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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현재 그 사이 어디쯤,
에든버러

Day24. 영국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by 이리터

새벽 일찍 눈을 떠 어제 사온 베이글과 냉장고 속 남은 재료로 간단히 아침을 먹는다. 숙소에 편하게 늘어놨던 살림들을 다시 차곡차곡 캐리어에 담고, 다시 여행자 모드로 꼼꼼히 짐을 싼다. 체크아웃하는데 정들었던 곳과 작별하려니 기분이 이상했다.

마지막 집밥(?)

킹스크로스 역에서 에든버러 가는 기차를 기다리며. 요즘 한국 '#카페스타그램'에서 소품으로 많이 쓰이는 요리책을 만든 영국의 패스트푸드점 LEON. 샌드위치, 수프 등 간단한 아침 메뉴를 많이 팔지만, 이미 속이 든든한 터라 따뜻한 카페라떼 한 잔만 마셨다.

무려 4시간 30분이나 가야 한다. 잘못 예약해서 다른 사람과 마주 보고 가는 자리를 잡아버렸다. 긴긴 시간 동안 영국 할머니랑 뻘쭘하게 마주 봐야 했다. 잠도 안 오고, 머리 아프고, 할머니가 먹는 정체불명의 음식 냄새에 멀미까지. 창 밖으로 펼쳐지는 뷰가 아니었으면 정말 버티기 힘들었을 거다.

참 멀긴 멀다




드디어 에든버러 도착.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압도적인 광경에 감탄했다. 식상하기 짝이 없는 표현이지만 <해리포터> 영화 속으로 들어온 것 같달까. 뭔가 좀 '다른' 걸 보고 싶어서 왕복 9시간을 감수하고 택한 에든버러행, 잘한 것 같다.

에든버러의 첫인상

그런데 바로 시련이 찾아왔으니. 웨이벌리 역에서 숙소까지 도보 12분이라길래 자신만만하게 캐리어를 끌고 걸었는데 세상에. 그냥 두 발로 걷기도 힘든 경사의 언덕과 내리막길의 연속이었다. 또 지도상으로는 평탄한 도로 같아 보이는 곳도 막상 가 보니 현기증 날 정도로 끝없는 계단이고 그래서 길을 한참 헤맸다. 중간에 캐리어 던져 버리고 그냥 주저앉고 싶기도 했고. 거의 울면서 속으로 험한 말도 많이 했다. 구시가지에 숙소를 잡았다면 무조건 우버 타세요. 제발.

저처럼 미련하게 고생하지 말고 제발 우버 타세요

거의 녹초가 되어 숙소에 짐을 풀었다. 낡은 호스텔의 8인실이라 조금 걱정됐지만 하루 자는 건데 뭐. 창밖의 뷰가 예뻐서 조금 마음이 풀렸다. 무려 방에서 에든버러성도 보이는 특 A급 뷰다.

기력이 딸려서 쌀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스시집을 찾아 나섰다. 양은 턱도 없이 부족하지만 무조건 실패 없는 연어초밥. 이게 뭐라고 이렇게 맛있을 일. 역시 한국인은 밥이다.

스코틀랜드에 오면 꼭 해보고 싶었던 것 중 하나, 스코티쉬 펍에서 맛있는 맥주 마셔보기! 스시 먹고 나오는 길에 펍 이름이 특이하길래 그냥 한번 들어가 봤다. 펍 이름이 'The Advocate'이라니, 실내가 약간 법원 느낌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암튼 여기서 제일 맛있는 에일 달라고 했다. 시원하고 톡 쏘는 거 좋아하는 라거형 인간에게는 좀 미지근하고 썼던 걸로 기억하지만.

에든버러의 대표적인 랜드마크 에든버러성. 사실 역사에는 별 흥미가 없어서 굳이 안에 들어가서 봐야 하나 싶었는데 입장료가 18파운드나 한단다. 안녕히 계세요..

그림의 떡

치마 입은 아저씨가 백파이프를 부는 곳. 초등학교 음악책에서만 보던 ‘스코틀랜드 민요’의 그 스코틀랜드에 내가 와있다는 걸 새삼 실감했다. 그 노래를 배우던 시절의 나는 이곳이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머나먼 세상인 줄만 알았지.

사진상으로는 세상 평화로워 보이지만, 한바탕 전쟁을 치른 후였다. '바람의 도시' 에든버러는 정말 닉값을 제대로 한다. 비바람이 어찌나 세차게 불던지. 아무도 우산을 안 쓰는 이유가 있다. 써봤자 날아가니까 차라리 맞는 편이 나을 정도다.

평온해보이지만 비바람이 불고 있다

여기 사람들은 다들 태연한데 나만 죽어난다. 근처 Pret에 들어가 따뜻한 야채수프로 몸을 녹여본다. 맛 설명은 생략한다.

콩 극혐




다행히 비가 잦아들고 파란 하늘이 보이기 시작한다. 위도가 높은 지역이라 그런지 하늘이 더욱 높고 청명하게 느껴진다.

언제 비왔었냐는 듯이

다시 언덕을 올라 에든버러성까지. 성곽 뒤로 강렬하게 비추는 태양이 장관이었다. 날씨에 혹해서 이 정도면 18파운드 낼만 하다 싶어 들어가 볼까 했는데, 관람 마감 시간 다 됐고 입구까지도 못 가게 막는 거다.

