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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정근 Dec 05. 2019

욕을 잘하는 방법

욕 올바르게 연습하기

욕을 정말 잘 쓰고 싶다. 그래, 바로 그 비속어 욕설 말이다. 스스로가 공자님이 아닌 이상 살면서 사람이 욕을 안 쓰고 살 수는 없지 않나.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레 이전보다야 훨씬 덜 쓰게 되고 남들이 있는 자리에선 사용하지 않지만, 그래도 간혹 욕이 튀어나오는 상황은 분명히 있다. 욕을 실제로 입 밖으로 내는지 여부와 무관하게 욕이 턱밑까지 차오르며 뱉고 싶단 욕망이 엄습하는 순간은 나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나 존재할 것이다. 그러니 욕은 언어에 상관없이 인류의 역사에서 항상 다종 다양하게 발전하며 파생해왔고 혀의 움직임과 바늘과 실처럼 함께해 왔던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욕을 쓰는 것이 조심스러워졌다. 그동안 써왔던 욕들이 어디서부터 유래한 말들이고 진짜 속뜻이 본디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누구를 지칭하는 말인지를 점차 자각하게 되면서 욕설을 뱉다가도 주저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입에 찰싹 달라붙어 별생각 없이 내뱉곤 했던 병신은 욕의 대상을 장애를 가진 사람에 빗대어 비하하는 말이고, 개새끼 같은 욕은 동물은 인간보다 천하고 열등한 것이라는 생각에서 나온 표현이다. 지랄염병, 눈이 뒤집혔네, 입에 거품을 문다 같은 표현도 실은 어떤 질환을 앓는 사람들을 대놓고 모멸하는 말들이다. 씹이나 좆 같은 말은 상대를 특정 성별의 생식기에 저속하게 비유한 것이고 쌍놈 같은 말도 사람의 천한 신분을 구분하는데서 나온 표현이다. 욕의 바탕에는 사회 구성원들을 정상과 비정상, 우월함과 열등함의 범주로 나누고 그중 제일 뒤처지고 못난 것의 요소에 욕을 듣는 상대를 빗대고 저주하는 차별의 생각이 깔려 있다. 누구나 화가 나면 상대에게 악담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또 하는 것이 필요한 상황도 있으며 나의 정신승리를 위해 해야만 하는 순간도 있다고 여기지만, 적어도 내가 쓰는 욕이 무엇을 비정상과 열등의 대상으로 삼는지는 알아야 한다. 그 기준이 차별과 멸시에 근거한다면 이제는 그 욕들을 재고해봐야 되지 않을까. 무심코 내뱉는 욕을 듣고 주변에 누군가가 상처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욕을 쉽게 쓸 수가 없어졌다. 욕설이 세계를 내 마음대로 가르고 재단해버린다면 그 욕은 욕에서 멈추고 허공으로 사라지는 순간의 배설이 아닌, 함께 사는 사회를 찢고 이야기 바깥에 위치한 타인의 자존감에 균열을 내는 톱날과 망치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곰곰이 욕을 하나씩 소거해 나갔다. 욕설을 하다가 멈칫하게 만드는 말들을 의식적으로 머릿속에서 없애고 쓰지 않기로 했다. 그러자 최종적으로 하나의 욕이 남았고, 그것은 바로 쓰레기였다. 


이런 쓰레기 같은 놈아, 저 놈 저거 완전 운전 쓰레기네. 


그동안 쓰던 모든 욕을 쓰레기로 치환해서 표현하니 욕을 마음껏 해도 부담이 없어졌다. 적어도 쓰레기는 누가 봐도 나쁜 거고 차별을 받을 만한 대상은 아니니까. 더구나 나는 요새 쓰레기 문제에 관심이 많고 쓰레기가 정말로 싫다. 아니, 진짜로 증오하는 수준이고 그러니 정말 딱이다. 


그런데 모든 욕을 쓰레기로 쓰다 보니 또 문제가 생겼다. 쓰레기로는 나의 분노를 다 담을 수가 없는 상황들이 발생하는 것이다. 우사인 볼트가 백 미터 결승점을 통과하는 속도로 단전 아래서부터 머리 끝까지 치받아 올라오는 격정적인 분노를 표현하기에 쓰레기라는 단어는 뭔가 좀 약했다. 내가 쓰레기를 진짜 싫어하긴 하지만 쓰레기라는 말이 주는 감정은 뭐랄까, 조금 mild 하고 moderate 한 느낌이라 이 폭발하는 다이너마이트를 달래기에는, 마치 박보검을 보고 좀 생겼네라고 하거나 송가인한테 쟤 노래 좀 하는구나라고 미지근하게 인정하는 칭찬처럼 몇 끗발이 부족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또 궁리했다. 어떻게 해야 나의 치솟은 화를 적절하게 표현하면서 제삼자를 해치지 않는 욕을 할 수 있을지. 고민 끝에 욕받이를 향해 충분히 감정을 분출하면서 내가 만족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 중 하나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첫째는 상대를 쓰레기보다 못한 사물에 비유하는 것이고, 둘째는 상대를 극한의 상황에 밀어 넣어 대입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방법에도 문제는 있는데, 욕이 쓸데없이 길어진다. 적어도 하나 이상의 형용사나 수식어가 붙게 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뭐가 많이 달려서 욕이 길어질수록 나의 만족감은 급상승한다. 아예 두 가지 방식을 결합하면 더 기쁘다. 길이와 통쾌함이 비례하는 것이다. 이러한 태생적인 단점 때문에 이 방법은 욕이 가진 본질과 결정적으로 상충하게 된다. 욕이란 본능적인 것이 아닌가. 앞서 썼듯이 우사인 볼트가 막판 스퍼트를 하며 뛰어오고 타이슨의 핵주먹이 옆구리를 떠나 출발했는데 이리저리 재고 생각할 시간이 어딨겠는가. 욕이란 욕이 발생하는 상황과 발화 시점의 시간차가 짧을수록 우수한 것이다. 그 사이에 문장을 구성할 여유란 없다. 그래서 나는 또다시 결론을 내렸다. 연습하기로, 욕설계의 주크박스이자 아웃사이더가 되기로. 


오늘도 나는 원장실에 앉아서 둔한 혀를 동서남북으로 굴려가며 만들어놓은 욕을 되뇌어 본다. 일빵빵패턴회화를 외우듯이, 근의 공식을 처음 배우는 중학생처럼 중얼거린다. 언제든 기계적으로 뽑아쓸 수 있게, 생각 없이 혀가 자동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척수 반사급의 반응속도를 달성해보기로 한다. 


길바닥에 뱉어놓는 가래침보다 못생긴 놈아.

에스컬레이터 뒤에 서서 내 똥방구나 처마실 놈아.

야잇 노상 방뇨하다 꼬추가 얼어서 썩어빠질 놈아.

우동사리 쫄면사리가 좌뇌 우뇌에 쌍으로 박혀 있는 쉐히야.


아, 아니다. 말을 곱게 쓰는 착한 사람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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