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정근 Nov 08. 2019

기부는 좋은데 결연은 불편하다

1. 오늘 내가 기부단체를 통해 후원하는 어린이에게서 안부 편지가 왔다. 몇 년 전에 부천에서 일할 때 같은 지역에서 후원이 필요한 곳에 기부를 하려고 찾다가 연결된 아동이다. 전에도 다른 기부단체와 해외아동 결연을 해본 경험이 있었지만 사실 누군가와 새로이 결연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런저런 기부단체들을 살펴보다가 모 어린이 기부단체에서 부천의 다문화가정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하고, 결연 얘기도 없는 것 같아서 덜컥 기부를 신청해버렸는데, 아이고야 몇 주 뒤에 후원 아동의 사진과 이름, 소개가 동봉된 편지가 날아왔다. 이제 와서 무를 수도 없는 일이고 내가 내용을 꼼꼼히 읽어보지 않은 탓이라 생각하며 지금까지 후원은 이어가고 있지만, 마음 한 구석의 찜찜함은 여전히 살짝 남아 있다.


2. 한두해 전인가, 자기가 기부하고 후원하는 학생에게 선물을 주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하냐고 물어봤더니, 본인도 비싸서 입지 못하는 유명 고가 브랜드의 롱 패딩을 얘기해서 정말 어이가 없었다는 식으로 누군가가 인터넷에 글을 올려 말이 많았었던 기억이 난다.


3. 아마 비슷한 시기로 기억하는데, 지자체에서 저소득층 아이들에게 지급하는 식권 바우처 사용을 놓고도 설왕설래가 있었던 적이 있다. 방과 후에 지역 식당에서 돈 대신 사용 가능한 식권 바우처를 지급하는데, 어떤 사람이 나도 쉽게 먹지 못하는 비싼 일본식 돈가스를 저소득층 학생이 바우처를 사용해서 먹더라, 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 내 세금이 이런 곳에 쓰여도 되느냐고, 인터넷에 직접 올린 건지 민원을 넣은 것이 올라온 것인지는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당시에 꽤 논란이 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4. 두 사건 모두 글쓴이가 너무나 당당하게 답정너 스타일로 글을 올려서 놀랐었다. 아마 나름대로의 불공정에 대한 본능적인 반발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다른 이들에게 동의를 구하는 글을 올렸겠지. 공정이 화두가 되어버린 세상인데, 대체 공정에 대한 이런 얼토당토않은 감각은 어디서 출발하는 걸까.


5. 기부단체에서 피후원자를 정해서 후원자와 결연시키는 제도는 문제가 있다. 물론 일부의 순기능도 존재한다.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준다는 느낌을 확실하게 받을 수 있고, 한번 연결되면 후원자가 기부를 끊기 쉽지 않게 만든다. 또 개인적으로 기부금이나 물품을 보내줄 수도 있으니 피후원자 입장에서도 좋은 후원자를 만나면 많은 도움을 얻을 수도 있다. 아마 이런 이유들 때문에 기부단체 입장에서는 결연을 통한 후원제도는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모든 장점에도 불구하고 피후원자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결연은 일방적인 관계가 가지는 태생적인 단점이 있다. 피후원자가 경제적인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후원자에게 먼저 사진을 찍어 보내고 이름을 공개하고 주기적으로 후원자에게 안부편지를 보내야 한다. 개인정보 공개를 떠나서 기부금을 받기 위해서는 나의 가난을 상대에게 전시하고 상품화해야 하는 것이다. 경제적인 지원이 간절한 사람은 내 자식과 우리 가족이 처한 고통과 어려움을 어찌 됐건 그럴듯하게 포장해야만 한다. 이런 방식은 도움이 필요한 상대를 나와 동등하며 함께하는 존재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아니라, 오직 연민의 대상으로만 타자화하고 분리하여 계급화하기 쉽게 만든다. 그래서 때론 기부자들과 피기부자들 사이에 돈은 오갈 수 있지만 당사자들은 넘을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진다. “저들은 딱하지만 나와 달라, 오늘 마음속의 천사를 꺼내어 그들에게 선행을 베풀겠어. 나에게 고마워하겠지. 나는 착한 사람이야.” 속내를 조금만 파고들면 이런 각도에서 기부에 접근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지. 슬프지만 위 사례들에서 당시 꽤 많은 사람들이 글쓴이들의 분노에 동의를 표했었다. 나 또한 그동안 이러한 감정의 흐름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았을 것이고. 하지만 이런 의도 아래에서는 기부가 아무리 늘어난다 해도 사회가 통합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분열될 수밖에 없다.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은 너와 나는 다르다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모두 다르지 않다에서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나 같다. 같기 때문에 불평등에 분노하고 서로 외면하지 말고 도와야 하는 것이다. 모두가 한 울타리 안에 함께하기 위해 손을 맞잡는 것이지, 잘난 내가 못난 남에게 철창 넘어 손을 내밀어 시혜를 베푸는 것이 아니다. 그건 진짜 도움이 아니다.


