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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의 축구 May 07. 2016

브라질의 초록 악동들, 팔메이라스

브라질 상파울루, 파카엥부 스타디움

어느 따분한 여행기의 시작과 같이, 나도 어느날 멀쩡히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웠다. 


그리곤 브라질 상파울루로 가는 24시간짜리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목적은 분명했다. 우유니 사막도, 파타고니아도 아닌 남미의 축구를 직접 내 눈으로 보고 싶었다. 3개월의 일정을 온전히 현지 축구경기 날짜에 맞춰 짰다. 제발 다시 생각해 보라고 울먹이던 여자친구를 공항에 내버려 두고 매정하게 혼자 비행기에 올랐다. 돌이켜보면 천국으로 가는 계단에 오르는 순간이었다.


24시간 비행 직전 인천공항에서



축구는 남미를 기준으로 자전한다


사춘기의 나는 엉뚱하게도 축구 응원문화에 심취해 있었다. 이탈리아 울트라스를 마피아 영화 보듯 찾아봤고, 영국 훌리건들의 사건사고를 여느 축구 기사보다 더 재미있게 접했다. 그중에서도 제일 가슴을 뜨겁게 만든 건 역시 남미 축구의 응원문화였다. 허름한 복장에 이상한 벙거지 모자를 쓴 사람들이 빽빽하게 서서 미친듯이 응원을 하는 모습. 환상적인 멜로디의 응원가들과 화려한 응원도구들.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지는 그 열정 가득한 축구를 유튜브가 아닌,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축구의 신 마라도나가 태어난 곳. 소크라치스는 독재 정치를 반대하는 머리띠를 두르고 경기에 나섰으며, 괴짜 골키퍼 이기타는 전 세계를 흥분시킨 아이콘이었다. 지금은 유럽축구가 전세계를 호령하고 있다고 하지만 내게 축구의 뿌리는 언제나 남미다. 끊임 없이 등장하는 유망주들과 장기 경기침체에도 항상 가득찬 관중석. 축구는 그렇게 남미를 기준으로 자전하고 있다.


면면이 압도적인 남미 축구 레전드들



브라질 축구 역사의 심장


브라질 축구 역사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파카엥부 스타디움' 근처에 있는 호스텔을 첫 숙소로 잡았다. 상파울루 공항에서 숙소까지 가는 데만 정확히 4시간이나 무거운 배낭을 메고 거리를 헤맸다.


파카엥부는 브라질의 축구 영웅 소크라치스가 그라운드를 누비던 축구 성지다. 숙소에서 공동묘지를 지나 다시 으슥한 동네 안에 위치한 허름하고 오래된 경기장이었다. 일단 아무 생각 없이 파카엥부 스타디움 안에 있는 축구박물관을 찾았다. 나름 신경을 많이 쓴 엄청난 미디어 아트들과 역대 브라질 국가대표에 대한 기록들이 그럴듯하게 전시돼 있었다.


37,73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파카엥부 스타디움
그리고 박물관
브라질 축구의 역사
감동적이었던 미디어 아트
'의사(DOUTOR)' 소크라치스


박물관을 돌아보고 다시 경기장으로 나오자 이상한 풍경이 펼쳐졌다. 팔메이라스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꽤 모여 있었고 경찰차들이 속속 배치되고 있던 것. 그렇다. 오늘은 상파울루 연고팀 중 하나인 팔메이라스의 매치데이였다. 상대팀은 무려 브라질 최고 명문팀 CR 플라멩구. 계획에 없던 일정이었지만 이런 경기를 놓칠 순 없었다. 당장 주머니에 있는 모든 돈을 털어 일반석 티켓을 구입했다. (참고로 브라질 대부분의 클럽은 응원석 티켓을 일반인에게 판매하지 않는다)


티켓을 손에 쥐자 바로 흥분감에 휩싸였다. 들뜬 마음을 진정시키며 경기장 주변을 구경하기 위해 외곽을 한 바퀴 돌았다. 엄청난 숫자의 경찰들이 곳곳에 위치해 있었다. 붉은색 유니폼을 입은 플라멩구 원정 서포터들이 도착하는 장면도 목격했다. 굉장히 많은 숫자였는데, 경찰은 그들 모두에게 일일이 벽을 보고 서도록 압박했다. 마치 범죄자를 다루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내가 신기한 듯 구경하자 플라멩구 서포터 중 한 명이 매섭게 노려봤다.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 서둘러 그 자리를 피했다.


