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27. 파리 마레 - 몽마르뜨 - 바토무슈
가보고 싶은 곳들 많이 찾아두고, 매일매일 알차게 다녔던 지금까지의 여행과는 조금 다르다. 전에도 언급한 적 있지만 나는 유독 파리랑 안 맞는다 생각했고, 자세히 알아보려 하지도 않았고, 그래서 별 기대도 없었다. 30일의 긴 여행의 마지막 도시여서 더 그럴 수도 있다. 그냥 별생각 없이 잠깐 머물다 한국에 돌아가겠거니 하고 마음을 놓았다. 길게 주절주절 썼지만 그냥 아무 계획이 없었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거다.
파리에서 거의 유일하게 한번 가보고 싶었던 카페. 지도 보고 찾아갔다가 도착해서야 여기가 그 유명한 마레지구라는 걸 나중에 알았다.
한때 우리나라에서도 유행했던 '쌍욕라떼'처럼 카푸치노 위에 글씨를 써주는데, 그렇게 스윗할 수가 없다. 뭐라고 써줄까 두근두근 떨렸는데 잔을 받아 들고 실소가 터져 나왔다. 바리스타 오빠도, 나도 아직 잠이 덜 깼나 보다.
카페인 충전 후에 비로소 보이는 파리의 길거리 풍경. 공유형 전동 킥보드라는 걸 파리에서 처음 보고 문화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자전거에 비해 부피도 적게 차지하고, 애매한 거리를 이동하기에 편리할 것 같아 우리나라에도 도입됐으면 좋겠다 생각했는데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지.)
계획은 없어도 구글맵은 있다. 마침 근처에 퐁피두 센터가 있길래 오전에 관람하면 딱이겠다 싶었다. 건물 철골과 파이프가 그대로 드러나있는 건물은 멀리서부터 존재감이 확실했다. 전시 작품보다 건물 자체가 더 예술 같았다.
갤러리에 입장하려면 우선 건물 외벽에 있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쭉 올라가야 한다. 파리 시내에 고층건물이 없어서 이 정도 높이만 올라와도 도시를 한눈에 볼 수 있다. 그 와중에 우뚝 솟아있는 랜드마크 에펠탑. 오늘 날씨만 좀 더 맑았다면 딱 좋았겠지만.
처음에는 패기롭게 작품 하나하나 열심히 보고 이해하려 노력했지만, 인간적으로 미술관 너무 크고, 작품은 끝도 없이 계속 나오고, 사람도 많아서 중간부터는 지쳐버렸다. 미술에 조예가 깊은 편이 아니라는 게 또 이렇게 들통나 버렸네. 한 세 시간 지나니까 다리 아프고 배고파서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후딱후딱 보고 나와버렸다.
미식의 도시에 왔으니 제대로 갖춰진 쓰리 코스 점심을 먹고 싶었는데, 퐁피두에서 시간을 오래 보낸 탓에 벌써 런치타임이 끝날 무렵이 다 되었다. 우선 간단히 요기라도 하자 싶어 찾아간 갈레뜨 전문점. 끼니 될 만한 걸 먹고 싶어 다진 고기, 계란, 치즈, 토마토소스가 들어간 메뉴를 주문했는데 약간 비위 상하는 냄새가 났다. 손님을 묘-하게 무시하는 듯한 점원의 서비스도 별로였고.
약속 시간이 거의 다 되어 지하철을 탔다. 어젯밤 에펠탑에서 만난 언니들이 너 몽마르뜨 혼자 가면 위험하다고 내일 우리랑 같이 가자고 해서 바로 콜! 해버렸다. 파리에 대한 아무런 계획도, 별 생각도 없었으니까 오히려 잘됐다 싶었다.
참 신기하다. 그동안 동행들과 잠깐 밥 먹거나, 술 먹거나, 야경 정도 본 적은 있어도, 이렇게 같이 붙어서 돌아다닌 적은 절대 없었고, 있어도 어떻게든 피해왔는데 말이다. 혼자가 편한 파워 낯가림러, 여행 27일 차에 이뤄낸 장족의 발전이다.
언니들이 조금 늦는다고 해서 근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구경했다. 세상 감각적인 그라피티에 감탄하기도 하고, 갈레뜨의 악몽을 잊기 위해 길거리 노점에서 크레페도 사 먹고, 혼자 놀다 보니 시간이 잘 갔다.
반나절만에 다시 만난 언니들, 낯선 도시에서 아는 얼굴을 만나니 엄청 반가웠다. 혼자 왔으면 그냥 쓱 한번 보고 바로 갔을 '사랑해 벽' 앞에서 사진도 찍(히)고, 셀카도 남기고.
수많은 계단과 언덕을 걸어 올라온 사크레 쾨르 성당. 성당의 웅장함에 감탄하는 것도 잠시, 북적이는 관광객들 사이에 있으니 정신이 하나도 없더라. 괜히 가방을 꼭 껴안게 된다. 과연 '소매치기의 성지(?)' 답다.
여기서 내려다 뷰에 대한 기대가 컸는데 흐린 날씨 때문인지 도시 풍경이 좀 밋밋해 보여 아쉬웠다. 대신 매일 이곳에서 축구공 묘기를 부린다는 아저씨에 자꾸 시선이 갔다. 지켜보는 내내 내가 다 조마조마했는데 건강하셨으면 좋겠다..
몽마르뜨에서 내려오는 길에 구경한 '예술의 거리'. 사방팔방에 그림 작품이 걸려 있고, 또 그렇지 않은 곳은 풍경 자체가 그림 한 폭이 된다. 만약 이런 곳이 내 일상의 공간이라면, 나도 예술가가 될 수 있을까.
