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ADHD의 슬픔을 읽고
얼마 전 정지음 작가의 '젊은 ADHD의 슬픔'을 읽고는, 슬픔을 마주하려는 용기에 대해 자주 생각하고 있다. 사실 인터넷을 떠도는 극악의 '회피 성향'을 나도 어느 정도는 가지고 있음을 보다 확실히 알게 된 것이다. 게다가 내 인생에서 슬픔이나 괴로움은 당연하게도 회피 선순위를 차지한다.
나는 날 괴롭고 슬프게 하는 것들을 떠올리면, 그 천벌 받을 것들이 밉고도 화가 난다. 그에 대해 생각을 하다 보면 당연히 기분이 더 나빠지게 마련이길래, 어느 순간부터는 '그런 것들' 하고 한켠에 묻어버리고는, 아예 생각하지 않는 방법을 택했다. 바쁘게 돌아가는 삶의 시곗바늘은 매 순간 나의 회피를 정당화해주었다.
돌아보니, 그렇게 묻어둔 비극의 무덤 안에는 또 다른 나의 아이가 슬픔을 소화하느라 하루 종일 바빴다. 껍데기인 내가 무심코 휙 던지는 날카로운 슬픔의 조각들을 열심히 분리수거해서 몇 번이고 무디게 만드느라 늦은 밤 잠들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 비극의 무덤이 너무 커져버리면, 아이는 완전한 파업을 선언했다. 그럼 나는 뻘쭘하게 그의 옆으로 다가가, 눈물 쏟을 힘조차 없는 아이와 멍하니 앉아 그저 위로하는 것 외에는 할 줄 아는 것이 없었다.
도망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기억들, 외면해서는 없어지지 않는 일들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모든 일이 슬픔이 되는 것은 아니듯, 어떤 아픔들은 가벼운 생채기로 흘려보내면 그만이 아닐까, 글로 적어버리면 마음속에서 해소되어 공기처럼 사라질 일들이지 않을까, 하면서.
이제는 슬픔을 마주해보기로 한다.
목표는...
누구도 날 슬프게 할 수 없어. 가 아닌, 당신이 날 슬프게 해도 난 다시 괜찮아질 거예요. 가 되는 것.
최소한 내가 나의 아이를 괴롭히지는 않는 것.
아래는 책의 몇 문단을 옮겨온 것이다.
글을 쓰기 위한 최소한의 여건은 사람마다 다를 테지만, 내 경우엔 '멋짐을 포기하는 태도'였다. 글에는 별다른 장비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가짐이 곧 장비가 되었다. 나는 예쁜 글이나 화려한 글을 좋아했지만 그렇게 쓸 수는 없었다. 감수성이나 실력 면에서 가난한 내가 취할 수 있는 강점은 그저 무식한 솔직함 하나인 듯했다.
모든 조건은 불가능해 보였지만, 그래도 적합한 사람 하나를 알긴 알았다. 그는 본인의 결심만 선다면 요구받은 것보다 내게 더 잘할 수 있는 사람이다. 나를 최고 등급의 행복으로 적시고 돈으로는 절대 살 수 없는 위로와 응원을 퍼부어 줄 수도 있다. 그가 나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은 어마어마하게 많다. 그렇게 멋진 사람이 지금껏 나를 외면했던 이유는 내가 그를 원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 자체를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오히려 사는 내내 그 애를 배척하고 흠잡아 오지 않았던가?
미안한 마음을 담아, 들어도 들어도 직접 발음하긴 어색한 이름을 불러 본다.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지만 명치에 무언가 차오르는 느낌이 든다. 그건 설명할 수 없는 종류의 유대감과 충족감이다.
내가 부른 이는 나다.
결국 나에겐 나만이 유효하고 고유하다. 나는 너무 나답게 아름다워서 모든 타인에게 해석에 대한 실패를 주었다. 최후의 오해들을 아우르는 해답은, 그것들을 아예 풀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오로지 내게만 나를 해명한다. 가끔은 그조차 필요 없다.
하릴없이 삐걱대는 나날도 전부 춤이었다.
젊은 ADHD의 슬픔, 정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