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직, 실패, 불안
나는 고소공포증을 가지고 있다. 모두 얼마간은 가지고 있는 추락에 대한 공포라고도 할 수 있지만 나의 경우에는 정도가 심하다. 호흡이 힘들어지고 하반신의 감각이 희미해지면서 어느 정도 이상이 되면 술에 취한 것처럼 힘이 풀리고 걸음을 제대로 통제하는 것도 어려워진다.
높은 곳에 올라가면 언제나 이 증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오랫동안 고층 아파트에 살면서도 전혀 불편함을 느낀 적이 없으니 나의 공포는 높이 자체보다는 추락에 대한 위협에 반응하는 신체증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추락의 위협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상황만 피해 갈 수 있다면 고소공포증은 삶을 크게 괴롭히는 요소는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추락에 대한 공포는 내 안에서 이상한 변이를 일으킨 것 같다. 단순히 물리적인 추락뿐만이 아니라 모든 실패와 부정적 감정들이 추락하는 이미지와 결합되어 내 안에서 요란하게 경보음을 울리는 것을 최근에 강렬하게 경험하였다. 무엇보다 ‘불안’ 자체가 추락의 이미지와 함께 나를 덮칠 때 숨쉬기가 곤란 해질 정도로 몸이 옥죄여오고 몸 전체가 맹렬하게 수축하는 듯한 느낌이 들던 그 순간들은 정말 끔찍했다. 어딘가로 곤두박질치는 듯한 추락감과 거대한 공포와 불안이라는 감정 자체가 실재하는 물리력이 되어 나를 짓누르는 것을 온몸으로 겪어내야 하는 것은 정말 기이한 체험이다.
그래서 갑자기 잠이 무서워졌다. 왜 비몽사몽 잠이 깨어나는 그 순간에 그런 경험을 하게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안의 불안이 너무 커져서 ‘발작’하듯 덮쳐 왔을 때, 그것은 어떤 객관적 사실의 대한 해석이 아니라 부정적 에너지를 가진 감정 그 자체였다. 내가 죽을 만큼 불안을 느낄 객관적 현실은 분명히 없었다. 삶이 팍팍하다고 하여도 그건 그냥 조금 고된 일상일 뿐이다. 그런데 왜 올해는 이토록 감정 자체가 요동치면서 나를 뒤흔들어 버린 것일까?
어찌 되었던 추락하는 이미지는 이제 나에게 어떤 증상을 불러오는 하나의 트리거가 된 듯한 느낌이 있다. 내적으로 추락하는 느낌을 받을 때, 어쩌면 실패할지도 모른다고 불안감을 느낄 때,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위화감을 느낄 때, 나 자신에 대해서 확실한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할 때 등 온갖 불안감이 이제는 ‘추락’이라는 이미지와 결합하여 나를 더욱 옥죄여오는 느낌이 든다. 그러니 나는 이 ‘추락’이라는 이미지와 ‘불안’이라는 감정을 조심스럽게 분리하고 세밀하게 다루면서 나의 내면을 새롭게 정비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솔직히 왜 이렇게 추락이라는 것에 큰 공포를 느끼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다. 어릴 때는 높은 곳에도 곧잘 올라갔고 동네에 있는 동산에서 절벽 턱에 다리를 내놓고 까딱거리는 장난도 즐겨했으며, 나름 내 키보다 높은 곳에서 물속으로 뛰어들어 다이빙하는 것도 재밌어했었는데 이제는 몸이 공중에 뜨는 기분만 들어도 나도 모르게 전신이 경직되어 버린다.
어쩌면 군대에서 낙법을 배우다가 매다 꽂힌 것이 트라우마가 된 것일까? 생각해보면 제일 엉망으로 땅에 떨어진 경험은 낙법을 배우다 뻗뻗하게 땅에 꽂힌 그 경험이 제일 유력하다. 그 이후로 작업을 하다 작업대가 기우뚱하게 쓰러져서 손목을 부러뜨린 경험, 그리고 자전거를 타고 가다 급정거를 하면서 몸이 앞으로 튀어나간 경험도 있긴 하지만 그것을 다시 떠올려도 엄청 무섭거나 몸이 굳어지는 느낌은 없다. 나의 내면에서 추락하는 이미지는 항상 뻗뻗하게 경직되어 꼼짝도 하지 못하고 곤두박질하는 느낌이다. 여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낙법을 정식으로 배워보는 것이 도움이 될까?
만약 조금 더 여유가 생긴다면 낙법과 수영은 제대로 한번 배워보고 싶다. 떨어지는 이미지와 물에 가라앉는 이미지는 내가 위축되고 심적으로 압박을 받을 때 가장 일반적으로 내면에 형성되는 ‘불안’의 모습들인 것 같다. ‘불안’이라는 감정 자체를 어떻게 줄여나가야 할지 방향성을 쉽게 잡지 못한다면 일단 감정 자체보다는 내 머릿속에서 이미지화되는 추락과 침몰하는 형상들의 부정적이고 무기력한 느낌을 조금씩 줄여나가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정말 도움이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무엇이든 해보는 것은 나쁘지 않을 것이다. 실패한다고 하더라도 무엇을 도전하고 시도하는 자체가 나에게 큰 의미일 테니 말이다.
나를 사로잡고 있던 감정들이 조금 뒤로 물러서면서, 편안함과 함께 의욕이 떨어지고 나태해지는 부작용이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감정이 몰아치던 순간들에 나를 크게 덮쳐 왔던 이미지와 느낌들을 곰곰이 되짚어보고 그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다시 그런 감정들에 압도되지 않을 수 있을지 신중하게 고민을 해보려고 한다. 그리고 이 모든 시도들이 결국에 나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통제할 수 있게 되는 성장의 과정으로 이어지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