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29. 파리 샹젤리제 - 튈르리 - 루브르 - 오페라
다시 혼자가 됐다. 지난 이틀을 시끌벅적하게 보내고 나니 시간이 부쩍 빨리 지나갔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날, 그리고 이 기나긴 여행의 마지막 날은 다시 온전히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오늘의 여정은 아직 가보지 않은 동네, 개선문 부근에서 시작했다. 파리 와서 개선문은 한번 봐줘야 하지 하는 의무감에 왔는데. 정말 상상했던 그대로 똑같이 생겼고, 관광객들로 북적이기도 해서 감흥은 없었다. 전망대에 올라가 볼 거 아니면 굳이 와보지 않아도 됐겠다 생각하며 사진만 찍고 등을 돌렸다.
개선문에서부터 이어지는 샹젤리제 거리. 아직 이른 시각이라 그런지 한산하다. '오~ 샹젤리제 오~ 샹젤리제' 하는 노래가 머릿속에서 자동 재생된다. 노래 제목도, 그다음 가사도 모르는 게 함정이지만. 큰 거리 양 옆으로 명품샵과 옷 가게들이 줄지어있는데 슬쩍슬쩍 봤지만 딱히 살 만한 건 없었다. 명품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 이곳은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걷다 보니 나온 미술관 프티 팔레 (Petit Palais). 바로 맞은편에 훨씬 큰 그랑 팔레 (Grand Palais)가 있지만 왠지 프티 팔레가 더 끌렸다. 입장료가 무료라 찬찬히 둘러봤다. 사실 작품보다는 파리 시민들이 이 전시를 관람하는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특히 조각상 앞에 서서 하나하나 스케치를 뜨던 아주머니. 따로 전시해도 될 퀄리티를 봐서는 그녀도 아티스트가 분명하다.
프티 팔레 안에 예쁜 테라스 정원, 여기서 웨딩 촬영을 하는 예비부부가 있었다. 미술관에서 웨딩 촬영이라, 로맨틱하다. 나는 로맨틱하게 여기 카페에서 브런치를 먹어볼까 했으나 땡기는 메뉴가 없었다.
앵발리드와 콩코드 광장 사이. 오늘 파리는 완전 회색 도시 그 자체다. 먹구름으로 뒤덮인 하늘, 아스팔트 땅, 돌로 지어진 건물과 기둥까지, 어딜 보나 비슷한 색에 똑같은 톤이었다. 좋게 말하면 일관성 있었고, 나쁘게 말하면 우중충했고.
날씨는 아쉽지만 지금 이 계절은 좋다. 센 강변에서 건너편 에펠탑을 바라보며 서있는데, 습기를 잔뜩 머금은 낙엽 냄새가 찬 공기를 타고 진하게 풍겨온다. 가을이 꽤 짙어지는 10월 말임을 제대로 실감한 순간. 이런 차분함을 만끽하기에는 흐린 하늘도 나쁘진 않다.
튈르리 정원, 아마도 봄이나 여름에 왔다면 따스한 햇살 아래 잔디밭에 누워 꽃구경하는 장면을 상상했겠지. 보기보다 꽤 추워서 앉아서 자연을 즐기는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사람이 많은 곳을 피해 가을 속을 산책하기에는 좋은 공원이었다. 파리 사람들은 나무를 일렬로 나란히 세워놓고, 다 똑같은 모양으로 다듬는 걸 좋아하나 보다. 저렇게 큰 나무 가로수도 가드닝 하듯 관리하니 모양이 신기했다. 아 맞다, 여기 튈르리 '정원'이었지.
사람들이 모이는 곳엔 항상 아이들의 환심을 살 수 있는 비눗방울이 있다. 비눗방울, 참 별 거 아닌데 풍경에 엄청난 생기를 불어넣어준다. 시각적으로도 예쁘지만 주위 사람들 표정을 밝게 하는 공이 크다. 비눗방울 보이면 신기해서 괜히 한번 찔러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애나 어른이나, 어느 나라 사람이나 똑같다.
카루젤 개선문을 통과하면 루브르 박물관으로 쭉 이어진다. 역시 루브르가 유명하긴 한가 보다. 다른 랜드마크도 북적이고 시끄럽긴 하지만, 여기는 넘사벽으로 단체 관광객들이 많아서 눈살이 찌푸려진다. 더 있으면 멀미할 것 같아 먼발치에서 사진만 하나 찍고 바로 나왔다. (이러는 본인도 관광객인 게 코미디) 박물관에 흥미 없는 사람이라 다행이다.
