되는 소스를 최대한 덜어내고 먹었지만, 결국 회만 겨우 건져 먹고 양파는 거의 다 남겼다.

초장이랑 간장 좀 주세요

달달한 냄새에 이끌려서 둘러보니 바로 옆에 포르투갈 에그타르트 전문점이 있었다. 갓 나온 에그타르트 하나로 세비체로 껄끄러워진 입을 진정시켰다. 진짜 맛있었다. 식사는 페루, 디저트는 포르투갈. 역시 글로벌한 동네라 먹는 것도 글로벌하다.




잡지와 독립 간행물을 파는 magMA과 런던 최대 규모의 서점 Foyles. 런던은 도시 공공 디자인뿐 아니라 대기업이나 소상공인도 빨간색 포인트를 즐겨 쓰는 듯하다.


특이하게 magMA에는 코리아 디자인 팝업 스토어가 진행 중이라, 아트박스나 핫트랙스에서 팔 법한 아기자기한 한국 감성의 팬시 용품이 많이 보였다. Foyles에도 한국어 교재나 한국 소설이 스페셜하게 진열된 코너가 크게 두 개쯤 있었다. 마침 한국 관광 홍보 주간 같은 거였다거나, BTS와 손흥민으로 한국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거나. 여하튼 반가웠다.

런던의 서점들

도시를 대표하는 서점 한 두 군데는 꼭 가보는 편이다. 언어는 몰라도 대충 짐작 가는 단어나 표지 디자인으로 그 나라 사람들의 관심사를 대략 한눈에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 독해가 가능한 영어를 사용하는 도시의 서점은 얼마나 더 재미있겠는가. 괜히 사지도 않을 책을 여러 권 넘겨보며 꽤 오랜 시간을 보냈다.

뜻밖의 친구들 만난 곳

정말 사고 싶어서 한참을 고민했지만 너무 무거워 결국 포기해야 했던 책, 릴리 알렌의 인생을 서술한 에세이 <My Thoughts Exactly>. 릴리 알렌의 음악을 좋아한다. 생각해보니 처음으로 런던에 가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던 것도 'LDN' 뮤직비디오를 보고 난 후였다. 지난 사흘간 런던에 머물면서도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곡을 많이 찾아들었고.

런던이라는 도시는 릴리 알렌의 노래와 꽤 많이 닮아있는 것 같다. 어딘가 글루미 하지만 마냥 우울하지만은 않은, 겉으로는 무덤덤하고 위트 있으면서도 속은 따뜻하고 단단한. 모순적이면서도 공감 가는 그런 정서가 깔려있다. 특히 'Littlest Things'가 잘 어울린다. 나를 런던으로 데려온 그녀, 그리고 이 땅에서 들으니 더욱 찰떡같은 그녀의 목소리.


음악에 몰입하여 걷다 보니, 주위를 둘러싼 길거리 풍경은 영화 세트장이고, 이어폰으로 흘러나오는 노래가 곧 OST다.

우리나라로 치면 보수동 책방골목 같은 작은 골목 Cecil Ct. 서점, 잡화점, 갤러리 등 오랜 세월이 깃든 물건을 파는 가게들로 줄지어 있다. 무언가를 수집한다는 것은 어떤 대상에 대한 애정은 물론이고, 오래도록 꾸준한 노력과 집념이 필요한 일이다. 수집가들을 좋아하고, 또 존경하는 이유다.

Cecil Ct

아무래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서점은 골즈보로 북스. '2만 원짜리 책을 200만 원에 파는 서점'으로 <퇴사 준비생의 런던>에 소개된 바 있다. 저자가 직접 서명한 서적의 초판만을 판매함으로써 책의 가치를 높이고, 다른 서점과 차별화를 꾀한 곳.




센스 있는 런던 지하철 광고

지하철을 타고 노팅힐에 왔다. 역에서 내려서 한참을 걸어야 했지만 발걸음은 가벼웠다. 런던의 주택가는 처음이라, 파스텔톤부터 무지개 컬러까지 형형색색의 귀여운 집들 구경하는 재미에 지루할 틈이 없었다.

귀여운 런던의 주택들

조금 뻔하지만 노팅힐에 온 이유. 영화 <노팅힐>에 나온 휴 그랜트의 서점이다. 아마 작년 미국 여행에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영화를 봤을 거다. 그때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몽글몽글한 감정이, 실제 그 장소에 왔다고 생각하니 다시 한번 마음을 어루만졌다. 솔직히 서점 내부는 특별할 게 없었지만, 기념하고자 영화 대사가 적힌 엽서를 샀다.

줄리아 로버츠의 대사

지도를 보고 포토벨로 마켓 근처에 있는 또 하나의 영화 촬영지를 열심히 찾아갔다. 매년 크리스마스 즈음 찾아보는 영화 <러브 액츄얼리>의 스케치북 고백신을 찍은 곳이다. 너무 유명해서 이제는 클리셰가 되어버렸지만 여전히 깊은 울림으로 남아있는 장면. 영화 캡처를 들고 정확히 어느 집 앞인지 찾아보려고 한참을 둘러봤지만, 다 너무 비슷하게 생겨서 실패. 아무튼 여기 어디란다.

to me, you are perfect

주말이 아니라 딱히 볼거리는 없었지만 포토벨로 마켓도 쓱 한번 둘러보고. 이제 오늘의 마지막 행선지로 향한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횡단보도 Abbey Road. 평범한 동네에 지극히 평범한 횡단보도지만, 비틀즈가 앨범 재킷 사진을 찍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가볼 이유가 충분한 곳. "It all started here"라는 간단한 한 문장으로 모든 것이 설명되는 곳. 생각보다 차가 많이 다니는 도로라 비틀즈처럼 인증샷을 찍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횡단보도

애비 로드 스튜디오 앞 벽에는 비틀즈를 그리워하는 전 세계 팬들의 메시지와 세게 평화를 염원하는 글귀들이 쓰여있다.

집에 돌아오는 길, 마침 퇴근시간과 겹쳐 어마어마한 교통체증을 겪어야 했다. 나의 여행지가 누군가에겐 생활을 터전임을 다시 한번 실감한 순간. 어느덧 우리 동네 마냥 익숙해진 숙소 근처 슈퍼마켓에서 소박하게 맥주 한 캔을 사 가지고 들어갔다.

런던 와서는 거의 저녁 해 먹으려고 하루하루를 보내는 듯하다. 남은 삼겹살을 고추장 양념에 잠깐 재워놓고, 남은 샐러드용 야채를 넣고 볶았더니, 조금 어설프지만 맛은 그럴듯한 한식 한상이 완성됐다. 너무 맛있어서 혼자 밥도 볶아 먹고, 맥주도 쭉쭉 들이켰다.

맛있어서 눈물 좔좔

열심히 시내 곳곳을 여행하다 숙소에 들어와 맛있는 저녁을 해 먹으며 마무리하는 생활 패턴에 어느덧 제법 익숙해졌다. 아침부터 밤까지 온전히 하루를 런던에서 보낼 수 있는 기회는 내일이 마지막이다. 그저 비가 오지 않기만을 바랄 뿐.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