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은 마음
딱히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그래서 마음이 차게 식은 것 같다.
처음 시작한 무언가에 설레는 마음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생경한 느낌과 자극에 이것저것을 만져보면서 신기해하는 구간이 지나면 이제는 새롭게 느껴지던 모든 것이 그냥 일상이 된다. 그 순간부터 이제까지 신나는 모험이었던 모든 것들이 단순한 일과 또는 노동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는 것을 위험하다고 말을 하는 것이다. 일이 되고 의무감을 느끼는 순간부터 즐기는 마음은 어쩔 수 없이 사라져 버리기 때문에 말이다.
하지만 무언가에 깊이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재미없는 이 구간을 지나가야 한다. 단순히 재미만 추구하기 위해서는 적은 시간에 강렬한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는 취미로 자신의 즐거움의 영역을 한정해 두는 것도 좋은 전략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무언가를 깊이 이해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특정 주제를 자기 삶의 중심으로 깊이 끌어들여야 하는 것을 피할 수 없게 되고 그 순간부터는 진지함과 꾸준함 그리고 의무감과 압박감도 동시에 느끼게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고 꾸준하게 무언가를 해나가게 된다면 어느 순간에는 아주 특별한 인연과 이해 그리고 자기만의 독특한 해석을 가지게 될지도 모른다. 그 첫 구간에 이제 서서히 내가 진입하고 있는 것 같다.
나에 대한 탐구가 끝난 것이 아니다. 아직도 나 자신을 더 잘 이해할 필요가 있고 나의 기질을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많은 관찰과 더 깊은 생각이 필요하다. 하지만 뭔가 갑자기 마음이 식은 듯한 상태에서 예전과 같이 강하게 나를 몰아붙이고 싶지는 않다. 그냥 이 상태는 일정한 바이오리듬에 의해 야기되는 하나의 순환주기 같은 걸로 이해하려고 한다. 분명히 쓰고 싶던 글들이 많았고 아직 꺼내지 못한 무엇들이 내 안에 있지만 어쨌든 그것들은 차게 식은 마음과 함께 내 내면 속으로 가라앉아 있다.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계속할 수 있던 것 같던 이야기들에 갑자기 열의가 시들해졌다.
그럼에도 초조함은 없다. 이게 당연하다는 것을 그냥 느낄 수 있어서 좀 더 차분하게 이 차가워지는 마음의 상태를 담담하게 받아들이려고 한다. 다시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때는 또 무언가를 미친 듯이 쓰고 싶어질 수도 있다. 무언가를 받아들여야 하는 시간, 그리고 내보내는 시간에도 분명히 어떤 특정한 흐름과 사이클이 있을 것이다. 그런 것들을 보다 냉정한 상태에서 차분하게 기록하면서 이 구간을 지나가 보려고 한다. 나의 마음에는 항상 이런 들쭉날쭉함이 있었는데 그것을 한 번도 진지하게 응시하면서 이해하려는 시도를 해보지 못했다.
다음에 다시 마음이 활기차게 살아나는 구간을 만나게 된다면 그때는 어떤 문제를 보다 진지하게 파고들 수 있을까? 하나의 주제에 꽂힌 마음이 수십 개의 파생되는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그것 하나, 하나가 이야기가 되어 한 달 이상을 죽 이어지는 패턴은 분명히 처음 경험해보는 재밌는 모험이었다. 어떤 것이 머릿속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일단 모아 놓은 파편들이 많아야 한다는 것을 알 것 같다. 그리고 그 파편들을 가지고 일정한 세계관을 만들 수 있을 만큼 많은 고민과 노력을 해보는 숙고의 시간도 필요할 것이다. 그런 시간이 쌓여 일정한 압력이 내부에 형성되었을 때 불꽃처럼 하나의 주제의식이 점화되면 그때에는 또 무언가가 내부에서 쏟아지듯 ‘와르르’ 하고 튀어나올 것이다.
그때까지 꾸준히 보통의 글을 딱딱하게 써야 할 것 같다. 지금부터 한동안 쓰는 글은 정서적인 글이 아니라 나의 기술과 묘사력을 높이기 위한 글이 될 것이다. 누구나 써야 하는 가장 기초적인 글을 이제부터는 하나하나 시도해 볼 생각이다. 무언가 나의 글이 더 퍽퍽하고 재미없어질 것 같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삶도 글도 아직 너무나 서툰 생초보인 것을… 그걸 인정하고 차분하게 그리고 천천히 꾸준히 가고자 한다. 어쩌면 마음이 차게 식은 것이 아니라 내 속에 불안이 살 빼기를 위해 잠시 휴면 상태애 들어간 내적 평화의 시기인지도 모르니 그냥 이 상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본다. 마음에 큰 갈등이 없는 것이 재미는 없지만 그렇다고 나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생활에 에너지를 많이 빼기고 나니 생각은 적게 하게 된다. 이제 또 새롭게 생활의 균형감을 찾아나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