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광고 하나만 하고 이야기를 진행해보겠습니다.
새해를 맞아 색보정 수업 소식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3월에 색보정 기본반과 심화반 수업을 진행해보려고 합니다.
코로나19로 인해서 수강생 수는 3명으로 제한합니다. 오붓하게 수업을 진행해볼 수 있겠죠.
대신 수업 수를 늘려서
수요일 저녁, 토요일 오전과 오후, 일요일 오전과 오후 이렇게 수업을 진행하려고 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링크를 참고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려요.
현재 심화반은 모집이 마감되었습니다.
기본반 수업 모집 안내
https://cafe.naver.com/teamcsraca/249
르네상스 미술의 최대 발명품이라면 원근법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원근법에도 몇 가지 종류가 있지만, 원근법 하면 떠오르는 한 점 투시 원근법을 가지고 먼저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선 원근법이라고도 합니다. Linear Perspective라는 영어 단어를 봤을 때 선형 혹은 선 원근법이라고 많이들 이야기하는데요. Perspective의 어원이 라틴어인 perspicere 투과하여 보다라는 뜻에서 유래했다고 하고, 소실점과 같은 개념과 같이 이야기하기에는 투시 원근법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것 같아서
이번 내용에서는 투시 원근법이라는 표현을 쓰려고 합니다.)
투시 원근법은 영상을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도 고민해 볼 거리가 많은 개념입니다.
그리고 원근법이 가진 효과와 한계 모두 미술을 포함해서 영상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만큼,
좀 더 깊이 파고들만한 가치가 있는 개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특정 개념을 잘 알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 만들어지고 발전해 왔는지에 대한
역사를 보는 것만한 것이 없지 않나 싶습니다.
투시 원근법은 브루넬레스키가 처음 만들었다고 합니다.
금세공사에서 시작해서 조각가, 건축가까지 이른 대단한 사람이죠.
우리에게는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돔을 완성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원근법의 원리를 완벽하게 알고 있다는 점을 자랑하기 위해서
산 조반니 세례당을 그려서 거울에 비추어서 맞춰보았을 때 딱 들어맞는 것을 보여주는 실험을 했다곤 합니다.
유튜브에 가상의 실험을 한 영상이 올라와 있어서 가지고 와봤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2BCdA23Kpg
이런 원근법은 건축물이 완성된 형태를 보여주고자 하는 목적에서 발명했다고 합니다.
그전까지는 모형을 만들어서 보여줬어야 했는데
굳이 모형을 만들지 않고도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를 고민하다가 생각해낸 방법이라는 것이죠.
옛날 사람들도 멀리 있는 것이 작게 보인다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이를 정확하게 측정하고 그렸다기보단, 눈대중으로 그려왔던 것이죠.
아래 로마시대의 벽화를 보면 멀리 있는 건물이 멀어 보이긴 하나
실제적인 공간이라는 느낌은 크게 들지 않습니다.
어딘가 모르게 상상 속의 공간이라는 느낌이 들기도 하죠.
이보다 뒤의 시기인 중세에 그려진 <베리공의 매우 호화로운 기도서>에 있는 그림을 봐도 어색함이 느껴집니다.
아래 그림은 3월의 삽화인데요. 가까이 있는 사람이 크고 멀리 있는 사람이 작게 그려졌다는 점이나
개별 요소를 뜯어보면 사실성이 마냥 떨어진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하지만, 전체적인 공간을 놓고 보면 뭔가 어색함이 많이 느껴지죠.
실제 하는 공간을 보고 그렸다는 생각보다 임의로 그린 것 같다는 느낌이 더 많이 듭니다.
이렇게 공간에 대한 어색한 표현은 르네상스 초기의 화가로 뽑히는 조토 디 본도네까지도 이어집니다.
아래 그림은 조토의 걸작으로 불리는 <애도>입니다.
천사와 예수의 제자들의 표정이 좀 더 사실적이 되었다는 점 등에서
새로운 시대를 연 작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여전히 공간의 표현에서는 어색함이 보입니다.
