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글과 약 3개정도의 이어지는 글에서는 박사과정 동안 진행될 프로젝트를 소개하려 한다. 대학원 입학 전에 가졌던 작은 의문에서 시작한 프로젝트가 석사학위 논문이 되었고, 앞으로 약 4년간의 박사과정에서 총 세 단계로 진행될 장기 프로젝트에서의 첫 번째 단계이다.
본가 서재방 한 구석에는 오래전에 찍었던 사진을 인화해서 모아둔 박스가 있다. 딱히 연도별로 잘 정돈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냥 많은 사진이 한데 섞여있지만, 가끔 가족이 다 같이 모여 어렸을 적 사진을 보며 부모님이 들려주시는 옛날 얘기를 듣곤 한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또는 내가) 나이가 들어서 시력이 점점 떨어지게 된다면, 그래서 만약 눈이 보이지 않게 된다면, 이렇게 사진을 보며 과거를 추억하는 시간을 어떻게 가질 수 있지..? 그리고 자연스레 따라오는 궁금증이 있었다. 그렇다면, 선천적으로 또는 후천적으로 시각장애인이 된 사람들은 과거를 어떻게 회상하고 공유할까?
대학원 과정을 시작하며 만난 지도교수님과 프로젝트 관련 면담을 하다가 잡담하듯 말씀드리게 된 이 궁금증이 앞으로 나의 몇 년을 함께할 프로젝트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현재를 기억할 목적으로 기록을 남기는 것은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예전부터 사람들은 동굴의 벽에 소소한 일상을 비롯해 전쟁, 축제, 사냥 등 기념할만한 사건을 묘사하는 그림을 그려서 기록했고, 형태는 많이 달라졌지만 오늘날의 우리도 여전히 비슷한 기록을 남기고 간직한다.
사진으로 순간을 담아 액자 또는 앨범에 보관하고, 일상을 적은 메모를 모아두는 다이어리를 만드는가 하면, 특별한 의미가 있는 작은 물건들을 서랍 한 구석에 모아두거나 수년간의 매일매일이 담긴 스마트폰을 지니고 다니면서 때때로 오래 전의 디지털 사진 또는 음성 녹음을 살며시 꺼내보기도 한다.
지나간 시간을 추억하는 일은 우리가 삶을 살아감에 있어서 꽤나 중요한 역할을 한다. 긍정적이고 행복한 기억을 떠올리는 습관이 스트레스로 인한 행동 장애나 우울증을 완화시켜주는 것에 도움을 준다는 연구결과가 있기도 하고 (Ramirez et al., 2015), 굳이 과학적으로 입증된 효과를 얻기 위한 목적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행복한 순간을 간접적으로 다시 느끼기 위해서, 사랑하는 사람과의 추억을 떠올리기 위해서 혹은 지나간 순간을 애도하고 기억하기 위해서 과거를 돌아본다.
DWBAtlanticpic - Own work, CC BY-SA 3.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28360846
심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는 그의 저서 "심리학의 원리"에서, 의미 있는 물건은 우리가 삶을 살아가며 겪었던 뜻깊은 사건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association) 매개체가 됨을 설명한다 (James, 1890). 이처럼 우리 일상의 기억이 묻어있는 소유물은 과거의 삶을 회상하며 다시 경험하고 또 현재와 미래를 바라보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Belk, 2010).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사람들이 소장하고 있는 소유물의 종류는 훨씬 많고 다양해졌다. 물리적인 물건을 넘어 디지털 데이터를 포함하는 가상의 소유물 (디지털 사진, 음성 녹음, SNS 계정, 이메일 등)이 늘어나면서, 이처럼 새로운 종류의 소유물에 의미를 부여하는 프로젝트 및 연구도 많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HCI 쪽에서도 오랜 기간 쌓인 데이터를 활용하여 과거를 추억하게 하는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e.g., Olly: 음악에는 과거의 추억이 담겨있다). 이런 관심에도 불구하고 HCI에서 과거 회상에 대한 경험을 연구하는 프로젝트는 모두 비시각장애인을 대상으로 한다.
