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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이 Feb 26. 2021

17년 째 일기를 쓰고 있습니다. (1)

프로일기러(?)에게 일기란

우연하게 친해진 친구네 집에 놀러 갔을 때였을까. 사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나는 초등학교 때 과제를 내 주지 않으면 일기를 쓰지 않았다. 방학 숙제로 내준 일기 숙제는 날조하기 바빴다. 그러다 일기 숙제로부터 해방된 중학생이 되었는데도 일기 쓰는 게 너무 좋다고 말하는 그 친구의 얼굴을 보면서 늦은 밤 책상에 스탠드를 켜 놓고 꼼지락 거리는 그 친구의 모습을 상상하게 되었을 때 그 습관을 따라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 친구가 신비롭기도 했고 머리보다 가슴이 꽉 찬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난 꽤 단순했다. 칭찬받는 것을 좋아하고 딱히 문제가 있었던 적도 없고 원만하고 무난하고 별 생각없이 유년시절을 보냈다. 사실 이런 유년시절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지 지금은 알지만, 사춘기에 접어드는 시기였던 중학교 시절에는 나만의 독특함이 아주 중요해졌던 것이다. 


그 친구를 부러워하고 따라해 보고 싶어진 뒤로는 문방구에 가면 여러 종류의 노트를 둘러봤다. 학교에서 쓰는 크기의 노트 이외에도 다양한 크기의 노트가 있구나, 두께가 조금 더 두꺼운 것도 있네. 표지는 이런 게 마음에 든다... 그렇게 눈도장을 찍다가 구입한 노트가 아마 A5사이즈의 노트였을 것이다. 나는 중고등생 시절 필기에 목숨거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아끼고 좋아하는 펜들이 많았다. 일기를 쓸 때에는 꼭 그 당시 제일 좋아하는 펜으로 꾸욱꾸욱 눌러 일기를 썼다. 그런 날이 하루하루 빠르게, 많이는 아니었지만 천천히 조금씩 차곡차곡 쌓였다. 


떠올려보면 행복했을 때보다 불행하거나 화났을 때 뭔가 힘들었을 때 잘 풀리지 않았을 때 그런 끈끈하고 미적지근한 날에 더 많은 기록을 남겼다. 이건 지금도 그러한데, 행복한 시간이라 느껴질 땐 카메라를 꺼내게 되고 그렇지 않은 순간에는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가서 노트와 연필을 꺼낸다. 학생 때는 방에 책상이 함께 있었기 때문에 책상에서 일기를 쓸 때가 훨씬 많았는데 지금의 방에는 책상이 없기 때문에 침대 이불 속에서 엎드려 일기를 쓴다. 정말 일기를 쓰다가 훌쩍 잠들기도 하고 엎드려 쓰다가 어깨가 아파오면 누워서 굳이 불편하게 한 글자 한 글자 끄적이기도 한다. 


어쩌면 지금 내게 일기란 어떤 기록의 의미를 지나쳤는지도 모른다. 일을 할 때도 쉴 때도 심심할 때도 생각이 많을 때도 거의 언제든 메모지나 노트를 꺼내서 적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 가치도 의미도 없는 낙서같은 내용을 적으면서 시간을 보내고 누군가를 또는 무언가를 기다리면서 쓰기도 하고 일기를 쓰면서 그 누구의 간섭도 없는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인간의 자아를 과녁판처럼 중심부터 크기가 커지는 원들이 겹쳐 있는 모양이라 생각해본다면 나의 자아 중심부에는 '일기'라는 형태의 기록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일기에 대해서 글을 써보자고 생각했을 때 과연 사람들에게 내가 무엇을 설명하고 알려줄 수 있을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요즘 일기나 기록에 대한 트렌드나 흐름을 보면 일기라는 갈래를 텍스트로 표현하기 보다는 이미지화하는 작업에 많은 사람들이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이어리 꾸미기나 영상으로 자신의 일상을 기록하는 브이로그 같은 것들을 많이 봤기 때문이다. 사실 그런 면에서 나는 요즘의 방향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방식의 일기를 쓴다. 그림 그리는 것을 싫어하는 성향, 다꾸에 흥미를 가졌다가 그다지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모든 다꾸 재료들을 나눔했던 기억, 최근 들어 연필로 슥슥 빠르게 쓰는 것을 즐기는 점까지 종합해 봤을 때 나는 오직 '쓰는' 시간을 즐거워한다는 점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꾸미지 않고, 잘 써야 한다거나 가지런하게 정리된 형태나 꼴을 갖추어야 한다는 강박 없이, 막 일기를 쓴다. 


애써 고른 노트에 심혈을 기울여 발견한 멋진 필기감을 선사해 주는 펜으로 결국 대충 막 갈겨쓰라고?


음.. 그렇다. 일기는 과정을 담는 곳이고, 또는 그 자체로 결과물이라 해도 별 상관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지나간 기록을 다시 들춰보는 일이 잘 없는 편인데 쓰고 돌아보지 않을 기록이어도 사실 상관없는 게 일기 아닐까 생각한다. 날 것 그대로 정제하지 않고 솔직하게 쓰는 것. 잘 쓰려고, 잘 이해되기 위해서 표현을 고르고 단어를 선택하지 않고 써도 되는 그런 게 일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일기를 쓸 때 자유롭고 즐거울 수 있는 게 아닐까. 




일기와 관련된 경험이나 질문이 있다면 덧글로 남겨주세요:)

제 나름대로 생각해보고 글로 풀어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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