야속하게도 몽마르뜨에서 내려오니 서서히 구름이 개고 파란 하늘이 보이기 시작한다. 지금 몽마르뜨 언덕에 다시 올라가면 아까보다 백 배는 더 예쁜 뷰를 볼 수 있었겠지만. 가야 할 곳이 있어 발걸음을 서둘렀다.
가는 길에 '어 여기..!' 하고 잠깐 발걸음을 멈춰 선 곳. 그냥 평범한 골목길 농구 코트인데 색 조합이 너무 예뻐서 한 번쯤 가봐야지 하고 찾아뒀던 곳. 지도 안 보고 걷다가 우연히 구글맵에 별표 찍어둔 곳을 찾았을 때의 쾌감이란. 소심한 나는 철조망 밖에서 쳐다보고만 있었는데, 용감한 언니들 덕에 잠깐 안에 들어가 보기도 했다. 안에서 보니 더 예뻐서 나도 슛 한번 때리고 싶더라.
그렇게 열심히 찾아간 목적지는 바로 요즘 파리에서 핫하다는 레스토랑 'Pink Mama'. 같이 온 언니가 여기는 무조건 가서 4층에 자리 잡고, 트러플 파스타를 먹어야 한다고 강력 추천해서 오픈 전부터 줄을 서서 기다렸다.
핑크마마에 입장하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파이팅 넘치는 직원들이 하이파이브로 손님들을 맞아주며, 한 팀씩 데리고 계단을 올라가는데 계단 통로도 너무 예쁘고, 그 분위기도 신나서 무슨 놀이공원 온 것 마냥 들떴다. 다행히 우리를 4층으로 데려다줬다. 이곳에 발을 들이는 순간 누구든 감탄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진짜 예쁘다.
셋이서 트러플 파스타 두 접시, 바질 페스토 파스타, 부라타 치즈, 맥주, 그리고 디저트로 초콜릿을 끼얹은 에스프레소에 티라미수까지 야무지게 먹었다. 특히 저 트러플 파스타는 태어나서 먹어본 파스타 중 손에 꼽을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혼자 먹었으면 '음 맛있다' 하고 끝났을 텐데, 다른 사람들이랑 먹으니까 맛있다고 같이 호들갑 떨어서 그런지 더 맛있었던 걸로 기억에 남는다.
저녁 먹고 언니들은 바토무슈를 타러 간단다. 나도 파리에 있는 동안 언젠가 한 번은 타겠지 하고 미리 예매해온 터라, 망설임 없이 함께 가기로 했다. 사실 이렇게까지 오래 같이 다닐 줄은 몰랐는데, 나도 내심 언니들과 함께하니 더 마음 편하고 재미있었나 보다. 우연히 만난 좋은 사람들에게 오늘 나의 하루를 다 맡겨보자는 마음으로, 하자는 대로 다 했다. 어디 가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고, 어떻게 가야 하지 길을 찾지 않아도 되는, 누군가를 믿고 따라만 가면 되는 이런 여행. 아마도 내 인생에선 중학교 수학여행 이후 처음이었을 거다.
아직 안 가본 데가 더 많은 2일 차 초보 파리 여행자라서, 사진으로만 봤던 파리의 주요 랜드마크가 나올 때마다 열심히 사진도 찍고, n개 국어로 무한 반복 재생되던 오디오 설명에도 귀를 기울였다. 오랜만에 아주 제대로 '관광객'이 되어본 순간. 허나 그 열정이 오래 가진 못했다. 인간적으로 너무 춥잖아.
그래도 막판에 에펠탑이 바로 내 눈 앞에서 빛나고 있는 모습은 포기할 수 없더라. 에펠탑을 보니 어쩐지 오늘 하루가 이 바토무슈로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직감이 왔다.
근처 마트에서 와인, 맥주, 간단한 스낵을 사서 오늘도 에펠탑 앞에 자리 잡았다. 화이트에펠까지 보자길래 새벽 1시면 지하철도 끊기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 위험할 것 같다고 했는데. 언니들이 그사이에 또 구해온 새로운 동행 친구들이 마침 나와 같은 호스텔에 묵는다고.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때만큼은 누가 뭐래도 우리만의 세상이었던 것 같았던 파리. 함께 있으니 무서울 게 없었고, 반짝이는 에펠탑 불빛을 담은 와인은 세상 달콤했다.
웃고 떠들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만 새벽 1시까지 버티기에 밤은 너무나도 길었다. 추위에 맞서 싸워야 하기도 했지만 사실 그보다도 참기 힘든 건 화장실이었다. 공원에 화장실도 없고, 근처에 자정 넘어 문 연 가게도 없어서, 결국 거의 20분을 걸어 24시간 여는 맥도날드까지 같이 갔다 왔다. 근데 그 고통스러운(?) 시간마저도 추억으로 남았다.
먼 길을 다녀오니 금방 1시가 거의 다 되었고, 우리는 함께 서서 에펠탑을 바라보며 카운트다운으로 화이트에펠을 맞이했다. 솔직히 화이트에펠은 기대했던 것보다는 좀 시시한 불빛쇼에 불과했지만, 함께 오랜 시간 기다리고 버텨낸 끝에 무언가를 이뤘다는 뿌듯함에 더 벅찼다.
같은 호스텔에 묵는 친구들과 숙소까지 거의 30분을 걸어갔다. 아무도 없는 파리의 밤거리를 걷는 경험을 다 해본다. 혼자였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들이 오늘 하루 사이에 너무나도 많이 일어났다. 또 혼자였으면 절대 보지 못했을 새로운 세계들을 많이 맛봤다. 뭘 해야 할지, 어딜 가야 할지 모르겠는 파리 같은 도시에서는 다른 이들에게 내 여행을 맡겨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하다 잠이 들었다. 내일 나의 여행은 또 어떻게 흘러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