하지만, 브루넬레스키는 앞서 봤던 그림들과 달리 공간을 체계적으로 분석해서 하나의 소실점을 만들고,
이에 따라 공간을 정교하게 만드는 방법을 고안했습니다. 건축가 다운 접근이죠.
이런 내용들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던 알베르티가 회화론에서 그 방법에 관해서도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역시나 브루넬레스키와 친했던 마사초가 그림에서 최초로 원근법을 구현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마사초의 성삼위일 체는 깊이감에 따라서 여러 단계로 공간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림을 보면서 아래와 같은 공간을 상상하게 되겠죠.
이처럼 원근법을 사용하게 되면서 2차원 평면에 깊이를 표현할 수 있게 되면서
3차원 공간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고, 실제로 보는 것처럼 묘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보는 것 같은 그림, 이것은 놀라운 변화였을 겁니다.
그 뒤로 수많은 화가들이 이런 깊이감을 보여주기 위한 그림을 엄청나게 그려내기 시작합니다.
다만, 투시 원근법 자체가 그리 쉬운 기술은 아니었던지라,
완성도가 모자라거나 원근법에 매몰된 그림들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아쉬운 완성도를 이야기할 때 많이 언급되는 그림은
곰브리치 미술사에도 나오는 파올로 우첼로의 <산 로마노의 대승>일겁니다.
특히나 그림의 좌측 하단에 쓰러져 있는 시신과 땅에 떨어진 창들의 방향은 작위적이라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원근법을 사용해보기 위해서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죠. 게다가 멀어질수록 작아져야 할 텐데 이런 부분도 놓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프라 카프네 발레의 수태고지를 보면 원근법을 보여주고자 하는 목적이 엄청나게 강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의 주인공인 성모 마리아와 천사가 눈에 잘 안 들어올 지경이죠.
(수태고지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마리아가 성령에 의하여 잉태할 것임을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알린 일' 이라고 나와있습니다. 성모영보라고도 하는데요. 그냥 우리말로 풀어서 이야기해 주는 것이 이해하기 좋다고 생각하지만, 그림 제목이 길어지는 게 싫어서인가 대부분 수태고지라고 번역하더라고요.)
라파엘로의 스승이기도 한 피에트로 페르지노의 열쇠의 전달에서도
원근법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제의 전달을 위해서라기에는 원근법의 사용이 꽤나 과한 느낌이 들기도 하죠.
새로운 관점과 이를 보여줄 수 있는 기술의 발명, 이것은 화가들을 엄청나게 자극했을 겁니다.
이렇게 조금 과해 보이는 원근법의 초창기 사용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겠죠.
게다가 인문주의의 부활, 주체가 신에게서 인간으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인간이 발명한 원근법으로 사람이 실제로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을 주게 되는 방법.
이를 제대로 구현해낼 수 있다는 자부심이 엄청났을 것 같은데요.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좋은 공간, 혹은 성스러운 공간을
자연적이기보단 인위적인 원근법이 적용되는 공간으로 표현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위에서 본 두 개의 그림에서도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했다는 소식을 듣는 공간과
베드로가 천국의 열쇠를 받는 장소 모두 자연적이기보단 인공적인 느낌이 나는 공간이죠.
특히 이런 모습은 원근법이 확립되는데 크게 기여한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그림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그가 그린 '이상 도시'라는 그림은 원근법 그 자체를 보여주는 그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죠.
채찍질 당하는 그리스도 역시 신기한 그림입니다.
앞에 있는 세 명의 정체도 모르거니와 왜 서있는지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그림이죠.
왜 작게 뒤쪽에 그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그림에서 채찍질 당하는 그리스도가 있는 공간은 원근법이 적용된 내부 공간입니다.
물론 이런 노력들이 있었기에 원근법은 계속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르네상스 3대 거장들 역시 이런 원근법을 정말 잘 사용했죠.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 학당이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심판을 보면
소실점의 끝에 중심인물을 두어서 시선을 집중시키면서도
뒤로 창을 뚫어놓아서 마치 후광이 있는듯한 효과도 주고 있습니다.
앞서 본 그림들과 비교해보면 3대 거장이라는 표현을 괜히 듣는 것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물론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에는 뼈를 깎는 노력에
선배들이 이전까지 해온 수많은 시행착오들이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당시에는 원근법이 그랬던 것처럼
새로운 형식과 이를 뒷받침해 주는 기술이 생기면 써보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인가 봅니다.