6. 생각 많은 둘째 언니라는 닉네임으로 유명한, 얼마 전에 정의당 입당을 발표한 내가 항상 응원하는 장혜영 감독이 언론과 나눈 인터뷰 기사가 오늘 포털에 올라왔다. 장혜영 감독의 한마디 말이 종일 머리에 맴돌았다.

"정책의 관점을 바꿔야 한다. 장애를 불평등의 문제로 보면 평등한 방향으로 가자고 할 수 있지만, 불행의 눈으로 보면 그렇지 않다. 지금은 장애를 사회적 구조의 문제가 아닌 개인에게 귀속된 불행의 문제로 접근하고 있기 때문에, 정책이 헛돌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실은 우리 사회는 장애뿐만 아니라 가난도, 누군가의 뒤처짐도, 혹은 소수성도, 모두 다 불행의 문제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불행의 문제로 취급해야지만 나의 우월감을 채울 수 있어서, 내가 적어도 지지 않았다는 느낌과 누군가 내 밑에 있다는 생각이 안도감을 주니까, 그래야 멘탈을 조금이라도 붙잡고 살 수 있는 너무 척박한 사회기도 하고 불행이 아닌 구조를 이야기하면 내가 그 불평등에 일조한 것이 되어버릴 것 같아서, 그래서 그런가. 그런 마음을 상정해놓고 베푸는 도움은 주변의 사람들보다 조금은 더 앞서 있다는 느낌을 덧붙여 주니까, 그래서 내 우월적 선의가 부정당하고 싶지 않아서 도움받는 이에게 상처 주는 글을 올리는 걸까. 하지만 여기에서 출발하면 그 어떤 정책도, 기부도, 봉사도, 도움도, 종국에는 아무런 효험이 없다. 이렇게 잘못 공들인 탑은 처음부터 흔들리고 무력해지고 결국은 무너진다. 불공정을 향한 분노를 이야기하려면 타자화된 계급과 편견의 선부터 지워야 한다. 불공정에 대항하는 정의는 감정적인 연민이 아니라 불평등에 대한 논리적인 감각에서부터 적어나가야 한다.


7. 그래도 결연이 주는, 개인 간의 연결감 만이 주는 매혹적이고도 아름답고 슬프기도 한 특유의 힘을 강하게 느낄 때가 있다. 3년 전쯤인가, 아마 5살쯤이었을 것이다. 후원하는 아동이 마찬가지로 연말에 안부 편지를 보내왔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띄어쓰기도 없이 “힘들어하지마세요”라는 짧은 한 문장만이 적혀있는 편지였다. 아무 생각 없이 책상 위에 편지를 던져 놓고, 저녁을 먹으며 미씽이라는 영화를 보고 와서, 눈에 띈 편지를 다시금 펼쳐보고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다섯 살 아이가 힘들어하지 말라고 쓴 그 여덟 글자가 순간 판화를 찍듯이 모양 그대로 내게로 와서 박혔다. 어쩌다 간혹 내가 돈을 악착같이 많이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는데, 그날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어떻게든 돈을 정말 많이 벌고 싶다고, 나에게 주어진 일이란 게 그런 거 아니겠냐고 그날 밤 울면서 생각했다.

작가의 이전글 비건 페스티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