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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직장인의 기억

대학병원 임상병리사

사실 나는 꽤 만족하면서 직장을 다녔다. 물론 같이 일하기 싫은 사람도 있었지만, 좋은 사람들이 많았기에 그들과 어울리며 꽤 재밌는 직장생활을 했다. 동료들과 어울리며 자주 이야기 하던 주제는 윗사람 험담, 보수적인 직장문화 그리고 넓게 보면 임상병리사의 현실이었다. 임상병리사의 현실에 대해서 함부로 언급하기엔 정보가 부족하지만, 대학병원이 아닌 곳에서 일하는 임상병리사들의 처우가 좋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다. 개인병원에 다니면 아직도 주 6일은 기본이고, 간호조무사 업무, 방사선사 업무까지도 커버를 하는 곳도 있다고 한다. 그렇게 일하면서도 월급은 거의 최저시급 수준이고, 의료기사내에서도 박봉인 걸로 유명하다. 그 당시에는 다 안다는 듯이 이렇게만 하면 다 해결될 것처럼 술자리에서 가볍에 이야기를 나누고는 했지만, 쉽지 않은 문제임은 틀림없다. 협회차원에서의 대응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협회장님 화이팅 좀 합시다.) 밑에 근무조건은 구인구직사이트에 임상병리사 검색하면 심심치 않게 보이는 구인글이다. 다 둘러봐도 4천 이상은 거의 없고, 많으면 연봉 3600 정도이고, 대부분의 경우에 주 6일에 월급 250 정도이다.

주 6일에 220만원!!??(토요일 일하는대신, 평일반차 하루)(시급은 계산해보니 대략 12,000원정도)


병원을 그만둔 가장 큰 이유는 나의 미래의 모습 때문이었다. 10년 뒤, 그리고 20년 뒤에 여기서 무슨 일을 하고 있을지 너무나 명확하게 그려졌다. 나의 미래를 병원에서 찾으면 안 되긴 하지만, 정말 많은 시간을 직장에 있기 때문에,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권력에는 반응하지 않고, 돈에만 반응하는 자본주의괴물로서, 20년 차, 30년 차 선생님들 연봉을 듣고 나니 실망스러웠다. 병원을 떠나기로 결심한 후, 단 한 번도 퇴사를 후회했던 적은 없다. 졸업 후 첫 사회생활이었고, 10년을 다녔기에 나의 모든 사회였지만, 나와보니 정말 작은 우물 안 이었음에 틀림없었다. 공백기에는 여러 가지 압박은 있었지만, 역시나 노는 게 제일 좋았다.(군대 칼복학, 졸업 하기전 취뽀를 성공하여 10년간 근무했기에, 이렇게 길게 놀아본게 인생 처음)



병원에서 있었던 불합리한 일들을 생각해 보면, 단연코 휴가가 처음으로 떠오른다.(휴가에 진심) 무려 5~6년 차가 될 때까지 휴가 3개를 연달아 쓰는 것도 눈치 보였다. 1주일 쓴다고 했으면, 아마 진단검사의학과가 무너졌음이 틀림없다. 그만큼 난리였었다. 안 돠는 이유는 “바쁘다고 매번 인원 충원을 요구했으면서, 휴가를 그렇게 길게 쓰면 안 바빠 보여서, 인원충원을 받기 어렵다”였다. 그리고 병원의 눈치도 좀 보는듯했다. 최근까지도, 간호사들 임신하는 것도 눈치 보이던 그런 곳이었다. 병원이 문제인지, 진검이 문제인지 어쨌든 이런저런 이유로 쉽지 않았다. 만약, 내가 휴가를 3 일가고, 바로 이어서 다른 직원이 3 일가고, 또 다음직원이 3 일가면, 어차피 2주 가까이 한 명이 없는 상태에서 검사실은 돌아간다. 내가 혼자 2주 휴가 가는 거랑, 이거랑 뭐가 더 안 바빠보일려나....그리고 휴가를 길게 보내주지는 않지만, 또 휴가사용에는 진심이었다. 6월부터 휴가 관리가 들어가기 시작하면서, 남은 휴가를 언제 사용할지 다 정하라고 했다. 휴가가 남아도 돈으로 안 주고, 이월도 안되기에 어떻게든 다 소진하기 위해서 6월부터 휴가사용 압박을 준다. 그러면서 18개의 휴가를 왜 1월부터 적절하게 나눠서 사용하지 못했냐 라는 소리에 시달렸다. (지금은 눈치는 보이지만 5개사용하여 1주일 휴가를 낼수 있다고한다.)


좋은 기억도 있고, 나쁜 기억도 있는 K-직장인 생활이었다.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이 많지만, 오늘은 일단 여기까지만...(너무 욕만 적으면 안되니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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