화려했던 박물관과 달리 경기장 외곽은 으슥하고 습했다. 팔메이라스 유니폼을 입은 불량배들이 불법주차 차량들에게 돈을 뜯어내는 모습도 보였다. 또 알콜 반입이 금지되어 있어서인지 술을 파는 잡상인들과 거리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사람들이 즐비했다. 


돌아다니다 보니 경기시간이 다 되어 나도 스타디움으로 입장했다. 첫 경기라 긴장을 많이 했지만 기분 좋고 가슴이 벅차 올랐다. 내 눈으로 브라질 축구를, 그것도 현장에서 직접 보게 되다니!


으슥한 경기장 외곽의 풍경들



상파울루의 초록색 악동들


평일이라 그런지 일반석은 한산했지만 응원석은 엄청난 인파로 가득찼다.


팔메이라스의 서포터들은 브라질 내에서도 엄청난 악행으로 소문이 자자하다. 지역 라이벌인 코린치안스와의 끊임 없는 폭력사태는 브라질의 큰 사회적 문제가 되기도 했다. 그들의 문제가 얼마나 고질적인지 팔메이라스 서포터 집안과 코린치안스 서포터 집안 남녀 간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을 그린 브라질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 결혼하다 (2005)>가 제작되기도 했다.


초록색 유니폼을 입은 서포터들의 응원이 시작되자 경기장의 열기는 금세 달아올랐다. 그중 몇몇은 철장 위에 올라가 광란의 응원을 이어갔다. 한 명도 빠짐 없이 모든 관중이 경기장이 무너져라 뛰었다. 꽤 추운 날씨였는데도 자신의 웃옷을 벗어돌리며 팔메이라스의 승리를 외쳤다.



한편 피치에는 낯익은 선수가 눈에 띄었다. 내가 지지하는 K리그 팀 수원삼성에서 얼마 전까지 뛰던 에벨톤C가 플라멩구에서 주전으로 뛰고 있었다. 너무나 반가웠다. 평소 한국에서 응원하던 선수를 지구 반대에서 다시 만나다니. 비록 상대팀 선수라 크게 응원하진 못 했지만 이날 에벨톤C는 수원에서처럼 빛나는 플레이를 보여줬다.


팔메이라스는 경기 초반, 뜻대로 풀리지 않는 흐름에 고전했다. 전반전에만 두 골을 얻어맞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홈팀의 응원소리는 경기의 그런 흐름과는 상관 없어보였다. 점점 더 큰 소리로 응원가를 불렀다. 형편 없는 경기력으로 전반을 마감했지만 서포터들의 응원은 멈추지 않았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는 응원열기


하프타임이 되자 관중석과 피치 사이에 사람들이 긴 줄을 섰다. 노후된 스타디움 탓에 화장실을 사용할 수 없어서 관중석과 피치 사이에 재래식 간이 화장실을 설치해둔 까닭이다. 조금 냄새가 나긴 했지만 오히려 운치있었다. 이곳에 뭔가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경기 결과와 상관 없이 풀타임을 미쳐 있는 서포터들과 노후된 역사적인 경기장, 유니폼을 입은 불량배들과 냄새나는 관중석. 이 모든 것들이 어우러지자 순간 내가 남미에 와 있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냄새 마저 운치있게 느껴졌던 간이 화장실


팔메이라스는 홈팬들의 엄청난 응원을 등에 업고 마법 같이 후반에 두 골을 만회하며 2:2 동점으로 경기를 마쳤다. 경기가 끝나자 나도 땀을 많이 흘려서 목이 너무 말랐는데, 가져온 모든 돈으로 티켓을 사느라 수중에 한 푼도 없는 상태였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갈증에 쓰레기통에 버려진 남은 콜라 몇 병을 주워 먹었다. 이것 또한 기분 좋았다. 브라질에 왔으니까.



팔메이라스는 2010년부터 2014년까지 새 경기장을 구축하기 위해 임시로 파카엥부 스타디움을 홈구장으로 사용했으며, 현재는 완공된 최신식 경기장인 '알리안츠 파르크'를 홈으로 사용 중이다.



글, 사진 - 구자욱 (광고제작자. 수원블루윙즈 지지자 그룹 아발란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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