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23. 영국 런던 쇼디치 - 브릭레인 - 코벤트가든 - 야경
숙소를 나서자마자 코 끝에 제법 찬 공기가 와 닿는다. 다시 들어가 가디건을 하나 더 챙겨 나왔다. 그럼에도 발걸음이 가벼웠던 건 오늘은 절대 비가 안 올 것 같은, 청명한 하늘이었기 때문이다.
지나가는 길에 본 브리티쉬 라이브러리. 열람실 구경이나 한번 해볼까 했는데 아직 오픈 전이라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들이 아침 일찍부터 줄 서 있다. 다 공부하러 온 사람들인 건가. 대단한 열정이다.
지하철 타러 킹스크로스 역에 갔는데 또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 이게 그 유명한 9와 3/4 플랫폼이구나. 90년 대생들의 어린 시절 필독서 '해리포터' 조차 일찌감치 포기한 문학포비아라 사실 별 감흥은 없었다. 남녀노소 모두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으로, 똑같은 포즈로 사진을 찍는다. 심지어 목도리가 휘날리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잡아주는 사람도 있다. 콘텐츠의 힘은 대단하다.
출근길 지하철역에 갑자기 분위기 보헤미안 랩소디. 이렇게 예상치 못한 곳에서 위트를 발견했을 때 한 번씩 웃게 된다. 한 번은 그런 적도 있었다. 어느 역 플랫폼에 안내 직원이 있었는데, 확성기에 대고 쉬지 않고 랩으로 안내를 하는 거다. 이를 테면 '몇 호선 왔어요', '준비하세요', '열차와 승강장 틈 사이 조심하시고요' 같은 뻔한 말을 랩으로 세상 유쾌하게 하는 거다. 지하철을 타야 되는데, 나도 모르게 웃으면서 비트를 탔다.
쇼디치에 왔다. 런던에서 가장 허름하고 가난했던 동네에 예술가들이 모여들어 가장 힙한 동네가 된 곳. 힙스터들의 성지답게 화려한 그라피티가 눈에 띄었다. 심지어 그림을 다 너무 잘 그려서 골목골목마다 사진으로 담기 바빴다.
쇼디치의 첫 목적지는 에이스호텔. 포틀랜드와 시애틀 여행 이후 에이스호텔의 매력에 푹 빠져, 다른 지점들도 한 번씩 방문해 보는 걸 혼자만의 목표로 삼고 있다. 비싸서 숙박은 못해보지만, 로비는 누구에게나 열려있으니까.
포틀랜드나 시애틀 같은 로컬 느낌이나 빈티지한 느낌은 없지만, 쇼디치 나름의 느낌을 살린 모던한 버전의 에이스호텔이다. 오래 앉아있기 좋은 테이블과 편한 의자, 포토부스, 자전거, 식물. 넓은 거실 같은 에이스 로비에 어떤 오브제들이 있어야 하는지 이제 대략 느낌을 좀 알 것 같다. 그런데 여기가 호텔 로비인지, 위워크인지, 독서실인지 헷갈릴 정도다. 아침부터 이렇게 다들 열일할 인인가. 플랫화이트 한 잔 시켜놓고, 괜한 민망함에 읽지도 않을 파이낸셜타임스만 만지작거렸다.
이 일대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물, 검은색 컨테이너 모양의 쇼핑몰 '박스파크'다. 건대 커먼그라운드가 이곳을 벤치마킹했다던데 확실히 느낌은 비슷하다. 주로 1층에는 샵, 2층에는 음식점들이 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텅텅 비어있을까. 문 연 가게도 별로 없고, 손님도 거의 없다. 우리나라 지방에 있는 시장 청년몰 같다. 트렌드에서 살짝 뒤처진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한 가지 수확은 있었다. 기념품이나 장난감 같은 걸 파는 작은 가게에서 데이비드 슈리글리 뱃지를 찾아냈다. 슈리글리만의 솔직함과 위트를 좋아하지만, 그의 작품을 담은 굿즈는 늘 조금 비싸다고 생각해서. 런던에 오면 조금 더 싼 가격에 잘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음, 큰 차이는 없었다고 한다.
