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25. 영국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에든버러의 아침은 차가웠다. 춥다는 말보다는 차갑다는 표현이 맞다. 있는 옷을 다 껴입어봐도 찬 공기가 쑥쑥 들어와 살을 푹푹 쑤시는 게 아파올 지경이었다. 이 순간만큼은 도시 풍경도 날씨와 다를 바 없었다. 황량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아침을 먹으러 엘리펀트 하우스 카페를 찾아왔다. J K 롤링이 매일 방문해 <해리포터>를 집필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심심치 않게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고, 곳곳에 해리포터를 사랑하는 팬들의 낙서도 빼곡하다. 비록 나는 어린 시절 해리포터를 읽다 포기했지만, 누군가에게는 오래 꿈꿔온 '성지' 같은 장소에 와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저 멀리 창문 너머로 진짜 에든버러 성이 보인다. 금방이라도 판타지 소설 한 권 뚝딱 나올 것 같은 비주얼이다. 당시 J K 롤링의 눈에는 이 창문 너머로 무궁무진한 일들이 펼쳐져 보였겠지.
일찍 왔는데도 사람이 많아, 아쉽게 창문 뷰 자리는 잡지 못했지만. 빅토리아 케이크 한 조각과 커피를 주문해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해본다. 맛은 할많하않.
다시 찾은 로얄마일. 이 길의 끝에는 바다가 있었구나. 어제 같은 길을 일곱 번이나 왔다 갔다 했지만 비와 먹구름에 시야가 가려 알 길이 없었다. 오션뷰라면, 사람들이 왜 18파운드를 내고 에든버러 성에 올라가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얼마나 전통을 중시하는지 새삼 느꼈다. 체크무늬, 캐시미어, 위스키 등 스코틀랜드 하면 떠오르는 물건들을 보고, 사고, 직접 체험해볼 수 있는 곳들이 널려있다. 물론 대부분 관광객을 노린 가게들일 테지만, 그게 상술이라기보다는 문화 체험의 의미로 다가왔다.
오후 세시 반에 다시 런던으로 돌아가는 기차를 타야 했기에 어디 멀리 가기에는 시간이 애매했다. 대책 없이 구시가지에서 신시가지로 넘어가는 다리를 건넜고, 아는 길이 나오길래 어제 갔던 칼튼 힐을 다시 찾았다. 사진 찍느라 혼자 느긋하게 풍경을 감상하지 못했으니, 다시 가볼 이유는 충분하다.
어제의 풍경에서는 하늘이 주인공이었다면, 오늘은 어제의 배경에 불과했던 에든버러 마을이 한눈에 또렷이 보인다. 건물들이 모두 비슷한 양식에 일관된 색의 조화를 이루고 있어 이렇게 위에서 내려다 보아도 예쁘다. 무엇보다도 이 계절 가을과 참 잘 어울린다.
시선을 조금만 돌려보면 자연이 보인다. 하늘과 바다의 경계에 은은한 파란색 띠가 층층이 지는 모양이 신기해서 한참을 바라봤다. 쳐다보고만 있어도 시력이 좋아지는 것만 같다.
그리고 저기 보이는 언덕은 아마도 아서 시트. 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는데 어제 만난 동행이 후기를 들려준 덕에 알게 됐다. 칼튼힐보다 더 높은 언덕이라는데 저기서 보는 경치가 또 죽여준다더라. 제대로 하이킹 준비를 하고 가지 않으면 다칠 수도 있다고 해서 이번 여행에서는 아무래도 무리겠다.
언덕 위에서 거센 바닷바람을 오래 맞다 보니 거의 해조류처럼 흐물흐물해져 정신마저 쏙 빠질 지경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오래오래 감상하고 싶었지만 추워서 생각보다 금방 내려와야 했다.
신시가지에서 구시가지 쪽을 바라보면 내가 에든버러에 와있다는 사실이 새삼 더 실감 난다. 조금 유치하지만 에든버러에 가보고 싶다고 처음 생각한 건 순전히 이름 때문이었다. 멋있는 이름에 약한 타입이라. 별 이유 없고 그냥 주관적인 기준으로, 내가 꼽는 멋있는 도시 이름 TOP3에 항상 들어왔다. Edinburgh, 그냥 멋있지 않나.
그리고 실제로 와서 본 에든버러는 이름덕후의 환상을 깨지 않는, 이름값 하는 도시라 다행이었다. 클래식한 멋이 곳곳에 흘러넘쳤고, 그렇게 이어져 내려온 것들에 대한 자부심이 강해 보였다. 에든버러가 사람이라면 뭔가 교양과 기품이 넘쳐흐르는, 베스트셀러 작가 출신의, 잘생긴 중년의 신사일 것만 같다는 쓸데없는 망상을 해본다.
