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정근 Nov 11. 2019

나이키는 무늬만 페미니즘?

오늘은 제가 나이키 코리아에 한마디 할까 합니다. 간부든 임원이든 직원이든 아님 지나가다 발가락만 얹어놓으신 분이라도 좋으니 누구 하나는 들어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전부터 제가 여러분께 하고 싶었던 말이 있어서요.

무슨 말이냐, 먼저 기분 좋게 칭찬으로 시작해볼게요. 여러분들이 얼마 전부터 페미니즘을 내세워 열심히 마케팅하고 있는 거 잘 알고 있어요. 육체적 한계와 성역할의 고정관념에 도전하는 강인한 여성들의 모습들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죠. 여성의 몸은 아름다움과 섹시함이 아니다, 근육과 땀과 신체의 단련은 남성의 전유물 만이 아니고 여성의 것이기도 하다, 여성의 몸도 강하다 등등. 여성들을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하며 광고하는 것은 잘 보고 있고 아주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답니다.

그런데 말이에요,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이건 아닌 것 같아요. 그래 놓고 겉과 속이 다르게 물건 팔 때는 정작 성평등에 대해 모르쇠 하는거 같아서요. 마케팅만 번드르르하게 해놓고 실상은 이렇게 성차별하면 안되는 거 아녜요?





무슨 얘기냐고요?

여러분들이 팔고 있는 운동화 말이에요.

제가(아, 저는 참고로 남자입니다) 나이키 매장에서 운동화를 구경할 때 화딱지가 확 올라오는 지점이 있는데요, 지금부터 한 번 잘 들어 보세요.

누구나 매장에 들어가면 눈에 끌리는 대로 이쁜 물건 앞으로 발걸음이 저절로 가게 되죠. 일단 저는 그렇거든요. 입구에 들어서면서 신발 매대를 멀리서부터 쓱 바라보며 눈에 들어오는 신발 쪽으로 다가가요. 와, 역시 나이키에 괜찮은 신발 많네요. 이것도 좋고 저것도 맘에 드네요. 점원을 찾습니다.

이거 혹시 사이즈 270으로 신어볼 수 있나요?

아, 고객님, 이건 여성용이구요, 남성은 저쪽입니다.

아? 에에, 네, 그럼 큰 사이즈 안 나와요?

네, 남자 사이즈는 없습니다, 고객님.

(하아아아, 딥빡)


대체 제 마음에 드는 이쁜 운동화들은 왜 죄다 여성 제품인가요? Women 라인들은 애초에 큰 사이즈를 국내에는 안 들여와요. 아예 없다구요. 그렇다고 제가 좋아한다는 게 뭐 엄청 핫핑크핑크초블링블링한 것도 아닌걸요. 첨부해드린 사진 보시면 아시겠지만 뭐 핑크가 살짝 거든 정도? 쬐끔만이라도 화려한 무늬가 들어가거나 형광 컬러나 핑크, 옐로 같이 밝은 색상이 곁들여져서 제가 꽂히는 신발들은 언제나 빼박 여성용이에요. 제 눈에는 별로 여성용 같지도 않은 것들까지 다 여성 사이즈로만 나오대요. 대체 이걸 빼고 뭘 고르란 말인지 어이가 상실입니다.

남성 매대 쪽에는 무채색 중심으로 블랙, 그레이, 네이비, 화이트 등의 색상 위주로 진열해놓고 그쪽에 가서 보라고 하네요. 근데 난 그런 색깔 별로거든요? 반대로 여성 매대에서는 네이비나 블루 같은 신발은 많지가 않아요. 그건 또 남성의 색상이라고 생각하나 봐요. 그러니 여성의 입장에서는 전통적으로 남성들의 것이라고 여겨지는 색상의 신발들은 모델 종류가 적고 선택의 폭이 좁아지죠.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파란색을 좋아하는 여자들이 다양한 스타일의 파란 나이키 운동화를 사기가 힘들다고요.

그리고 말인데, 발 사이즈가 큰 여성들도 있어요. 발이 큰 여성들은 무얼 신어야 될까요? 또 역으로 발이 작은 남성들은요?


최근 한국 나이키에서도 성별에 상관없이 신발과 옷들의 색상이 조금씩 다양해지고 있다는 건 물론 알아요.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시도라고 생각해요. 근데 내 말은, 그냥 모델별로 전 사이즈를 갖다 놓으면 좋잖아요. 적어도 운동화만큼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옷은 품이 달라서 같은 디자인이라도 성별의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운동화는 그렇지 않다는 걸 나보다 당신네들이 더 잘 알잖아요. 아니 수요가 적어서 오프라인 매장마다 재고를 갖다 놓기가 힘들다고 하면 그건 백번 이해할게요. 그런데 소량씩이라도 홈페이지에 올려놓고 인터넷으로 파는 것도 그렇게 힘든가요? 나이키 코리아 공홈을 보면 여성은 220에서 290, 남성은 230에서 330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서 위아래 치수들은 원래부터 재고가 없어요. 그러니 여성은 230에서 260, 남성은 250에서 295가 실질적으로 판매하는 사이즈예요. 입고 알림 신청을 해놓는다 해도 제가 원하는 핑크색이 들어간 270미리 여성용 런닝화 한 족이 들어왔단 소식은 들을 리 없다는 거죠.