이런 점은 현대의 영상에서도 똑같이 적용되는 부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수많은 사례들이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는 것은
비메오라는 플랫폼의 시작을 알렸던 Move와 같은 영상이나
모션 랩스의 유행을 알렸던 Watchtower of Turkey와 같은 영상입니다.
https://vimeo.com/channels/staffpicks/27246366
https://vimeo.com/channels/staffpicks/108018156
수많은 영상 작업자들이 이를 따라 하면서 많은 노하우들을 쌓았고,
이를 활용한 수많은 영상들이 나오기도 했었으니까요.
그 외에도 짐벌이나 드론과 같이 새로운 기술을 이용한 장비가 나왔을 때,
혁신적인 소프트웨어 등이 나왔을 때 이 분야의 많은 사람들이 이런 변화를 따라가기 위해서 노력하곤 합니다.
다시 돌아와서 원근법으로 인해 얻을 수 있는 깊이감의 추구 역시
미술사, 그리고 사진, 영상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이어져온 방향성 중에 하나가 아닌가 싶습니다.
날 수 없는 사람이 결국 비행기 등을 이용해서 하늘을 날게 된 것처럼
인간은 어떤 한계를 인식하면 그 한계를 넘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 같습니다.
평면일 수밖에 없는 벽, 캔버스, 종이 등의 매체에
평면 이상의 깊이감을 보여주는 이미지를 만들고자 하는 노력도 이와 같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이를 위해서 깊이감이 잘 보이는 구도를 잡아서 종종 사용하기도 하죠.
앞서 보았던 르네상스 전후의 회화 이후에도 이런 구도는 엄청나게 많이 사용되곤 합니다.
마인데르크 호베마의 미델하르니스의 가로수길이나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등의
작품을 보면 깊이감을 정말 아름답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삼국사기에 황룡사 벽에 그린 노송이 실물 같아서 새들이 날아들다 부딪혀 죽었다는 솔거의 일화가 있죠.
그리스의 제욱시스와 파라시오스의 일화도 재미있습니다. 둘은 라이벌이었던 모양인데요.
제욱시스가 그림을 가리던 막을 들추고 포도 넝쿨 그림을 공개하자
새들이 날아들어서 포도를 먹으려다 부딪혔다고 합니다.
이런 자신의 그림을 뽐내면서 파라시오스 그림의 막을 걷어보라고 했더니
사실은 이 막이 그림일세라고 하는 바람에 제욱시스가 패배를 인정했다고 하는 이야기죠.
이런 이야기가 있는 것처럼 인간은 오래전부터 실제 같은 그림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열망을 채워주는 도구 중 하나가 원근법의 발명이었던 것이죠.
물론 원근법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고, 얼마 뒤 해부학에 대한 연구들이 더해져
공간과 인체에 대한 충실한 재현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실제 같은 그림에 대한 열망을 목표로 하는 예술을 환영주의(illusionism)라고 합니다.
말 그대로 보는 사람을 진짜로 믿도록 속이는 것이죠.
이전 글에서 보이는 대로 그린 그림과 생각한 대로 그린 그림에 관한 이야기를 했었는데요.
https://blog.naver.com/ahisfy/222192640732
보이는 대로 그린 그림 역시 환영주의에 속한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르네상스부터 시작한 이런 환영주의는 현대 미술에 이르기까지 미술의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태생부터 재현적인 속성을 지닌 사진과 영상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미술에서 환영주의는 타파해야 할 대상처럼 여겨지게 됩니다.
게다가 특정한 이미지 자체를 표현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현대 미술이 어려워지는데 기여를 하기도 했죠.
이 말을 다시 생각해 보면 재현적인 속성을 지닌 사진과 영상을 다루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이런 환영주의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보는 것이 무척이나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환영주의의 큰 축을 담당하는 투시 원근법의 핵심인 '깊이감' 역시 파고들어서 생각해 볼 만한 부분이죠.
