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26. 영국 런던 - 프랑스 파리
파리로 이동하기 전까지, 반나절 가량 마지막으로 런던을 구경할 시간이 주어졌다. 나흘간 런던을 아주 샅샅이 봤다고 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안 가본 곳은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구글맵을 보다가 근처에 특이한 이름의 공원이 있길래 우선 목적지로 정해두고 무작정 걸었다.
내가 사랑하는 계절 가을, 내가 사랑하는 달 10월이다. 억새풀을 매만지며 가을을 흠뻑 느껴볼 수 있는, 기분 좋은 아침 산책.
지금껏 런던에서 봐온 동네들과는 뭔가 다른 분위기였다. 운하를 따라 공원이 이어져 있어 전원적인 느낌이 나면서도, 한쪽에서는 공사가 한창인, 이제 막 개발되기 시작하는 주거지역 같아 보였다. 무엇보다 조용해서 좋았다. 지나가다 산책하거나 조깅하는 로컬 주민들만 한 두 명 마주쳤을 뿐.
오늘의 첫 목적지였던 개스홀더 파크. 과거 산업 시대에 런던 시내에 가스를 공급하던 가스탱크를 개조해 새로 오픈한 고급 아파트/오피스 건물이란다. 흉물 취급당할 수도 있었던 지난날의 흔적에 이렇게 다시 생명을 불어넣다니. 빌딩 밖으로 그대로 드러난 철골 구조물이 오히려 힙해 보인다. 게다가 이곳 사람들 삶의 질도 높아 보이고. 여러모로 너무 멋있어서 질투가 날 지경.
바로 옆에 있는 그래너리 스퀘어. 여기도 왠지 '새것'의 냄새가 난다 싶었는데, 알고 보니 리젠트 운하, 개스홀더 파크, 그리고 이곳 그래너리 스퀘어까지, 킹스크로스 일대를 살리기 위한 도심 재생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라고 한다.
그 프로젝트와 새로운 공간의 탄생을 알리는 안내판. 공사장 가림벽이 이렇게 감각적이고 트렌디하고 예쁠 일인가. 현대 미술관 야외 설치미술이라고 해도 믿겠다. 지하철과 표지판을 볼 때마다 항상 느낀 거지만 역시 런던은 공공디자인을 참 잘한다.
그래너리 스퀘어에서 아침 식사할 만한 데로 봐 둔 곳이 있었다. 스피커 회사에서 오픈한 스피커 쇼룸이자, 낮에는 카페, 저녁에는 칵테일 바로 운영되는 공간. 아침 첫 손님으로 입장했다.
한쪽에는 아예 라디오 부스도 있고, 또 한쪽에는 디제이 부스와 콘솔이 있고, 곳곳에 고급 스피커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심지어 화장실에도 각 칸마다 스피커가 따로 있다. 크고 아름다운 스피커들이 뿜어내는 음악 소리가 묵직하게 공간을 채운다. 아침 10시에 갔는데 분위기 최소 밤 10시 바이브. 공간에 음악과 조명이 이렇게나 중요하다.
메뉴 이름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초리조 소시지와 치즈가 들어간 샌드위치를 주문했다. 생각보다 안 짜고 진득하니, 기대했던 것보다 맛있어서 만족스러웠던 식사.
이제 런던을 떠나기까지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또 어디를 가야 하나 너무 고민됐는데, 런던에서 가장 좋았던 데를 한 번 더 가보자 생각하니 곧바로 떠오른 곳이 하나 있었다.
템즈 강변에 서서 런던의 완벽한 파란 하늘을 만나는 건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 게 벌써 5일 전. 두 번째 파란 하늘의 기회는 생각보다 금방 찾아왔다. 오늘은 정말 구름 한 점, 미세먼지 한 점 없는 클리어 스카이다.
탁 트인 시야에 자꾸 뭐가 자꾸 날아들어 신경 쓰였는데, 자세히 보니 비눗방울이었다. 어디선가 하나 둘 불어오는 비눗방울을 따라 가봤다. 쉬지 않고 비눗방울을 만들어내는 아저씨와 좋아서 방방 뛰며 꺄르르 거리는 아이들. 뭐가 그렇게 즐거울까, 티 없이 해맑고 순수한 모습에 나도 무장해제되어 한참을 바라봤다.
