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경미 작가 Aug 19. 2020

[2화] BAD Girl GOOD Girl


전화를 걸자마자 다짜고짜 만나자고 했다.


ㅡ지금?
ㅡ응


잠시 망설이다 영문도 모르고 "그래"라고 대답했다. 뭔가 다급해 보였고, 꼭 만나서 꺼내야 할 이야기가 있어 보였다. 한쪽 어깨로 핸드폰을 지지한 채 일거리를 챙길까 말까 잠시 망설이던 찰나,


ㅡ이성당 알지?
ㅡ어.... 알지...


평소와는 다른 짧고 간결한 다섯 글자가 거슬렸다. 그는 두 시간 거뜬히 통화하고 긴 얘기는 내일 하자고 끊는 그런 여자 친구와 같은 부류였다. 층계를 내려가다 왠지 께름칙한 기분이 들어 가방 깊숙이 들어간 휴대전화를 헤집어 찾았다. 다시 전화를 걸었다. 통화음 대신 미쓰에이의 "베드걸 굿걸"이 흘러나왔다.


ㅡ진짜 지금 나올 수 있어?
오후 4시 30분이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그의 퇴근과 어울리지 않는 시간이었다. 


ㅡ경미야.
누군가 뒤에서 내 어깨를 툭 쳤다.


ㅡ어? 원재야.
나는 재빨리 그의 몸과 얼굴을 살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물론 나만 아는 정적이었다. 그 짧은 고요 속에서 나는 처음 이 남자를 만난 날을 기억해냈다. 나는 재빨리 밀크셰이크 2잔을 주문하고 낡은 의자와 체리색 테이블이 매력적인 아주 오래된 제과점의 가장 구석자리에 앉았다. 


ㅡ처음이야.
ㅡ뭐가?
ㅡ네가 먼저 전화한 거.
그의 말을 듣고 잠시 멈칫했다. 사실 그 말을 듣는 그 순간에도 나는 자각하지 못했다. 상황인즉 내가 먼저 전화를 걸기는커녕 부재중 전화를 보고서도 먼저 전화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 억울한 듯 말했다. 


"바빴어?"라는 그 흔한 질문조차 하지 않았기에 나는 내가 그렇게 인내심을 요구하는 여자였는지 몰랐다. 그의 목소리는 한껏 들떠있었다. 정확히 3개월 만에 처음으로 자신에게 '먼저' 전화한 여자 앞에서 이 엄청난 사건을 격양된 목소리로 떠들어댔다. 진심 감동이었다는 둥, 이걸 그냥 넘길 수 없었다는 둥, 휴대폰에 뜬 '경미'라는 이름이 믿기지 않아서 미친놈처럼 날뛰니까 소장님이 그냥 퇴근하라고 했다는 둥 숨이 넘어갈 듯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이게 무슨 사랑의 신호탄인 것 마냥 떠들어대는 이 남자 앞에서 찬물을 끼얹을 수는 없었다. 


그 날 그는 작업복 차림이었다. 
'급하게 나오느라 옷을 갈아입을 시간이 없었... 을 거야...' 애써 이해하려 했다. 90년대 탈부착 안 되는 교복 위 명찰처럼 회사 이름이 궁서체로 선명하게 박혀있었다. 후줄근한 카라티 위로 파란색 조끼, 사십 대 아저씨가 입을 법한 펑퍼짐한 기지 바지까지 어느 것 하나 괜찮지 않았다. 이해 할 수는 있었지만 위안이 되진 않았다. 앉아있는 내내 불안했다. 혹시 아는 사람 만나면 어떡하지? 무슨 폰팅도 아니고 전화할 때만 좋고, 만나면 집에 가고 싶은 이 내 마음을 어떻게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까..

ㅡ그만 일어날까?
빨대가 뽀얀 밀크셰이크 대신 공기를 흡입하며 요란한 소리를 내기 시작하자 은근슬쩍 내 뜻을 비췄다.


ㅡ아직 다섯 시밖에 안 됐네.
ㅡ그러네
ㅡ그럼 이제......
'회사 다시 들어가 봐야 하지 않아?'라고 말하려는데 그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말했다.
ㅡ밥 먹으러 가자. 바로 옆에 일본식 돈가츠 맛있어. 

큰길을 빠져나와 골목길 모퉁이를 돌아 조금 더 걸었더니 일본식 간판이 눈에 띄었다. 네 테이블이 고작인 아주 작은 가게였다. 창가 쪽 붉은 백열등 아래 복고양이 한 마리가 똑딱똑딱 손을 흔들고 있었다. 들어서자마자 구수한 기름 냄새가 났다. 이내 나머지 테이블도 채워졌다. 밥을 먹다 낯선 시선이 느껴졌고 힐끔 봤는데 다행히 아는 사람은 아니었다. 나는 커다란 창문을 등지고 앉은 유독 까맣게 그을린 
그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자신에게 일말의 매력도 느끼지 못하는, 심지어 옆에서 걷는 것조차 창피해하는 여자 앞에 데이트라는 걸 하러 나오면서 어쩜 이 남자는 기도 안 죽을까. 그래, 백 번 양보해서 순수하게 그 벅찬 감동을 이기지 못하고 아무 생각 없이 뛰쳐나왔다고 치자. 근데 옷차림을 포기하기엔 너무 못 생겼잖아. 생긴 거라도 좀 예의가 있던가.. 답이 없다.. 답이 없어.. 


ㅡ아! 진짜 어디서 나오는 자신감이야?' 
혼잣말이 나도 모르게 새어 나왔다. 
ㅡ뭐라고?
손을 번쩍 들어 호가든을 주문했다. 
ㅡ미안해. 
ㅡ'너랑 있는 거.. 창피해.'라고 머릿속에 쓰고
ㅡ너랑은 인연이 아닌 거 같아.

라고 말해버렸다. 

                              *
그가 화장실에 간 사이, 
"남자가 돈이 많은가? 저 여자는 저 남자랑 왜 사귈까? 돈이 많아 보이지도 않는데?"라고 수군대는 남녀의 대화가 우리를 아니 나를 향한 것인지 몰랐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그들은 나가기 직전 내게 연인인지 물었고, 나는 그들이 나간 후 먹지도 못하는 술을 주문했다. 그 날, 다시 카페베네의 악몽이 떠올랐다. 



누군가는 사랑의 시작을 기대했고,
누군가는 사랑이 아니었음을 확인한 시간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




[아무튼, 결혼]

아무튼 시리즈를 좋아해서 어떤 이야기를 엮어볼까 고민하다가 저희 부부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연애소설로 만들어보았습니다. 2년 전에 조금 써둔 원고의 먼지를 털어 세상 밖으로 꺼내놓았고, 올해 완결을 목표로 연재를 시작했습니다. 많이 사랑해주세요.

매거진의 이전글 [1화] 그 남자 이름은, 동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