현대에 와서도 깊이감이 잘 드러나는 평면 예술에 대한 선호도는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퓰리처상을 받은 사진처럼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사진들을 보면 강렬한 클로즈업이 아닐 때는
상황을 잘 보여주는 풍부한 깊이감이 드러나는 사진인 경우가 많습니다.
라이프지에 실려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진이 되었던 수병과 간호사도
단지 수병과 간호사가 키스하는 장면뿐이었다면 이 정도로 유명해지진 않았을 겁니다.
그 뒤로 깊이감 있게 펼쳐지는 공간을 채우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과 건물 덕분에 더 유명해진 것이겠죠.
이전에 뮤지엄 오브 컬러에 다녀와서 알게 된 크리스티나 마키바라는 작가를 참 좋아합니다.
이 작가의 사진은 작가의 인스타그램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www.instagram.com/hobopeeba/
(이곳에 다녀와서 느낀 부분들을 이전에 영상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EhwlbOedC0
이 작가는 화려한 색감과 멋진 드레스로 이름이 높지만, 개인적으로는 원경과 근경의 대비,
즉 깊이감을 참 잘 보여주는 작가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특히 Le Grand Opera나 Finding Neverland와 같은 사진은 정말 이런 부분이 잘 드러나죠.
앞서 이야기한 사진과 위 사진을 보시면서 눈치채신 분도 계시겠지만,
사진은 렌즈의 선택을 통해서 원근감을 조절하는 방식을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위 사진에서 Le Grand Opera은 광각렌즈를 이용해서 원근감을 극대화했고
Finding Neverland는 망원렌즈를 이용해서 원근감을 압축시킨 것을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사진에 이어서 나온 영상에서도 당연히 이런 렌즈를 이용한 원근감의 조절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영화 레버넌트에서는 일부러 광각렌즈를 많이 사용해서 강한 원근법을 이용하곤 합니다.
물론 이때는 카메라가 가까이에 있다는 효과를 주어서
시청자로 하여금 더욱 생생한 현장감을 느끼도록 하는 목표도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 와중에 너무 강한 원근감을 어느 정도 상쇄하고자 안개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대기 원근법에 관한 이야기를 해볼 때 조금 더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정도면 정말 원근법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자유자재로 사용한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관련된 내용은 이전에 영상으로 만든 부분이 있습니다. 같이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lxJ31jUB_34
원근감을 강화하는 방향이 도드라지는 영화가 있다면, 반대로 원근법을 제한하는 효과를 노리는 영화도 있죠.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는 의도적으로 이미지의 깊이감을 없애고자
카메라가 벽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구도를 많이 사용합니다.
이 부분은 지난 글에서도 비슷하게 이야기를 했던 바가 있네요.
https://blog.naver.com/ahisfy/222219755405
이때는 공간의 깊이감이 약해지기 때문에 원근법의 효과가 줄어듭니다.
깊이감이 약해진 구도는 마치 만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하죠.
물론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도 원근감을 잘 표현한 부분도 많이 있고,
광각렌즈를 이용해서 이런 부분을 더 강하게 보여주는 장면 역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전에 그랜드부다페스트 호텔에 관해서 분석해본 글을 카페에 써두었으니
관심 있으신 분들은 한 번 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https://cafe.naver.com/teamcsraca/89
이렇듯 원근감은 그림뿐만 아니라 사진과 영상에서도 효과적인 표현 수단입니다.
평면에 깊이감을 더하거나 빼는 것으로 현실감이나 긴장감 등 많은 것들을 보여줄 수 있죠.
회화에서는 밝기나 구도를 통해서 깊이감을 표현하곤 했다면,
사진과 영상에서는 렌즈를 통해서 색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까지 가능해졌으니
원근법에 대한 이해는 영상 제작을 하는 입장에서는 거의 필수적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때 유행했던 3D 입체 영상 역시 깊이감의 색다른 표현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기존의 회화, 사진, 영상이 모두 2차원 평면 안으로 들어가는 형태의 깊이감만을 보여줬다면,
3D 입체 영상은 눈앞으로 튀어나오는 새로운 깊이감을 선사했죠.
그러면서 관람뿐만 아니라 체험하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했는데요.
