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그래 이게 한국인이지'라고 느껴질 때가 종종 있다. 먼저 빨리빨리 문화를 접할 때다. 버스가 멈추면 일어나라는 버스 내 안내장에도 불구하고, 정거장이 다가오기도 전에 벌떡 일어나 문 앞에 삼삼오오 모이는 우리는 한국인. 비행기에선 랜딩할 때, 엔진이 완전히 꺼져 띵하는 신호음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3초도 되지 않아 나갈 태세를 모두 마치고 일어나는 한국 사람들. 그리고 그 모습을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외국인을 볼 때면, 우리는 역시 빨리빨리 한국인이라는 것을 체감하곤 한다.
하지만, 빨리빨리 문화보다 내가 더 체감하는 한국인의 특성은 집단주의 문화다. 노스페이스 잠바가 학생들 사이에서 유행할 때는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다 그 잠바를 입고 있고, 롱 패딩이 유행하는 시기에는 모두 깔 맞춘 듯 지하철에 롱 패딩을 입은 사람만이 북적인다. 가끔 이런 문화가 불편할 때가 있다. 주류의 흐름과 동일하게 생각하거나 행동하지 않으면 도태되고 이상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집단 문화. 우스갯소리로 명절에 친척집에 가면 학생 때부터 '좋은 대학 가야지'로 시작해 취업-> 결혼-> 출산으로 이어지는 어른들의 동일한 잔소리 레퍼토리를 들을 때. 때로는 이런 한국이라는 집단 문화로부터 멀리 훌쩍 도망쳐버리고 싶어 진다.
하지만 그렇게 불편하다 느껴질 때면, 내 몸속에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것이 자랑스러웠던 순간들이 내 머릿속을 스쳐가곤 한다. 어렸지만, 또렷이 기억나는 순간이 몇 가지 있다. 먼저, 1997년 IMF 위기 때 TV에서 보았던 금 모으기 운동이다. 나라가 어려워지면서,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던 대한민국의 부채를 갚기 위해, 시민들은 집에 꽁꽁 숨겨놓았던 돌반지, 결혼 예물들을 성큼 들고 나왔다. 어린 나이였지만, ‘내 나라를 위해 가져왔다’는 시민들의 인터뷰를 보면서 뭉클거렸던 감정을 기억한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금 모으기 운동에서 4가구당 1가구꼴로 평균 65g의 금을 내놓았다. 이 운동의 영향으로 대한민국은 예정보다 3년이나 앞당긴 2001년. 195억의 차입금을 IMF에 모두 상환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기억한다. 2002년 월드컵에서 대한민국 선수들을 응원하며 붉은 물결로 거리를 물들었던 한국을, 기억한다. 광화문 광장에서 자유와 민주주의의 촛불을 들고 있던 사람들의 얼굴과 불꽃의 일렁임들을. 생각해보니, 살면서 잊고 지냈던 우리들의 집단 문화, 즉 함께 했던 순간들이 많았다. 함께라서 불편한 순간들도 있었지만, 함께라서 참 좋았던 순간들도 있었던 것이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작다. 하지만 함께라면 더 많은 일을 이룰 수 있다'는 헬렌 켈러의 말처럼, 함께한 우리들은 지금의 대한민국을 이뤄냈다.
지난 일요일 첫방송한 MBC의 <같이 펀딩>을 보면서 함께한다는 것의 의미를 떠올렸다. <같이 펀딩>은 가치 있는 아이디어를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함께 실현해보는 의미 있는 프로그램이다. 크라우드펀딩이란 다수의 대중으로부터 자금을 조달하는 것을 말한다. <같이 펀딩>을 보며 아이디어에 공감한 사람들은 네이버 해피빈을 통해 펀딩에 참여할 수 있고, 원하는 경우 리워드도 지급받을 수 있다.
<같이 펀딩>의 첫 번째 아이디어는 바로 '태극기함'이다. 언젠가부터 국경일에 태극기가 걸린 집을 찾아볼 수 없게 된 요즘, 결혼식장 한 벽면을 태극기로 채울 만큼 태극기에 무한한 애정을 가진 배우 유준상 씨가 태극기함이라는 가치 있는 아이디어의 실현을 위해 움직였다. 이날 방송에서는 태극기에 대한 우리가 미처 몰랐던 뜻깊은 의미에 대해 설민석 역사 강사와 함께 진관사에서 풀어보는 내용이 방영되었다.
