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요 며칠 SNS를 켜면 나만 제자리걸음인 것 같아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세상은 한 달 만에, 3개월 만에 뭔가를 이뤘다는 말들로 넘쳐났다. 인풋보다 아웃풋을 내야 한다며 내가 원하는 게 아닌 세상이 원하는 것을 하라고 한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분명 바쁘게 살았는데 손에 잡히는 건 없고, 그동안 뻘짓을 하고 있었나 하는 마음에 매일 성실하게 이행했던 루틴들을 멈추었다. 그리고 손톱을 잘랐다. 손톱의 흰 부분이 하나도 없이 짤막하게 자르면 마음마저 단정해지는 기분이 든다. 그리고도 마음이 울쩍하여 시간을 내어 산책을 했다.
예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북카페는 서울 한복판 지하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제대로 된 간판이 없어 입구를 찾는 것도 힘들었다. 무더운 날씨에 한참을 땀을 뻘뻘 흘리며 출입구를 찾아 헤매다 들어서니 비밀동굴 같은 장소가 나타났다. 책장은 물론 바닥부터 천장까지 짙은 나무색으로 무장한 공간. 그곳에 멋들어지게 누워있거나 세워진 책들에 이끌려 당장 아이스커피부터 주문해야겠다던 것도 잊은 채 카페의 책 코너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입구에는 이 공간을 만들 때 모티브가 된 책 몇권이 소개되어 있었다. 참신한 소개라는 생각을 하며 한권 한권 보는데 반가운 책이 눈에 띄었다.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우리집 책장에도 꽂혀 있는 책, 한때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선물하던 바로 그 책이었다. 한창 공부해야 할 시기에 책상에는 앉아 있어야겠고 공부는 하기 싫을 때 나는 무슨 의미인지도 잘 모르면서 릴케의 시들을 읽고 끄적이며 엉덩이 힘을 길렀다. 수신자는 내가 아니었지만 릴케가 쓴 편지글은 모두 나에게 보내온 말들인 것 같았다. 고뇌하던 사춘기 시절 내겐 늘 답이 필요했고, 그 답은 선생님이나 부모님이 아닌 다른 곳에 있다고 굳게 믿던 시절이었다.
북카페 매대에는 책과 함께 편지지가 전시되어 있었다. 손으로 편지를 적어본 게 언제였지. 그러고 보니 어렸을 때 난 참 편지를 열심히 쓰는 사람이었다. 맞다. 방학이면 선생님께 편지를 보내야 하는 숙제가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선생님께도 숙제 차원에서 편지를 부쳤다. 그런데 답장이 온 건 선생님이 아닌 선생님의 큰딸이었다. 당시 나보다 한 살 위였던 언니는 엄마에게 온 편지를 봤다며 자기와 편지를 주고받자고 제안했다. 그 후로 한 2년간 우리는 우표를 붙여가며 열심히 편지를 부쳤다.
정신을 차리고 아이스 커피를 주문했더니 직원이 친절히 자리까지 가져다주었다. 컵을 들자 컵받침에 ‘무용하고 아름다운 시간’이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지금껏 내가 낮은 고도에서 부유하던 시간을 이렇게 표현해주는 것만 같아서 계속 그 컵받침을 만지작거렸다. 언니와 편지를 주고받던 시간도, 릴케의 시를 끄적이던 그 시간도 내게는 꼭 필요한 시간이었다.
편지지와 노트에 무슨 내용을 적었는지 지금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그 시절에만 할 수 있는 고민에 대한 답을 찾아 헤맸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답이 없는 이야기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때 편지를 주고받으며 동기부여가 되어 성적이 올랐다거나, 시를 끄적이던 실력으로 어느 문학상에서 상이라도 받았다면 좋았겠지만, 결과물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학교에서 돌아와 우체통을 확인하는 즐거움, 어딘가에 나를 응원해주는 친구가 있다는 든든함, 세상의 고민은 나만 하는 게 아니라는 안도감 그런 마음만으로도 내가 그 시간을 보내야 하는 이유는 충분했다.
마감일이 코앞인데 며칠 동안 시작도 못 하고 동동거리다가 마감 전날에야 발동이 걸리는 일이 다반사인 내게 그 며칠이야말로 걸작을 만들기 위해 가장 필요한 시간이지는 않았을까.
커피를 다 마시고 오랜만에 용기를 내어 인스타그램에 컵받침 사진을 올렸다. 나는 너무 느린 사람이라는 고백과 함께. 남편이 봤다면 쓸데없이 왠 컫받침 사진이냐며 한소리 할 것이 분명했다. 아무도 좋아요를 눌러주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마음이 이내 들어 삭제할까 하던 찰나 댓글이 달렸다.
‘고요하게 전진하고 평화롭게 쉬어가는 유연한 모습에 반했어요.’
고작 댓글 한문장이었는데 멀고 먼 섬에서 날 위해 편지를 보내준 것만 같았다. 더운 날 집에서 에어컨 켜고 드러누울 수 있는 걸 마다하고 북카페에 찾아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