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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래 Oct 23. 2018

'007 뷰 투 어 킬'과 그 악영향

소년과 제임스 본드

1987년. 

싸리재가 최루탄 냄새로 향긋하게 뒤덮이던 그 때. 사랑하는 영화관 애관극장에서 엄마 아빠 틈에서 본 영화. "007 뷰 투 어 킬" 이름도 어렵다. 영어를 갖다 써도 꼭 이런 걸. 


내 나이 갓 여덜 아홉이었으니, 은막 저편에 '가공할 음모'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크리스토퍼 월켄은 딱 봐도 악당으로 보였다. 꼬마가 봤을 때 "뷰 투 어 킬"은 위대한 명작이다. 로저 무어 경의 당시 나이가 쉬흔일곱. 일찌감치 은퇴한 전임자 숀 코네리 보다 무어 경은 연상이란다. 공무원 시험을 늦게 합격한 탓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영국 정보당국도 내일 모레 환갑인 늦깍이 직원을 부려먹을 대로 부려먹는다. 월급에 차량과 양복이 제공되지만, 입장 바꿔 생각해도 그걸로는 모자란다. 그래서 무어 경이 첩보 활동 중에 미녀와 접선하여 샴페인을 따는 것은 본인의 수완이니 시비걸지 말지어다. 


숀 코네리가 몇 컷 안 찍고 수 백만의 출연료를 받고 있을 때, 무어 경이 얼마나 극한 직업에 종사했는지 보자. "뷰 투 어 킬"의 로저 무어 혹사 내역이랄까. 


스키 활강

에펠탑 철골 위 걷기

반으로 쪼개진 승용차 몰기

변칙 장애물 코스 승마하기

물에 빠진 롤스로이스에서 탈출해 타이어 바람 빼마시면서 5분 이상 버티기

샌프란시스코 바닷물 속에서 돌아가는 터빈 탈출하기

불타는 샌프란시스코 시청 엘리베이터에서 미녀를 안고 탈출하기

소방차 사다리에 매달린 채 도개교 점프해서 건너기

비행선에 매달려 가다가 골든게이트브릿지에 밧줄로 갑바치기

도끼들고 덤비는 악당과 골든게이트브릿지에서 격투하기


이 영화는 슈퍼맨이 아니고 007이다. 제작진의 과욕 때문인가, 정년을 앞둔 공직자는 "뷰 투 어 킬"을 끝으로 은퇴해버렸다. 후임자 티모시 달튼 선생은 아무 잘못이 없지만, 엄마 아빠는 두 번 다시 007 영화관에 가지 않으셨다. 


그 때 그 꼬마가 중학생이 되어 팝음악을 듣는다고 폼을 잡기 시작했을 때는, "뷰 투 어 킬"의 주제가를 불렀던 듀란듀란도 어느덧 한물 간 밴드가 되어 있었다. "뷰 투 어 킬"은 007 시리즈를 연속적으로 봐왔던 팬들의 눈에는 노장 운동 선수의 지친 경기를 보는 듯 했으리라. 경로우대사상이 없는 냉혹한 영국 공직사회를 비판하면서. 


그러나, 무어 경은 눈 덮인 시베리아를, 샌프란시스코 베이의 푸른 물 속을, 고귀한 준마 위에서의 마장마술을, 아찔한 금문교 위에서 균형을 잡으며 초인의 경지에 오른다. 난생 처음 영화관에서 그와 같은 드라마를 본 꼬마는 그이후 세상 모든 액션 영화가 시시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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