시각장애인을 대상으로 하는 연구는 이전에도 많았고, 현재에도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대부분의 시각장애인을 위한 보조공학(assistive technology) 연구는 일상생활에서의 불편한 점을 개선하려는 목적을 띤다. 대표적으로, 초음파 센서를 이용해 전방에 물체가 있는지 감지하거나 이미지 프로세싱을 탑재한 드론을 동반하는 등의 이동성(mobility & navigation)에 대한 개선, 현재 위치를 알려주거나 물체에 특정한 센서를 달아 분실하지 않게 도와주는 위치 추적(location & position tracking) 그리고 시각적인 정보를 효율적으로 전달해주는 스크린 리더 또는 점자 키보드 등 전자기기의 접근성(accessibility)에 대한 개선을 예로 들 수 있다.
(The figure on the far left originally appears in Avila et al., 2015, on page 1.)
하지만, 실용적이거나 효율적인 기술적 지원을 위한 목적을 가진 연구 외에, 생활에, 그리고 그들의 일상에 밀접하게 관련돼있는 감성적인 가치의 질을 높이는 목적의 연구는 아직까지 많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이런 맥락에서, "과거 회상"이란 특정한 경험을 그들의 입장에서 듣고, 이해하고, 관찰하며, 또 그들이 소지하고 있는 물건 및 디지털 데이터를 활용해 과거를 추억하는 연구는 HCI에서 단 한 번도 진행된 적이 없다.
대부분의 보조공학 프로젝트는 초기단계에서 매우 특이한 외형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시각장애인을 대상으로 하는 많은 프로젝트가 간과하는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바로 비시각장애인의 관점에서 시각장애인의 경험을 해석하는 것이다. 통계적으로 보더라도, 대부분의 전문가는 비시각장애인이 많을 것이고, 그들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떠오르는 아이디어에서 시작하는 프로젝트를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시각장애인의 경험이나 피드백이 없는 서비스 및 프로젝트는 상용화 과정에서 시각장애인 사용자가 사용하기에 부담이 될 수 있다 (Lefeuvre et al., 2016). 일반 사용자가 쉽게 구매하기 힘들 정도로 높은 비용이 들기도 하고, 장애를 의식하지 않고 생활하는 익숙한 패턴을 벗어나는 제품에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원래의 습관으로 돌아가는가 하면 (Hersh & Johnson, 2008), 특이한 외형을 가진 제품을 착용하고 다니는 것을 사회적 낙인(social stigma)으로 느껴 거부하는 경우도 있다 (Shinohara & Wobbrock, 2011).
우리가 가진 기술로 시각장애인의 과거 회상에 대한 경험을 어떻게 더 깊고 풍부하게 만들어 줄 수 있을까?
위와 같은 질문을 탐구하는 프로젝트를 위해 시각장애인을 위한 비영리 단체에 방문하고, 온라인 커뮤니티에서의 홍보, 그리고 홍보를 통해 연락이 닿게 된 시각장애인의 지인들을 추천받아 총 9명의 참가자(남성 4명, 여성 5명; 선천적 시각장애 7명, 후천적 시각장애 2명; 20~40대 4명, 50대 이상 5명)가 확정되었다. 과거 회상에 관련된 질문을 바탕으로 편하게 대화를 주고받는 인터뷰 형식으로 워크샵을 디자인하여 참가자의 집을 직접 방문하였다. 각 세션은 짧게는 60분, 길게는 180분까지도 진행되었다.
모든 참가자는 본인의 개인적인 이야기 및 사진을 비영리적인 목적으로 공유하는 것에 찬성하였다.
