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28. 파리 마레 - 시테섬 - 뤽상부르 - 샤요궁
어제 낯선 이들과 뜻밖의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고, 오늘도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갖고 메시지를 보내봤다. 그저께 밤에 만났던 또 다른 동행에게. 진심 반, 빈말 반으로 파리에 있는 동안 같이 밥 한번 먹자고 한 걸 똑똑히 기억한다. "저 그저께 에펠탑에서 만난, 혼자 여행 온 사람인데요. 오늘 아침 저랑 같이 쌀국수 드실래요?"
한국 여행객들에게 파리 최고 맛집 중 하나로 꼽힌다는 '송흥'. 왜 여기까지 와서 베트남 쌀국수를 먹나 싶긴 한데 하여튼 맛있단다. 포와 보분, 둘 중에 우열을 가릴 수 없기에 웬만하면 둘이 가서 둘 다 시켜 먹어봐야 한다고 해서 둘이 왔다. 개인적으로 그 정도의 must-try 맛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유럽 음식이 슬슬 질릴 때쯤 반가운 맛인 건 확실하다.
우리에게 송흥을 영업했던 언니들의 카페 픽 'Boot Cafe'도 바로 가봤다. SNS 인물 사진이나 잡지 화보의 배경으로 이미 수십 번은 본 듯한 이 파란 외관. 카페 간판 대신, 구두 수선소를 뜻하는 'Cordonnerie' 간판이 여전히 걸려있다.
의외로 내부 인테리어는 약간 을지로 스타일, 일본계 바리스타 분은 약간 시부야 스타일, 여기 커피 원두는 로스티드 인 베를린, 근데 여기는 파리다. 그만큼 다채로웠던 공간, 커피 맛도 훌륭했고.
오늘을 함께하고 있는 그녀는 예전에 이미 파리를 여행해본 경험이 있고, 이번에는 아무 계획 없이 즉흥적으로 혼자 오게 됐다고 한다. 파리가 처음이지만 사실 별 관심 없다는 시니컬한 나를 위해 일일 가이드를 자처해줬다. 마레 지구에 있는 편집샵, 기프트샵, 서점 등을 구경했다. 이봉랑베르 토트백에 혹하긴 했으나 아무리 예뻐도 에코백 하나에 3~40유로씩 하는 건 좀.
조금만 더 걸어가면 시테 섬이란다. 파리 여행 예습을 진짜 안 한 티가 났다. 나는 시테 섬이 뭐냐고 물었고, 노트르담 대성당 있는 곳이라고 하니 비로소 이해가 됐다. 어제 바토무슈 타고 지나갔던, 다리 너머 그곳이겠구나.
시테 섬을 가는 길목에서 막연히 '파리'하면 떠올랐던 풍경, 딱 내 관념 속의 파리다운 모습을 봤다. 적당히 세월이 묻어나고, 질투 날 정도로 느긋하고 여유로워 보인다.
드디어 노트르담 대성당, 듣던 대로 웅장하다. 동행이 꼭대기 전망대에 올라가 볼 것을 추천했는데 이미 당일 입장권 매진이란다. 개인적으로 성당이나 전망대를 꼭 찾아다니는 편은 아니라 사실 크게 아쉽지 않았다. (하지만 돌아와서 화재 사건을 접하고 그때 조금만 서두를 걸.. 하고 후회했다.)
사진 찍어주던 동행이 갑자기 바닥을 보라고 해서 보니 마침 발 밑에 이런 게 있었다. 제로 포인트를 밟으면 파리로 다시 돌아온다는 전설이 있단다. 하필 파리에 이런 게 있다. 과연 내 인생에 두 번째 파리, 세 번째 파리가 또 있을까.
잠시 각자 시간을 보내고 여기서 다시 만나기로. 저녁에는 같이 재즈바에 가보자 약속하고 헤어졌다. 그 유명한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서점을 혼자서 구경하고.
헤밍웨이의 단골집으로 알려진 곳이자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의 배경이 된 레스토랑도 찾아가 봤다. 가볍게 늦은 점심을 먹을까 했는데 브레이크 타임이라 패스.