쇼핑몰보다는 그냥 골목 구경하는 게 더 재미있다. 각양각색의 그라피티를 보며 내가 사랑하는 힙한 도시들 베를린, 멜버른, 포틀랜드 생각이 많이 났다. 쇼디치가 그 도시들에 비해 별로라는 건 절대 아닌데. 베를린에서 느꼈던 '이건 찐이다' 같은 바이브가 느껴지지 않았다. 런던을 걸으며 베를린 가고 싶다고 생각하다니.
걷다가 예뻐 보이거나, 뭐하는 곳인지 궁금한 가게들은 한 번씩 다 들어가 봤다. 그중 가장 오랜 시간 머물렀던 가게 'Labour and Wait'. 식기와 주방용품을 파는 곳인데 그런 것 치고는 이름이 시크한 편이다. 온갖 예쁜 아이템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지만 내가 한국에서부터 그토록 찾아 헤맸던 크로우캐년 제품이 있어 어찌나 반갑던지.
문제는 빨간 컵, 파란 컵 다 있는데 하필! 내가 사고 싶은 까만 무늬 컵이 없었다. 까만 무늬가 아니면 성에 차지 않을 것 같았다. 주인에게 까만색은 없냐고 물어보니 걸어서 한 10분 거리에 무슨 샵에 가면 거기엔 있을 거라고 친절하게 알려줬다. 그냥 없다, 다른 색 사라고 할 수도 있는 건데 선뜻 다른 가게를 알려줘서 감동했다. 그러나 그 가게까지 찾아갖건만 거기에도 없었다는 슬픈 결말. 빈 손으로 샵 구경만 실컷 했다.
걷다 보니 어느덧 브릭레인 초입. 간단하게 간식거리를 사려고 전통 깊은 빵집 Beigel Bake에 들어갔다. 쉴 새 없이 빵을 찍어내는 빵 공장 같았다. 1파운드 정도씩 하는 베이글과 찰라롤을 사서, 그 자리에서 갓 나온 뜨끈한 찰라롤 하나를 먹었는데 세상에. 이건 '밀가루 반죽이 낼 수 있는 궁극의 빵 맛이다' 싶을 정도로 맛있었다. 담백하고 쫄깃한 딱 내 스타일의 빵.
브릭레인을 쭉 따라 걷는데 양쪽으로 화려한 그라피티가 끊임없이 펼쳐져 있어 눈이 즐거웠다. 오히려 아침에 봤던 쇼디치-해크니쪽 보다 더 힙하다. 그쪽이 계획적으로 예쁘게 그린 그림 같다면, 이쪽은 예술가들이 자기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몰래 표현하고 도망간 낙서장 같다.
그중에서도 딱 보고 쉽게 지나칠 수 없었던 메시지. 광고 캠페인조차도 이 거리에 맞춰 현지화(?)됐다.
브릭레인 마켓이 열리는 일요일은 아니었는데 나름 볼거리는 있었다. 서점과 편집샵, 빈티지 마켓을 구경했다. 아쉽게도 마음에 드는 물건은 못 찾았지만 빈티지 좋아하는 사람에게 브릭레인은 천국이겠다 싶었다.
사진으로 보면 날이 참 좋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너무 추워서 더 이상 걸어 다닐 자신이 없었다. 어디 좀 들어가서 몸 좀 녹이고 와야겠다.
런던에서 한 번쯤은 고급스러운 스테이크를 먹어보고 싶었는데, 원피스 입고 나온 오늘이 마침 날이다 싶었다. 근처에 나름 평이 괜찮은 'Hawksmoor Spitalfields'라는 레스토랑에서 애피타이저와 메인 2코스를 주문했다. 소름 끼칠 정도로 맛있지는 않았는데 계산서를 받고 소름이 끼쳤다. 맥주 마시느라 입에도 안 댄 물 값만 6천 원 정도 하는 거다. 이런 식당에서 물값 따로 받는 건 매번 알면서도 막상 '물 줄까?'라고 물어보면 습관적으로 '네' 하게 된다. 바보야..