눈으로 보는 것에 있어서 실재하는 것 같은 느낌을 추구하는 방향성은
여전히 큰 해상도나 넓은 다이내믹 레인지 등을 통해서 이어지고 있으니
입체 영상이라는 부분도 다시 논의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
앞서 현대 미술이 환영주의를 거부한다고 했지만,
현대 미술의 방향성이 엄청나게 다양한 만큼 환영주의를 극단적으로 밀어붙인 회화도 있습니다.
극사실주의 같은 사조가 그렇지요. 사진과 착각할 정도의 그림들인데요.
꼭 이런 극사실주의가 아니더라도 여전히 고전주의적인 그림들이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회화에서의 환영주의는 없어졌다 이런 표현을 하긴 어렵겠죠.
하지만, 사진과 영상이 넘치는 현시점에서 주류로 보기 힘들다고는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원근법이 잘 구사된 그림은 정돈된 공간과 공간 속에 정확하게 자리 잡고 있는 피사체를 볼 수 있게 해줍니다.
실제와 같은 느낌을 주고, 모두가 같이 보는 객관적인 그림을 본다는 느낌을 주게 되는 것이죠.
투시 원근법의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선이 만나는 한 점이라는 개념일 겁니다. 이를 소실점이라고 하죠.
이렇게 만든 소실점은 그 소실점을 확인할 수 있는 한 곳의 시점이라는 것을 강제합니다.
위의 사진을 보면서 어느 위치의 어느 높이에서 사진을 찍었겠구나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되죠.
딱 그 자리에서 찍은 것을 이 사진을 보는 모두가 알게 될 겁니다.
대부분의 사진이나 영상은 정면에서 보는 것을 기준으로 하죠.
주관적이던 시점을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하나의 시점이란 기준을 정해주는 것.
거칠긴 하지만, 이것을 객관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이렇게 기준을 정했기 때문에 기준으로부터 얼마큼 멀어졌는지를 알 수 있게 되면서
좌표를 만들 수 있게 되었고, 위치 등을 조금 더 수식적으로 따져서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가 위치한 장소를 공간이라는 개념으로 볼 수 있게 된 것이죠.
거기에 무언가를 정확하게 바라보기 위한 관찰이 필요하게 된다는 점에서
과학적인 사고방식의 근간이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브루넬레스키가 건축물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만들고 싶다는 공학적인 접근에서 시작되었던 것인 만큼
원근법이 이런 사고방식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원근법의 발명이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닐 겁니다.
관찰하는 주체와 관찰 당하는 객체로 나뉘게 된다는 점에서 차별의 씨앗을 제공하기도 했죠.
바라보는 자 입장에서 바라봐지는 대상들을 동등하게 바라보지 못하고
하등하게 여겨서 생긴 역사적인 문제들은 다 말하기 어려울 정도죠.
그럼에도 사진과 영상을 하루라도 안 보고 사는 날이 없을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는
무척이나 익숙할 수밖에 없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익숙함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영상 작업을 하고 있다면
익숙함 때문에 지나칠 수 있는 것들을 한 번 정도 돌아보는 것도 좋을 겁니다.
원근법은 좋게 말하면 재현을 위한 최적의 도구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눈속임입니다.
아무리 그럴듯하게 보인다 해도 결국 평면에 보게 되는 것이고
실제 하는 것이 아닌 재현일 뿐이죠.
앞서서 객관적인 시점이라는 이야기를 했고, 이것이 과학적인 사고방식의 근간이 되었다고 하지만,
과연 객관적인 시점이라는 것이 정말 가능한 지에 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어떤 의도를 가지지 않고서 바라본다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점에서
똑같이 그리더라도 어디부터 어디까지를 바라볼 것인가 어디에 더 집중하는가
이런 부분들까지 생각해 보면 정말 객관적인 시점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특히나 영상에서는 소재, 구도, 편집 등을 포함한 어느 단계에서나 선택을 하게 마련이기 때문에
객관적인 시점으로 만든 영상이라는 표현 자체에 한계가 있죠.
설령 가능하더라도 그것이 의미가 있다고 하기도 어렵습니다.