제 말대로 갖다 놓으면 그거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될 거 같냐고요? 전 이런 수요가 적지만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숨어 있는 수요죠. 취향을 강요당해서 원하는 색상을 사지 못하는 사람들이 꽤 있어요. 더 많이 팔고 싶지 않나봐요. 젠더의 경계를 지우고 넘나들며 시장의 폭을 넓히는 마케팅이 이미 몇 년 전부터 대세인데. 미국 나이키만 해도 그렇지 않다고 들었거든요. 지금 당신들 너무너무 올드한 거 알죠? 언제까지 십 년 전 옛날 구린 방식으로 경영하시려고요.


아, 그게 아니라 제 취향이 특이하다고요? 여자 같다고요? 내 취향을 당신들 잣대로 맘대로 평가하는 것도 기분 나쁘지만,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봐요. 그렇게 얘기할 거면 최소한 페미니즘 장사는 하지 말았어야죠. 성평등이 새로운 돈줄이고 광고하기도 그림이 괜찮아 보였겠죠. 근데 그러기엔 여러분들이 뒤에서 재생산하고 있는 고착된 성역할이 너무 후져요. 앞에서는 여성들은 강하다고 온통 떠들어놓고, 여성들의 색은 당신들이 정한 대로만 따라가야 되나요? 여성을 상징하는 색깔이 따로 있고, 남성들만 좋아하는 색깔이 따로 있나요? 성별에 따른 색깔은 대체 누가 정한 거예요? nike CEO님이? 아님 무슨 조던이나 호날두가?(아, 그래서 호날두 축구화만 오렌지색인가) 어려서부터 여자는 빨강, 남자는 파랑, 이렇게 주입하는 고정관념은 이제 깨부술 때도 되었잖아요. 촌스럽게 똑같은 디자인에 하나는 핑크를 넣어서 여성용, 또 하나는 블루를 넣어서 남성용으로 출시. 뭐가 여성적이고 뭐가 남성적인 건지 난 정말 궁금합니다. 광고에서 여성들이 뛰고 던지고 점프하고 구르면 뭐하나요, 양성을 분리해서 세일즈 하는 정책이 기존의 잘못된 성역할과 성별 기호를 답습하고 더 강화하고 있는데요.


얼마 전에 나이키 매장에 우연히 들어갔다가 아주 화려한 운동화, 당신들이 이백 프로 여성적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맥스 90을 신고 있는 여성(아마도 여성으로 패싱 되는) 점원 분을 봤어요, 웃픈 건 말이죠, 그분의 스타일이 과거의 전통적인 여성성을 추구하는 모습이 전혀 아니었다는 거예요. 아주 멋졌죠. 작은 체구지만 헤어는 염색한 숏컷에 주렁주렁한 쥬얼리를 달고 검은색 티셔츠에 진을 입고 있는 모양이 '난 특정 성별로 패싱 되고 싶지 않아요'라는 느낌을 뿜뿜하는 분이었어요. 응대 중에 그분이 신고 있는 눈에 띄게 화려한 바로 그 신발을 쳐다보니까 제 시선을 느끼고는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저는 사실 이런 신발 신는 거 별로 안 좋아해요. 흑흑흑.’ 그러니까 누구겠어요, 나이키 코리아 당신들이 신겼겠지요. 여성 점원이라고 바로 여성용 신상 맥스를 쏘옥. 바로 옆 벽면에서는 박나래 씨가 기존의 틀과 선입견을 깨기 위한 무언의 몸짓을 하고 있는데, 매장에서 굴러가는 일들을 말로 굳이 옮기자니 참으로 엑스엑스엑스쩜쩜쩜하다고밖에 못하겠네요. 얘기 들으니 스스로가 생각해도 좀 그렇다? 그죠?




우리 진짜 하나만 합시다. 패션업계에서 후진 젠더 관념으로 돈 버는 브랜드가 한둘도 아니고 그것만 가지고 뭐라는 건 아니에요. 그런데 할 거면 너무 속보이지 않게 한쪽만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머 새로운 걸 하고 싶음 제대로 하시든지요. 페미니즘으로 은근슬쩍 여성들 지갑만 털어가시려고요? 초거대 자본은 낯짝이 두껍고 그만큼 초두껍 낯짝이니까 돈을 긁어모았다는 거야 익히 알고 있고, 여러분께서 부끄러울 일이야 이보다 더한 것도 수두룩 빽빽이 많다는 것도 말해 모해 잘 알고 있지만요, 그래도 조금은 매너 있게 가면 좋을 거 같아요. 대답해주세요, 나이키 코리아는 무늬만 페미니즘인가요? 그런가요? 네?




덧. 글을 쓰고 나서 나이키 고객센터에 전화 문의한 결과, 여성 전용으로 발매된 신발들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260미리 이하로만 수입하기 때문에 큰 사이즈 입고 요청을 해도 개별적인 수입은 어렵다는 답변을 들었습니다. 또 여성용 운동화는 똑같은 사이즈라도 남성에게는 발볼이 좁고 높이가 낮을 수 있어서, 남성이 신으려면 치수를 약간 크게 사야 한다고 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기부는 좋은데 결연은 불편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