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과 기록
차분하게 앉아서 한 잔의 커피를 즐긴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 본다.
올해가 처음 시작했을 때 나의 마음은 너덜너덜한 상태였었다. 끝도 없는 진창 속으로 마음이 계속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고 그것을 멈출 방법이 없었다. 마음이 심란할 때면 늘 하던 대로 달리기를 해보아도, 자전거를 타고 주변을 돌아다녀도, 도서관에 박혀 책을 읽고, 관심 가는 대로 여러 가지 정보들을 찾아보아도 모든 것에서 스트레스를 받았다. 내 안에서 뭔가 들끓고 있는데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냥 끝없는 바닥으로 계속 내가 가라앉고 있었다.
가장 곤혹스러웠던 것은 잠들기가 힘들어졌다는 것이다. 모든 것에 예민해지고 아주 작은 소음도 날카롭게 나의 신경 속으로 파고들어서 내가 잠드는 것을 방해했다. 그래서 의미 없는 무언가를 계속해서 했다. 그게 뭐든 목적은 나를 지치게 만드는 것이었고 그렇게 모든 에너지가 소진되면 2~3시간을 기절한 것처럼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나서 좀비처럼 흐느적거렸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마음에는 바닥이 없다는 것이었다. 끝없이 밑으로 하강하는 기분으로 그럼에도 언젠가 바닥에 닿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보았지만 그런 것은 없었다. 마음이 죽은 듯이 시들면 몸도 따라서 약해지고 그럼 점점 더 안 좋은 악순환으로 빠져들어 완벽하게 무기력해지지만 가만히 두면 저절로 좋아지지는 않는다.
잠들 수 없는 깊은 밤에 문득 내가 괴로운 건 결국 나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자기 함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적으로 일어나는 많은 생각들과 이미지들이 있지만 한 번도 그것을 깊게 들여다 보고 왜 그런 생각과 감정들이 나를 사로잡는 것인지 진지하게 사유해 본 적이 없었다. 생각이 나를 괴롭히는 것이라면 그 생각을 자세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그냥 느꼈다. 하지만 생각은 언제나 흩어지고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자세하게 살펴보기 위해서는 잠시 고정된 형태로 묶어둘 틀이 필요했다. 몇 가지 핵심 키워드를 끄적이고 메모하는 식으로 조심스럽게 나의 생각과 감정에 접근해 갔지만 뭔가 폭풍우처럼 몰아치는 격랑 속에서 얼마 동안은 그 모든 시도가 아무 의미가 없는 듯했다.
왜 글을 쓰겠다고 마음을 먹었는지 그리고 그 글들을 공개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게 된 것인지 그 계기는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서 외부와의 연결 그리고 밖으로 연결된 어떤 느낌이 내 마음의 균형을 잡아줄 하나의 수단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와 희망으로 다가왔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래서 한동안은 정말 미친 듯이 글을 썼다. 그 내용이나 형식 그리고 글의 완성도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내 안에 빵빵하게 차 있던 어떤 압력을 빼내는 것이 내게는 가장 시급한 문제였어니 말이다.
내 안에서 몰아치고 있는 자기 파괴적인 감정을 일단은 진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상태는 대단히 만족스러운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폭풍우가 몰아치던 해안에 갑작스레 평안이 찾아온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폭풍우의 흔적처럼 내 마음이 말끔하고 정갈하게 정리된 느낌은 전혀 아니다. 여기저기에 폭우의 흔적들로 지저분하고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혼란함과 심란함이 곳곳에 남아있다. 하지만 어쨌든 폭우는 지나갔다.
지금은 내 안에서 무언가 미친 듯이 쏟아져 나오는 그런 상태는 아니다. 그냥 열의가 없는, 조금 노곤하고 피곤한 그러면서 좀 더 쉽게 주변의 것들을 수용할 수 있는 그런 상태가 되었다. 이런 상태가 되면 나는 무언가를 또 잘 참아낼 수 있다. 모든 것에 잘 섞이고 어울릴 수도 있을 것이다. 날이 서 있던 신경이 좀 수더분해진 만큼 그냥 편안해졌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바람직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의 내적 문제는 해결된 것이 아니라 그냥 다시 깊은 무의식 속으로 가라앉은 것이다. 그 전에는 나 자신에게 큰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살아본 적이 없었지만 지금은 풀어야 할 숙제가 한가득이라는 자각을 가지게 되었다.
삶은 참아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삶은 보다 능동적으로 탐구하고 즐기며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나 자신과의 관계가 원활해야 한다. 나는 아직 나의 ‘불안’이라는 감정 그리고 ‘불안’에서 파생되는 모든 부정적 생각들을 어른스럽게 다루어내지 못한다. 그것을 다루는 것이 여전히 어렵고 내 자신의 무의식도 이성이라는 자아를 그다지 신뢰하는 것 같지 않다. 하지만 이제는 무엇을 결정하였어니 무조건 참아내고 견뎌야 한다는 식으로 나를 또다시 몰아세우지는 않을 것이다.
내 안에 감정의 폭풍은 그쳤지만 여전히 나는 허약하다. 내가 폭풍이 몰아치는 동안 보았던 상처 입은 내면들은 여전히 그대로 저 밑바닥에 남아있다. 그것들에 접근하는 것이 지금은 왠지 아득하게 멀게만 느껴진다. 얼마 전엔 한두 개의 키워드 만으로 무수한 글들을 써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키워드는 그냥 낱말일 뿐 전혀 그 사이의 연결성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야기가 갑자기 사라졌다.
아마 나는 원래 이런 존재일지도 모른다. 이제 다시 더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나의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또 얼마간의 기다림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은 그냥 마음이 평안을 느끼는 대로 그대로 내 삶을 살아가자. 요즘은 잠이 많아졌다. 그걸 행복하게 생각하자. 인간은 참 간사한 것이 모자랄 때는 항상 미친 듯이 찾아 헤매다가도 일단 자기 손에 들어오면 가진 것에 대한 고마움과 그것이 간절했던 마음을 쉽게 망각해 버린다. 이 평안한 시간과 잠은 내가 올해 초 얼마나 염원하던 것이었나? 모든 일은 내 욕심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러니 상황을 받아들이고 그것에서 내가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조용히 기록하고 사색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