그중에서도 내 심장을 거하게 치고 간 노란 우비 어린이. 형 누나들처럼 뛰어놀고 싶은데 가까이 가기는 무서웠나 보다. 조금씩 다가가려고 움찔움찔하다가 결국 비눗방울이 자기 앞으로 날아오니까 '아앙~' 하고 엄마한테 뛰어가 안긴다. 너무 귀여워서 나만 볼 거야..
이 광경을 보기 위해 런던에 반나절 더 머물기 잘했다 생각했을 정도로 행복했던 순간. 뜻밖의 힐링을 선사해준 비눗방울 아저씨에게 남은 파운드 동전을 탈탈 털어 드렸다. 이 정도면 훌륭한 런던과의 작별인사였다.
숙소에 들러 짐 찾고 유로스타 타러 세인트 판크라스 역 가는 길에 본 인상적인 문구. Think of all the amazing people that are yet to come into your life. 아직 내 인생에는 앞으로 새로 만날 사람들이 더 많고, 또 앞으로 더 여행할 곳이 많다고 믿으며.
실패 확률이 없는 연어초밥 도시락과 한국에서는 잘 찾아볼 수 없는 진저에일을 사들고 파리행 유로스타에 몸을 실었다. 사실 몇 가지 이유로 이때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컨디션이 안 좋아서 정신은 예민한데 몸뚱이는 무기력했고, 이제 여행의 끝이 다가왔음을 실감하고 다시 현실로 돌아갈 생각에 우울해지기도 했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그 마지막 도시가 하필 '파리'라는 것이었다.
파리지앵과 파리 덕후들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사실 나는 파리에 대한 기대가 전혀 없었다. 확 꽂힌 포인트 없이 그냥 동선 따라, 인-아웃 비행기 티켓이 정해준 대로 흘러 흘러 오게 된 마지막 도시다. 나에게 파리는 예쁘고 고상하지만, 왠지 콧대 높고 배타적이라는 이미지가 강해서 꺼려지기도 했다. 게다가 지하철 악취와 소매치기로 악명 높지 않은가. 하필 유로스타는 파리에서도 가장 치안이 안 좋다는 북역에 내린다. 내가 파리에 왜 간다고 했을까, 후회 가득 한숨을 내쉬며 마음 단단히 먹고 짐도 단단히 동여 메고 비장하게 첫발을 내디뎠다.
핸드폰을 아예 가방에 넣고 잠가놔서 중간에 찍은 사진도 없다. 다행히 까르네를 구입하고, 숙소 가는 열차를 타기까지 착착 문제없이 진행됐다. 지하철은 진짜 작고 낡고 불편했지만 생각만큼 최악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좋았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어두컴컴한 저녁에 숙소에 겨우 도착해서 너무 힘들어서 울고 싶었으니까.
그래도 파리까지 왔는데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 에펠탑 앞에서 맥주 한 잔 하자는 글에 쪽지를 보내봤다. 다들 조금씩 늦는다고 해서 혼자 밤거리를 구경하며 기다렸다. 친구와 여행 온 사람, 부부 여행 온 사람, 혼자 온 사람들까지, 나 포함 총 여섯 명이 모였다. 그들이 이끄는 대로 걷다 보니 코너를 돈 순간, 마음의 준비를 하기도 전에 에펠탑이 빼꼼 보이기 시작했다.
에펠탑이 크고 아름답게 잘 보이는 잔디밭에 자리를 잡고 둥그렇게 둘러앉았다. 하루 종일 좀 힘들었어서 그런지 처음 본 사람들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내가 초면에 그렇게 웃으면서 말을 많이 하는 타입이 아닌데..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아마도 신나서 여행 얘기를 한참 했겠지.
잠깐 에펠탑 구경만 하고 올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오랫동안 같이 놀았다. 덕분에 매시 정각마다 켜지는 하얀 불빛쇼도 볼 수 있었다. 다들 피곤해서 새벽 1시 화이트 에펠까지 기다리는 건 무리였고, 적당히 밤 11시 좀 넘어서 헤어졌다. 우리 파리에 있는 동안 한번 더 만나자는 기약 없는 인사와 함께.
그동안 괜히 파리를 미워하기도 했고, 몸도 아파서 안 좋게 기억될 뻔한 하루였는데. 다행히 오늘 만난 사람들이 좋았고 처음 본 에펠탑은 반짝반짝 예뻤다. 뭐, 내일부터 좀 더 열린 마음을 갖고 적극적으로 파리를 여행해볼 마음이 생기는 것 같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