그리고 소르본 대학교. 프랑스 명문대 캠퍼스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는데 관광객 출입은 안되나 보다. 입구에서 일일이 학생증 검사를 하길래 밖에서만 맴돌며 슬쩍슬쩍.
떠돌이 관광객에게도 허락된 곳을 찾아 뤽상부르 공원으로. 어제 같이 놀았던 언니들과 친구들이 오늘 오후쯤 여기서 다시 만난다고 얼핏 말했던 것 같은데. 혹시 몰라 두리번두리번 열심히 찾아봤지만, 우연히 아는 사람과 마주치기에는 너무나도 넓은 공원이었다.
대신 느긋하게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다. 도란도란 아이들과 놀러 나온 가족들도 있고, 혼자 자리 잡고 책을 보는 사람들도 있다. 온전히 자신들만의 시간에 집중하는 이곳의 평화로운 분위기가 좋았다.
숙소 옮기는 날이라 체크인하러 들어갔다. Fiap Jean Monnet는 그동안 묵어본 호스텔 중 단연 역대급. 오픈한 지 얼마 안돼 시설도 깔끔하고, 직원들도 친절하고, 심지어 출입구에 항상 가드가 지키고 있고 짐 검사를 할 정도로 철저하다. 혹시 4인 도미토리 방에 아래층 침대를 찜할 수 있냐고 물어봤는데, 대뜸 'you are lucky' 하면서 2인실로 업그레이드해준단다. 예? 왜요? 이러시면 정말 감사하잖아요..
숙소가 있는 파리 14구 일대의 동네 분위기도 마음에 들었다. 화려하진 않지만 조용하고 편안한 분위기라 잠깐이나마 이곳 로컬이 된 듯한 느낌을 받기도 했다. 특히 여러 번 오가면서 정들었던 Glacière역 가는 길.
저녁에 다시 만나기로 한 동행에게 조금 일찍 연락이 왔다. "5시쯤 샤요궁 같이 가실래요?" 샤요궁이 뭔지도 몰랐던 파리 바보는 검색해본 후에야 다들 에펠탑 인증샷 하나씩은 찍는다는 그곳임을 알게 됐다. 가지 않을 이유가 없어 바로 출발했고, 입구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에펠탑 앞에 회전목마가 있다니, 놀이공원도 아니고. 너무 어이없게 예쁜 풍경.
역시 사람들이 몰려드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랜드마크인 에펠탑과 눈높이를 맞출 수 있는 최고의 스팟이다. 에펠탑을 바라보는 모든 이들의 얼굴에서 들뜸과 설렘이 묻어난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에펠탑을 배경으로 서로 수백 장씩 사진을 찍어줬다. 이렇게 포즈 취하고 사진 찍히는 거 잘 못 견디지만 여기서만큼은 용기를 내봤고, 가장 마음에 드는 이 컷을 하나 건졌다.
무엇보다 오늘 하늘이 다했다. 청명한 하늘이 가장 감사한 순간은 바로 해질 녘 노을 질 때다. 왼쪽에는 붉은 달이 떠오르고, 정면에는 에펠탑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오른쪽에는 하늘을 핑크빛으로 물들이며 해가 지고 있었다. 사진이 실물을 담지 못해 아쉽지만. 그제, 어제, 오늘 벌써 사흘째 보는 에펠탑인데. 어떻게 이렇게 볼 때마다 새롭고 짜릿할 수가 있나.