우리의 태극기는 크게 두 가지를 의미한다고 한다. 첫 번째는 조국의 독립의지이다. 미국과의 조약을 위해 역관의 도안으로 처음 만들어지게 된 태극기는 일제의 침략으로 국가가 망하고, 조국을 대표하는 상징물이 되었다. 3.1 운동의 만세 물결로부터, 이봉창의 가슴에, 광복의 그 순간에도 태극기는 휘날렸다. 두 번째는 평화통일의 의지다. 언젠가는 통일이 될 것이라는 염원을 담아 남북이 갈라진 순간에 남한은 새로운 국기가 아닌 태극기를 채택하었다고 한다. 새삼스레 금 모으기 운동을 떠올렸던 것도 사실 태극기 때문이었다. 잊고 있었던 우리들의 역사, 어쩌면 우리가 겪었을 수도 있었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그 간절했던 함께함이 바로 태극기 속에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대한민국의 독립은 한 사람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잊혀진 수많은 이들이 함께 이뤄낸 승리다. 그 잊혀진 역사 속 한 사람이 바로 초월스님이었다. 이름이 잘 알려진 한용운 스님이나, 다른 독립열사들과 똑같이 초월스님도 독립을 위해 앞장서시다 광복을 1년 앞두고 생을 마감하셨다. 그리고 그는 우리의 기억에서 잊혀졌다. 그런데 지난 2009년, 진관사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보수공사를 하던 중 벽 속에 숨겨진 작은 보따리 꾸러미를 발견하게 된 것. 그것은 초월스님이 돌아가시기 전, 벽속에 몰래 꽁꽁 숨겨놓은 것이었다. 신채호 선생의 글과, 독립신문 같은 문서들이 일장기 위에 덧대어진 태극기 보자기 속에 들어있었다. 노스님이 일장기 위에 태극기를 붓으로 덧대어 그릴 때의 그 마음. 그리고 우리의 잊혀져선 안 되는 역사적 기록들을 꽁꽁 소중히 여밀 때의 그 마음. 그 간절함이 느껴져서였을까. 방송이 끝난 지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아 태극기함의 크라우드 펀딩은 목표 수익보다 무려 4000% 배가 넘는 투자금액이 모여 마무리되었다.
노스님의 간절함. 그 조국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라는 가치에 우리는 같이 공감했다. 그리고 같이 태극기함이라는 가치 있는 아이디어를 실현시켰다. 그야말로 같이의 가치를 느껴볼 수 있는 시간이어서 더욱 의미가 있다. 집단 문화라고 일컬어지는 우리의 특성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 순간, 우리는 같이함의 가치를 아는 한국인이었다. 그래서 더욱 뜨겁고 더욱 강력했다.
MBC <같이 펀딩>은 앞으로 조국을 향한 사랑이라는 가치처럼 우리가 함께 공감할 수 있고, 특별한 의미가 있는 다양한 아이디어들로 방송을 이어나간다고 한다. 예를 들면 노홍철을 필두로 한 소모임 프로젝트가 그것이다. 혼밥, 혼행, 비혼 등 점점 더 혼자 보내는 시간이 익숙한 사람들 속 소모임을 통해 서로의 이야기를 하며 힐링하는 프로젝트인 듯하다. 혼자함의 가치는 의미 있지만, 같이의 가치는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다. 그리고 혼자서 할 수 없었던 많은 일들을 이뤄낸다. 인도에서 전해지는 우화 중 메추리 새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메추리 무리는 새 잡이가 던지는 그물에 매번 걸려 목숨이 위태로웠다. 그때 한 메추리가 그물이 던져지면 다 같이 머리로 그물을 들어 하늘로 높이 올라가자고 제안하고, 메추리 무리는 더 이상 새 잡이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는 우화다.
같이의 소중함과 뭉클함으로 감동받았던 일요일의 어느 하루처럼, MBC <같이 펀딩>이 앞으로도 이와 같은 같이의 가치로 사회에 긍정적인 시너지를 만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