사실 물 값보다도 걱정되는 게 있었으니. 한 달 내내 넉넉하게 쓰려고 사온 유심칩 데이터 10기가가 벌써 다 떨어져 간다. 역시 현대인은 데이터의 노예다. 데이터 없어서 구글맵 못 쓰고 SNS 못 하는 건 상상만 해도 무서우니, 데이터 거지가 되기 전에 서둘러 대책을 찾아야 한다. 아쉽지만 쇼디치와는 작별인사를 하고, 번화가 쪽으로 다시 나가본다.
가까운 보다폰 매장을 찾아 새 유심칩을 구매해 데이터를 채워 넣고 나니, 마음의 여유를 찾고 든든해진 기분. 이제 여행은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는데, 조건 맞추다 보니 30일짜리 플랜을 사버렸다. 그만큼 더 여행하고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익숙한 길이 보인다. 떠나기 전에 런던에서 가장 런던다운 곳을 마지막으로 한번 더 보고 가라는 계시인가.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다시 보는 트라팔가 광장. 역시 멋있다. 새삼 한 도시에 있어서 광장이라는 터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가 와 닿았다. 이렇게나 다양한 사람들을 한 데 모아준다. 결코 그냥 텅 빈 공터가 아니다.
여기까지 온 김에 The National Gallery를 볼까 말까 한참을 고민하다 들어가서 기념품 샵만 슬쩍 보고 나왔다. 오전에 쇼디치의 자유분방함을 한껏 느끼고 온 터라, 잘 가꿔진 예술보다는 러프한 날 것의 예술이 더 보고 싶어 졌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게 더 재미있다.
추운 날씨 탓인지, 해가 지기도 전에 벌써 몸이 녹초가 됐다. 빨리 숙소에 들어가서 잠깐이라도 쉬고 싶었다. 운 좋게 2층 버스 맨 앞자리를 차지해, 가는 길에도 시내 구경은 실컷 했다.
저녁은 간단하게 기본템 조합으로 해치운다. 한국에서 가져온 김치찌개 팩과 김이 제 몫을 할 시간이다. 밥 반 공기는 찌개와 먹고, 반 공기는 볶아 먹었다. 아주 야무지게 잘 먹는다.
저녁을 조금 서둘러 준비했던 이유.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야경은 한번 봐야지 않겠나 싶어서. 오늘이 마지막 밤이기에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숙소에 들어왔다가 다시 나간다는 게 세상 귀찮았지만, 그래도 후회하기는 싫어서 우선 나갔다.
템즈 강변, 그리고 타워브릿지. 타워브릿지의 웅장함과 귀여움에 대해서는 이미 한 차례 주접을 떤 바 있다. 멋있는 건물에 멋있는 조명 쏘니 멋있는 건 당연한데. 솔직히 그 이상의 감흥은 없었다. 내 마음이 삐뚤어져서 그런가.
굳이 지하철을 또 타고 찾아간 런던 아이. 딱 상상했던 그림 그대로였다. 마찬가지로 큰 감흥은 없었다는 뜻. 요즘 런던아이를 머리 위 왕관처럼 배경으로 해서 사진을 찍는 인증샷이 유행이라는 것 같던데. 혼자 찍어보려다 각도가 어려워서 머쓱. 그냥 집에나 가자 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야경 보러 갔다가 허무함만 잔뜩 안고 돌아온 기분.
역시 편한 나의 홈 스윗 홈..이 아니라 숙소 스윗 숙소. 나흘이나마 온전한 나만의 공간이었던 이 곳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다. 남은 와인에 치즈, 포도를 곁들여 홀로 조촐한 뒤풀이를 해본다. 조용한 혼자만의 시간에 익숙해져 내일부터 다시 처음 보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부대끼며 지낼 수 있을까. 에든버러는 가고 싶지만 이 숙소는 죽기보다 떠나기 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