평점이 괜찮은 근처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파리 오면 매 끼니를 코스 요리로 먹을 줄 알았더니 마지막 날에야 겨우 먹는다. 애피타이저는 비프 타르타르, 앙트레는 생선 요리, 디저트는 아이스크림에 캐러멜과 너트 토핑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메인 디쉬로 고기가 아닌 생선을 택한 건 나로서 엄청난 모험이었는데, 왜 사람들이 생선을 돈 주고 시켜 먹는지 처음으로 이해되는 맛이었다. 혼자서도 꽤 만족스러웠던 식사.
맛있는 걸 먹으니 기분이가 좋아져서 아이 러브 파리. 오늘 계획을 철저하게 세우고 나온 건 아닌데, 구글맵 들고 걸어 다니면서 나름 알차게 여기저기 잘 다니는 것 같다. 생 퇴스타슈 성당을 찍고, 옛 시장터에 새로 들어섰다는 대형 쇼핑몰 포럼 데 알까지 구경했다. 파리서 이렇게 현대적인 곳은 또 처음 본다.
그리고 가장 기대했던 곳 중 하나였던 '팔레 루아얄'.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서있는 흑백의 원기둥을 보니 마음에 안정과 평화가 찾아오고, 중간에 들쑥날쑥한 기둥 높이는 또 긴장감과 재미를 준다. 꼭 체스판 위 체스 같기도 한 이 기둥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예쁘다.
팔레 루아얄에 온 또 다른 이유. 프랑스 행정재판소와 헌법재판소로 쓰이는 이 오래된 건물 1층에 카페가 있다는 게 너무나도 의외였지만.
카페 키츠네에서 꼭 아이스 라떼를 마시고 싶었다. 유럽 사람들은 아이스 커피를 잘 안 마시니 아이스 라떼가 메뉴에 없기도 하고, 있어도 우리가 아는 그 맛이 아닌데. 여기는 일본식이라 한 입 마시자마자 '아, 고향의 맛이다' 싶었다. 이로서 전 세계 카페 키츠네 지점 중 서울 지점만 빼고 다 가본 카페덕후가 됐다.
파리 특유의 엄청 우아하고 화려한 느낌을 썩 좋아하지 않아서, 역사 유적지나 박물관 미술관에는 흥미가 없다는 나에게 어제 같이 다닌 동행이 추천해준 곳. 오페라에 가보면 그 생각이 바뀔 수도 있단다. 꼭 공연을 보지 않아도 내부 투어를 할 수 있다고 해서 찾아갔는데.
진짜 아쉽게 한 1~2분 차이로 입장 마감 시간이 지나 못 들어갔다. 허탈한 마음에 괜히 그 주위만 빙빙 맴돌았다. 밖에서 봐도 멋있는 것 같긴 하지만 내가 좀만 더 서둘렀다면, 들어가 볼 수 있었다면, 내 편견이 보기 좋게 깨질 수도 있었을 텐데.
마침 근처에서 피에르 에르메 매장을 발견했다. 프랑스에서 교환학생 했던 후배가 꼭 먹어보라고 했던 마카롱. 디저트를 찾아다닐 정도로 즐기는 편은 아니라 그냥 지나칠 뻔했는데 덕분에 생각났다. 당장 먹을 건 아니고 한국 가서 가족들 주려고 신중하게 골라 딱 4개 포장해 갔다.
어느덧 저녁 시간이 다 되어간다. 최후의 순간까지 미루고 미뤄왔지만, 이제 진짜 좋든 싫든 가야만 하는 곳이 남았다. 하루 종일 걸어 다니다 저녁이 돼서야 처음 지하철을 타는데 하나도 기쁘지가 않았다.
그 유명한 몽쥬 약국이다. 파리 필수 쇼핑리스트, 한국인 관광객들이 가서 몇 백만 원어치 화장품을 쓸어온다는 바로 그곳. 쇼핑도 화장품도 싫어하지만, 마땅한 대안이 없어 여기서 귀국 선물을 장만해야 한다. 가게에 들어가자마자 한국 사람인 걸 간파당하고 한국인 직원분께 계속 상품 추천받는데 거절하기도 어렵고, 여기 싸다고 들었는데 여전히 나에겐 너무 비싸서 대체 얼마를 써야 하는 건지 계산하느라 머리 아프고, 최악이었다.