오늘 점심 먹을 곳은 미리 정해뒀다. 괜찮아 보여서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인데 어제저녁 동행 중 한 명이 '거기 제 친구가 가봤다는데 별로라는데여~', '블로그 찾아봤는데 맛없다는대여~'를 시전 해서 포기하고 오늘 혼자 왔다. Mussel Inn, 별로인지 아닌지는 내가 직접 먹어보고 판단한다.
여러 가지 소스 중에서 샬롯, 마늘, 화이트 와인, 크림이 들어간 소스를 골랐고, 해산물과 잘 어울린다는 스파클링 와인 프로세코를 곁들였다. 그리고 맛있어서 눈물을 좔좔 흘렸다. 상큼한 크림소스가 신의 한 수였다. 홍합을 이렇게 비리지 않고 깔끔하게 먹을 수도 있다는 건 문화충격에 가까웠다. 크림소스에 프로세코 시킬 생각한 나, 천재야?
밥 먹고 나오니 파란 하늘이 펼쳐졌다. 칼튼힐 올라갔을 때 이런 하늘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변덕스러운 에든버러 날씨가 조금 얄밉긴 했지만 이 뷰도 꽤 멋지다. 잠깐 공원에 앉아 버스킹도 즐기고, 자유롭게 몸을 푸는 댄서들의 몸짓(?)도 구경했다.
이 도시를 떠나기까지 두 시간 정도밖에 안 남았는데 뭘 더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밥을 먹고 산책도 했으니 뭔가 입가심할 거리가 필요했다. 유명한 예쁜 찻집이 있다고 해서 찾아가 봤는데 하필 휴무. 그냥 아무 프랜차이즈 카페에 들어가기엔 살짝 아쉬웠다.
그렇다면 어디로 가야 할지, 사실 나는 답을 알고 있었다. 주말이라 그런지 대낮에도 펍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중요한 축구경기가 있었던 모양이다. 모두가 스크린을 보며 환호하며 맥주를 들이켜고 있다. 그중 비교적 조용하고(?) 자리 여유가 있어 보이는 펍에 들어가 바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여기서 제일 맛있는 다크 비어를 달라고 하니 추천해준 Scottish Black Stout. 달콤한 캐러멜 향에 씁쓸한 곡물의 맛, 제대로 으른의 맛이다. 색도 그렇고 맛도 그렇고, 아주 진한 커피를 마시는 듯 천천히 음미했다. 카페 가서 커피 마시듯, 혼자서도 언제든 지나가다 맛 좋은 맥주 한 잔 하고 쿨하게 떠날 수 있는 이곳의 펍 문화, 참 좋다. 국내 도입이 시급합니다..
이제 숙소에 맡겨둔 짐을 찾아 웨이벌리 기차역으로 향한다. 다시금 떠오르는 어제 언덕의 악몽. 갈 땐 내리막길이라 그나마 캐리어를 끌고 가기에 괜찮았다. 간단하게 커피와 샌드위치를 사 가지고 기차에 몸을 실었다.
사실 영국은 딱 런던이랑 에든버러만 생각하고 왔는데, 여기까지 오니 다른 도시들을 일정에 넣지 않은 게 좀 후회됐다. 글래스고, 뉴캐슬, 리버풀. 훗날 영국에 또 와볼 기회가 있겠지. 창 밖을 보며 막연히 그 도시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상상해본다.
그러고 피곤했는지 가방을 꼭 껴안고 기절한 것처럼 푹 잤다. 도착하기까지 한 시간이 채 안 남았을 즈음, 간식 카트가 오는 소리에 눈을 떴다. 맞은편에 앉은 아저씨를 따라 맥주 한 캔을 주문해 마시고 나니 깜깜한 밤, 다시 런던에 왔다.
킹스크로스역 바로 앞에 있는 호스텔에 도착해 씻고 누웠다. 2층 침대를 썼는데 내 아래에는 나이가 꽤 들어 보이는 할머니가 계셨다. 나이 드신 분이 무슨 사정으로 유스호스텔 도미토리에 오셨나 궁금했는데, 그녀의 침대 머리맡에는 런던 미술관 카탈로그가 잔뜩 있었다. 어쩐지 조용히 그녀의 밤을 배려해줘야 할 것 같았다. 젊은 나는 밖에서 좀 더 놀다 올까 싶어, 저녁 동행을 구하는 글들을 찾아보다 피곤했는지 그냥 잠들었다. 런던에서의 진짜 마지막 밤도 그냥 이렇게 흘러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