나 서러워서.. 대신 아래서 성 한번 올려다 보고. 위에서 마을 한번 내려다 보고. 이렇게라도 대리만족. 이렇게 보니 모든 건물들이 다 에든버러성을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어딜 봐도 딱 이 도시다! 스러운 고유의 특징과 통일성이 있는 도시가 좋다.

어딜 가도, 어딜 봐도 여긴 에든버러

걷다 보니 다시 숙소 앞이라 방에 들어가서 잠깐 쉬고 다시 나왔다. 캐슬힐에서 신시가지로 가기 위해 내려온 이 내리막길에서 본 뷰가 인상적이었다. 딱 구시가지와 신시가지 사이라, 과거와 현재 사이에 혼자 덩그러니 놓인 기분이었다.

현재로 가는 길
과거를 뒤로 하고




같이 칼튼힐에 올라가서 해 지는 걸 보고, 저녁을 먹기로 한 동행들을 기다렸다. 제일 먼저 도착해 스멀스멀 해가 저무는 걸 보고 마음이 급해졌는데 다행히 아주 늦는 사람은 없었다. 혼자 여행 온 여자 넷이 모였고, 우리는 여자 넷이라는 사실에 마음이 편하다며 좋아했다.

금방 해가 다 져버릴까 봐 마음이 급해졌다

처음 만난 사이지만 여행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 보니 힘든 걸 모르고 금세 칼튼힐 정상까지 올랐다. 그리고 인생에서 가장 예쁜 노을 하늘을 보게 되는데.

세상에

이렇게 파란 하늘에 핑크색 구름 띠가 쭉 펼쳐지는 광경은 정말 비현실적이었다. 저 세상 컬러감에 약간 심장이 아플 정도였고. 그 아름다운 하늘 아래로는 예쁜 에든버러 마을과 바다가 펼쳐져 있다.


내 사진 욕심은 없는 편이지만 이 배경으로는 꼭 한 장 남기고 싶었다. 제일 사진을 열심히 찍는 것 같다는 이유로 모두들 나에게 사진을 부탁했고, 나는 이 모임의 전속 사진기사로서 수십 장을 찍어주고 나서야 겨우 몇 컷 부탁할 수 있었다. 그 사이에 하늘이 많이 붉어져 아쉬웠지만 혼신의 크롭과 보정으로 이 사진 하나는 건졌다.

자유의 영혼

반대쪽 하늘은 거의 불타는 것 마냥 강렬한 오렌지빛이었다. 어딘가 황량한 도시 느낌도 나는 이 장면도 마음에 들어 사진 한 장을 부탁했다. 동행이 저 이상한 크레인 같은 거 안 나오게 찍었다고 자랑스러워했는데 사실 나는 약간 아쉬웠다. "제가.. 저 공사장 같은 걸 좋아하거든요. 한 장만 더.."

이런 배경도 마음에 든다
왕복 9시간이 아깝지 않았던 뷰

바닷가 언덕 위 미친 듯한 강풍과 추위로 고통스럽긴 했지만. 오직 칼튼힐의 노을을 보기 위해 런던에서부터 네 시간 반 오는 게 아깝지 않다고 느꼈을 정도였다. 이 뷰를 또 보러 에든버러에 다시 한번 오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고.




어둠이 내린 구시가지

스코틀랜드에 왔으니 하기스를 꼭 먹어보고 싶다는 일행이 있어 'the best haggis in town'이라고 자랑스럽게 내건 맛집을 찾아갔다. 사실 하기스가 내 취향이 아닐 걸 직감적으로 느꼈지만, 여럿이 함께하는 덕분에 경험은 해본다. 전형적은 스코틀랜드 음식 하기스와 피시 앤 칩스, 미트파이를 시켰고, 역시나 네 명 다 하기스는 불호였다.

다들 술을 즐기는 편은 아닌 것 같았지만. 솔직히 이대로 헤어지기는 너무 아쉽지 않냐며, 내가 꼭 가보고 싶어 알아둔 펍으로 리드했다. 에든버러 사람들 다 모였다 해도 믿을 법한 꽤 크고 시끌벅적한 펍이었다. 여행 다니면서 술집에 온 것도, 이 시간까지 돌아다녀본 것도 처음이라는 친구는 정말 신기해했다.

시끌벅적한 펍

맥주 한 잔씩 하면서 못다 한 이야기들을 나눴다. 축구가 좋아 영국에서 교환학생 하는 친구, 일이 힘들어서 휴가 내고 온 친구, 그리고 퇴사 후 새 도전을 준비하는 언니. 무엇보다도 '인생에서 꼭 한 번은 백수가 되어보라'는 그 언니의 조언이 기억에 남는다.

백수는 아닌 장기휴가자는 회사 돌아갈 생각에 잠깐 아찔했지만 그래도 아직 일주일 더 남았고, 가볼 도시가 남았고, 심지어 에든버러에 있는 시간도 반나절이나 남았음에 감사하며. 또 한참을 걸어 숙소로 향했다. 오늘 로얄마일 길만 일곱 번째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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