고민 끝에 엄마는 안티에이징 크림, 아빠는 영양제, 회사 사람들은 핸드크림을 주려고 샀다. 보통 이렇게 여행 마지막 날 저녁에 귀국 선물을 사는데 나는 이 시간이 너무너무 너무나도 싫다. 여행하는 동안 온전히 '나'라는 주체로 자유롭게 살다가, 한순간에 사회에서 요구하는 의무를 충실히 다하며 사는 존재로 각성하고 돌아오는 느낌. 그것도 굳이 휴가가 끝나기 전 하루 먼저 돌아와야 하다니. 가족 선물은 기쁜 마음으로 사지만 그 외의 선물은 늘 스트레스다.
숙소로 돌아와 또 근처 마트에서 선물과 함께 드릴 간식거리를 한 아름 샀다. 그래도 다행인 건 과자랑 술 고를 땐 마음이 아주 편하고 즐거웠다는 것. 그리고 정말 맛있었다는 것. (역시 과자 강국 프랑스!)
마지막 밤을 스트레스로 장식할 수는 없지 않나. 어제의 동행으로부터 오늘 또 연락이 왔다. 어제 갔던 재즈바가 너무 좋았어서, 오늘은 그 옆 재즈바도 같이 가보지 않겠냐고 말이다. 완전 좋죠!
얼굴 아는 사람 만나니 또 반갑다. 하루 종일 어디 갔고 뭐했는지 쫑알쫑알 다 얘기했다. "점심은 코스로 먹었는데 진짜 맛있었어서 여기 꼭 가보셨음 좋겠고, 추천해주신 오페라는 못 들어가서 너무 아쉬웠고, 오늘 벌써 3만 보 넘게 걸어서 한국 가면 발이 없어질 것 같아여~" 그동안 말하기를 귀찮아하는 사람이라고 자기소개 해온 거 반성한다. 여러 의미로, 나도 몰랐던 나를 알게 되는 여행이다.
말 다 하고 금세 지쳐서 이제 공연 좀 감상하려고 벽에 기댔는데, 벽에 걸려있던 대형 거울이 갑자기 바로 내 뒤로 떨어지며 와장창 깨져버렸다. 유리 파편이 여기저기 막 튀는 걸 보고 너무 놀라 그대로 굳어 버렸다. 다치지 않아 천만다행이지 하마터면 귀국 앞두고 피 볼 뻔했다. 아무래도 공연에 집중하기는 어려웠다.
금방 나왔는데 마침 바로 앞에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빛 축제 'Dame De Coeur'가 한창이었다. 당연히 사전 예매는 못했고, 사람 너무 많아서 멀리서도 못 보고 떠날 줄 알았는데 운이 좋다. 시야도 나쁘지 않고.
그냥 화려한 조명만 쏴대는 빛 축제와는 차원이 달랐다. 불어를 이해하진 못하지만 내레이션으로 나오는 스토리에 따라 애니메이션 동화처럼 전개된다. 놀라운 건 연출에 노트르담 대성당 건축물의 기둥, 틈, 조형물 등 디테일을 아주 잘 활용했다는 것. 이건 진짜 예술이다 싶었다. 이걸 보기 위해 30분 전에 액땜했구나 싶고.
쇼가 끝나고 밤하늘의 은하수 같은 옷을 입은 노트르담 대성당. 더 이상 불빛이 바뀌지 않고,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를 뜨니 이제 진짜 끝이 났다는 게 실감 났다. 이 쇼도, 나의 여행도. 우연히 만나 파리에서 좋은 추억을 만들어준 동행에게 고마운 마음을 담아 작별 인사를 했다. 숙소에 돌아오는 길에 마음속으로 파리와도 작별인사를 했다.
내일 아침 눈을 뜨면 다음 여행지로 이동하는 게 아니라 나의 집이 있는 서울로 돌아간다는 게, 집에는 가족이 있고 회사에는 할 일이 있는 나의 일상으로 간다는 게. 당연한 건데 잘 상상이 안 갔다. 귀국을 앞둬서 좋은가 싫은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믿기지가 않았다. 아마 그런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짐 싸고, 알람 열 개 맞춰놓고, 잠을 청했을 거다. 그렇게 나의 30일 여행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