특히나 표현을 하는 데에 객관적인 시점을 너무 강조하다 보면
자칫 산으로 가거나 너무 밋밋한 결과물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이런 부분을 이전의 거장들도 분명히 생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을 보면 비율적으로 봤을 때 손과 머리가 상당히 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조각을 밑에서 보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 각도에서 봤을 때 정상적인 비율로 놓으면 머리가 제대로 보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밑에서 본 다비드 조각상을 보고 있으면 손과 머리가 그리 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역시 의도적으로 원근법을 틀어서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다빈치가 그린 수태고지에서 마리아의 오른팔은 뭔가 길고 부자연스럽습니다. 팔꿈치가 꺾여 보이죠.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 중에 이렇게 기본적인 원근법이 무너진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하는데요.
이 그림을 소장하고 있는 우피치 미술관에서 이에 대한 하나의 이론을 내놓았습니다.
이 그림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이미지의 우측 하단에서 봐야 한다고 합니다.
이 그림이 걸려있어야 했던 곳이 성당의 위쪽이기 때문에 이 그림을 정면에서 볼 수 없었고,
이런 관점을 고려해서 그렸다는 가설이 있다고 합니다.
관련된 내용을 보실 수 있는 영상도 있네요.
https://www.youtube.com/watch?v=Dp4fpf88rjk
두 거장의 작품 모두 정면에서 보는 것이 아닌
실제로 관람자의 입장에서 제대로 보이기 위한 노력을 한 것 같습니다.
기본적인 원근법에 이미 통달한 뒤에 근본까지 파고드는 고민을 해서 새로운 결론을 내린 것이죠.
안드레아 만테냐의 <죽은 그리스도에 대한 애도> 역시 약간은 변형된듯한 원근법을 사용했습니다.
저 방향에서 원근법을 그대로 이용해서 그렸다면 발이 엄청 크게 보였을 겁니다.
그런 방식으로 그려서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제대로 보여줄 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그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만테냐의 다른 그림들을 보면 원근법을 몰라서 저런 식으로 그렸다고 말하긴 어렵겠죠.
원근법을 사용하기 전의 그림들의 시점은 제각각이었습니다.
이집트 네바문의 정원 벽화를 보면 나무는 전체적인 시점은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듯한데
개별 동식물은 옆에서 바라본 것처럼 그려져있습니다. 심지어 방향도 제각각이죠.
앞서 본 베리공의 매우 호화로운 기도서에서 명작으로 손꼽히는 2월 장면입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사실적으로 그려졌지만, 공간의 시점은 꽤나 제각각이라는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위의 두 그림에서 우리는 정보를 얻는데 큰 무리가 없습니다.
어떤 상황인지, 어떤 배경과 어떤 피사체들이 있는지를 직관적으로 알 수 있죠.
특히 네바문의 정원은 정말 위에서 찍은 것처럼 그려놓았다면 못 알아보는 대상들이 많았을지도 모릅니다.
아마 앞서 이야기한 거장들은 원근법과 원근법 이전의 그림 모두를 이해했기 때문에
양쪽의 장단점을 다 살릴 수 있는 눈을 가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영상을 만들면서 원근법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지만,
원근법이 만들어내는 하나의 공간이라는 개념이 그 자체로 충분한지에 관해서는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수많은 것들을 보지만, 그 모든 것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일은 자세히 그렇지 않은 일은 거의 기억을 하지 못하죠.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중요한 것은 크게 덜 중요한 것은 작게 보여주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원근법을 마구 파괴하면서 공간의 연속성을 다 깨버리는 것이 좋은 방법 역시 아닐 겁니다.
영상에서는 이런 부분들을 클로즈업과 같은 방식들을 이용해서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습니다.
공간의 연속성을 깨지 않기 위해 180도 법칙 같은 것이 있기도 하고요.
그럼에도 이런 원근법의 역사와 사용법, 한계 등을 생각해 본다면
조금 더 구도를 잡을 때 많은 고민들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정리하고 쓰는 느낌이 아니라 쓰면서 정리하고 지우고 이러다 보니
엄청 의식의 흐름대로 쓰는 내용 같네요.
부족한 점이 많겠지만 부디 재미있게 봐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