워크샵은 총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첫 번째 파트는 과거를 돌아보는 경험에 대한 개인적인 이야기, 습관, 감정, 가치관 등 "현재의 경험"을 관찰하고 이해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참가자들은 각자 소중히 여기는 소장품 및 집 안에서의 의미 있는 공간을 직접 보여주며 개인적인 이야기를 공유해주었다. 두 번째 파트는 연구팀이 준비해 간 여러 가지 물건을 만지고, 공유하며 미래지향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을 목표로 짜여졌다. 액자, 앨범, 다이어리, 스마트폰 그리고 작은 상자를 준비하였는데, 이 물건들은 비시각장애인이 흔히 기억을 보관하는 다양한 형태를 의미했다. 주변의 비시각장애인 가족 또는 지인과 과거를 회상하며 공유하는 경험에서 어떤 장점과 단점이 있고, 불편한 점이 있다면 어떻게 개선하기를 원하는지 대화를 나누며 만약 시각장애인 입장에서 생각하는 이상적인 형태의 기억을 담아둘 수 있는 물건이 있다면, 그것이 어떤 형태일지, 어떤 기능을 가지고 있을지 (또는 원하는지)에 대해서 나누었다.
모든 인터뷰는 녹음되어 글로 옮겨졌으며, 사진과 메모를 통한 기록을 포함하여 결과를 분석하였다.
데이터 분석에는 친화도 다이어그램(Affinity Diagram)을 사용하여 공통적인 테마를 찾아 분류하고, 이후 각 카테고리별로 세부적인 항목을 나누었다. 분석된 결과는 크게 세 가지 카테고리로 구분하였으며, 최종 목차는 아래와 같다.
1. 과거를 기록하고 기억하는 방법
1-1. 감각을 통한 회상
1-2. 장소를 통한 회상
1-3. 대화를 통한 회상
1-4. 다른 사람의 묘사를 통한 회상
1-5. 형태가 없는 느낌을 통한 회상
2. 과거 회상에 관련된 소유물
2-1. 기억을 상징하는 물리적인 기념품
2-2. 디지털 문서 및 디지털화된 기록물
2-3. 두 가지 종류의 음성 녹음
2-4. 시각적인 소유물과 소셜 미디어
2-5. 소유물 위주의 과거 회상에서의 갈등
3. 과거를 기억하는 경험에 대한 바람과 소망
3-1. 이미지를 설명해주는 AI의 가치
3-2. 촉감적인 경험에 대한 바람
3-3. 남겨진 것과 남겨질 것
그리고 이 결과를 바탕으로, 다음 단계의 프로젝트에서 참가자들이 언급한 기술을 활용할 수 있는 방향, 그리고 데이터 분석을 통해 더욱 풍부한 경험을 만들어줄 수 있는 시나리오를 종합하여 소리, 멀티미디어 그리고 촉감을 기반으로 구성해보았다.
소리를 통한 회상
멀티미디어를 통한 회상
촉감을 통한 회상
** 참가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구체적인 분석 결과와 두 번째 프로젝트의 방향성에 대한 내용은 다음 글에서 이어집니다.
참고문헌:
Avila, M., Funk, M., & Henze, N. (2015, October). Dronenavigator: Using drones for navigating visually impaired persons. In Proceedings of the 17th International ACM SIGACCESS Conference on Computers & Accessibility (pp. 327-328).
Belk, R. (2010). Possessions and self. Wiley International Encyclopedia of Marketing.
Hersh, M. A., & Johnson, M. A. (2008). Assistive Technology for Daily Living. In Assistive Technology for Visually Impaired and Blind People (pp. 615-657). Springer, London.
James, W. 1890. The Principles of Psychology. Henry Holt and Company.
Lefeuvre, K., Totzauer, S., Bischof, A., Kurze, A., Storz, M., Ullmann, L., & Berger, A. (2016, October). Loaded dice: exploring the design space of connected devices with blind and visually impaired people. In Proceedings of the 9th Nordic Conference on Human-Computer Interaction (pp. 1-10).
Shinohara, K., & Wobbrock, J. O. (2011, May). In the shadow of misperception: assistive technology use and social interactions. In Proceedings of the SIGCHI Conference on Human Factors in Computing Systems (pp. 705-7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