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미크론 변이가 백신을 무력화한다는 소식이 하나둘씩 들려오고 있다. 2차, 3차 접종을 마친 사람도 감염되어 격리되었다는 사례가 하나둘씩 생겨나며 사람들은 백신의 효과에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본인은 앞선 글에서 거짓된 희망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한 바 있다. 백신 접종을 통해 판데믹을 종식시킬 수 있다는 환상은 백신을 회피하는 변이가 전 세계적으로 끊임없이 발생함에 따라 완전히 무너져 내릴 것이며, 사람들은 결국 방역보다는 바이러스의 존재를 무시하는 것으로 이 사태를 마무리하고자 할 것이다. 방역과 자유가 함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서, 사람들은 기약 없는 바이러스의 종식까지 자유가 제한받기보다는 간단히 방역을 무시하기를 택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만큼 감염으로 인한 사망자는 늘어나겠지만 백신 부작용으로 죽는 것과 수의 차이가 있을 뿐, 사람들은 자신의 일이 아닌 것에는 둔감하기 마련이다. 특히나 그것이 고령층에게 집중된 죽음일 때에는 더욱이 죽음에 공감할 이유가 적어진다. 어차피 늙어서 죽을 때 아니었겠느냐는 생각으로, 죽을 날을 앞둔 그들을 위해 남은 모두의 자유가 침해받아야 한다는 것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감내하기 어려운 조건일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으로 방역으로 인해 발생하는 갈등은 곧 임계점을 넘어설 것이다. 그때가 되면 사람들은 더 이상 정부지침을 따르기를 거부할 것이다. 정부의 지침이 권위를 잃으며 사회에는 사이비 지식인들이 넘쳐나고, 자신의 말이 맞다 떠들어대는 무자격자들이 자극적으로 사람들을 선동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이미 우리의 코앞까지 와있다.
어떻게 이런 상황까지 내몰리게 되었는가? 모든 면에서 이익이 되는 정책이란 있을 수 없다. 올해 초만 하더라도 왜 백신을 미리 확보하지 못했냐는 질책을 받았던 정부는 이제는 왜 백신을 맞히냐는 질책을 받고 있다. 백신을 찬성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책에는 일관성이 있어야 하며, 정부의 입장은 사회적으로 합의가 되어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번 정부는 일관성도 없고, 합의도 없고, 그저 여론에 떠밀리는 아마추어에 불과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하고, 신뢰는 사라지고 사회적 합의를 이룰 시간도 없게 되었다. 백신을 도입한 명분을 세우기 위해 백신의 효능을 과대 포장하였고, 백신 접종을 통해 판데믹을 종식시킬 수 있다는 자기 최면에 빠져 예상된 감염 증가에 허둥지둥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정부는 초기에 백신 도입을 늦게 한다는 명분으로 백신 없이도 감염 통제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점을 꼽았다. 백신 부작용을 우려한다는 것도 있었다. 그렇다면 그런 입장을 끝까지 견지했어야 옳다. 백신 도입 시에도 접종을 선택적으로 했어야 했고, 그에 따른 책임도 접종자 개인이 지도록 해야 했다. 그 대신 높은 수준의 감염 통제가 지속될 것이고, 그에 대한 손실이 보상될 것임을 국민에게 이해시켜야 했다.
반면 백신을 도입하고 접종을 반 의무적으로 하기로 했다면 백신 부작용에 대해서는 정부가 무한책임을 지고, 백신을 접종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조건에서든 통제를 없애주어야 했다. 대신 코로나 확산으로 인한 사망과 치료는 모두 개인의 책임이 된다는 사실을 국민들에게 이해시켜야 했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다는 세상의 간단한 법칙을 그저 거짓된 희망을 이야기하며 무시해왔고, 우리는 이제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 너무나도 예측 가능했던 혼란을 맞이하는 와중에 어떠한 반성도 없이 태연하게 2022년에 희망이 있으리라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나 뻔뻔한 것 아닐까? 검은 호랑이의 해를 맞이하며, 세상은 다시금 적자생존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