저녁이 깊어질 때까지 한참을 제자리에 서서 감상했다. 너무 추워서 동행이 가져온 담요를 같이 돌돌 말아 두르고 덜덜 떨면서. '예쁘다'는 말만 수십 번 되뇌었던 그 순간의 차디찬 공기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다른 건 몰라도 꼭 한 번 먹어봐야겠다 싶었던 음식이 있었다. 일명 '권혁수 스테이크'라 불리는 Le Relais de l’Entrecôte의 갈빗살 스테이크. 유명한 맛집답게 40분 정도 웨이팅을 했던 걸로 기억한다. 5분만 더, 10분만 더 기다려보자는 심정이었으나 나중에는 진짜 여기 스테이크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한 시간 존버 끝에 영접한 스테이크. 저 정체불명의 초록색 소스가 미쳤다. 소스에 푹 적셔 먹으면 고기의 풍미가 살아나고, 평소에 줘도 잘 안 먹는 감자튀김도 뚝딱 비우게 된다. 맛있는 걸 먹으니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동행은 방금 프러포즈받은 옆 테이블 여자가 부럽지 않은 맛이라고 평했다. 나는 그동안 파리 미워했던 게 미안해지는 맛이라고 했다. 고기가 얼마나 맛있는지, 이 순간이 얼마나 만족스러운지, 우리는 온갖 수식어구를 붙여가며 서로 경쟁하듯 내뱉었다. 그러면서 참 많이 웃었다. 결론적으로 지금 '행복하다'고 했다.
영화 <라라랜드>에 나왔다는 재즈바에 가봤다. 낡고 좁은 계단을 따라 내려간 지하 공연장에는 난생처음 보는 신세계가 펼쳐지고 있었다. 생동감 넘치는 라이브 밴드의 재즈 연주에 맞춰 자유롭게 춤추는 사람들. 특히 어르신들이 열정적으로 춤을 즐기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사이드 1열에 자리를 잡았다. 아까 와인 마시고 분명 멀쩡했던 정신이 이때부터 몽롱해지기 시작했다. 장난으로 동행한테 "저 미쳤나 봐요. 음악에 취했나 봐요."라고 드립을 쳤는데, 약간 진심이었다. 재즈에 대해 잘 아는 편이 아니지만, 영화에서 악기들 간의 충돌, 긴장감이 주는 매력 어쩌고 저쩌고 하는 대사가 처음으로 이해될 것 같던 순간.
꽤 오랜 시간을 함께한 동행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나는 근처 펍으로 향했다. 어제 만난 언니들과 친구들이 바로 옆에 있는 술집에서 놀고 있다고 연락이 온 거다. 들어가자마자 "이게 무슨 일이야!"하고 박장대소했다. 그 작은 펍에서 말도 안 되는 '저 세상' 춤판이 벌어지고 있었던 거다.
처음 보는 사람들도, 일행이 아닌 사람들도, 그야말로 모두가 하나 되어 즐기는 현장이었다.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 불러내는 건 기본이고, 즉석에서 춤을 배워 따라 추기도 하고, 다 같이 칙칙폭폭 기차놀이도 하고, 급기야 헹가래까지. 누가 프랑스 사람들 고상하다고 했단 말인가. 거의 대한민국 사람 뺨치는 흥으로 위아 더 월드 하고 왔다. 완전 재밌잖아!
숙소로 돌아와 자려고 침대에 누웠는데 오늘 하루 있었던 일들을 곱씹어보니 자꾸 웃음이 새어 나왔다. 처음 만난 사람들 덕분에 좋은 곳을 알게 되고, 추천받은 곳들 가보며, 예쁜 장면도 많이 보고, 함께 행복을 나누고,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움 없이 즐기며 춤까지 췄다. 이게 다 무슨 일이지!
정말이지 파리에 와서 내 계획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 참 다행이다. 평생을 독립적인 계획형 인간으로 살아왔기에. 그동안 타인의 충고나 제안을 듣기보다는 내가 직접 알아보고, 나의 취향과 신념에 맞게 준비하고, 그 틀 안에서 여행해 온 게 사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파리는 썩 오고 싶어 했던 여행지가 아니었기에 계획도, 욕심도 없었다. 처음으로 여기 있는 동안 이거 저거 다 해야지 하는 집착을 비우고, 만나는 사람 따라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었더니 이렇게나 신기한 하루가 됐다. 날씨마저 완벽했던 오늘을 혼자 보냈으면 계획했던 건 다 이뤘겠지만, 혼자였으면 절대 못해봤을 것들은 평생 못해보고 파리를 떠날 뻔했다.
왜 이걸 여행이 끝나갈 무렵에야 깨달았는지. 지난 한 달을 다시 리셋하고 그냥 흘러가는 대로 다시 여행해보고도 싶다. 또 얼마나 다른 걸 보고, 얼마나 다른 걸 느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