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은 어때?“
독일에 사는 사람이라면 한 번 쯤은 들어봤을 법한 물음이 있다. „좀 촌스러워.“ 매번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의 대답은 생각의 과정을 거칠 틈도 없이 단호하게 입 밖을 나선다.
튼튼한 나라 경제와 합리적인 사회의 여러 시스템들로 한국인들에게 꽤 좋은 인상을 주고 있는, 두 말 할 필요 없는 선진국 독일. 질문자의 의도는 소위 ‚좋은 나라‘에 살고 있는 감상을 묻는 것이리라. 그들의 기대와 달리 독일은 촌스럽다. 흔히 독일 사람들을 설명할 때 그들의 실용주의적 사상에 기반한 등산복 사랑을 이야기하고는 하는데, 비단 패션 감각 뿐만이 아니라 문화 전반에 있어서 ‘최신’의 무언가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아직도 독일에서는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간다. 지은지 100년이 넘는 집에서도 여전히 사람이 살지만 굳이 열쇠를 고수하는 건 오래 된 집이어서가 아니다. 월세가 130만원을 육박하는 이른바 ‘모던한’ 아파트에서도 열쇠를 사용한다. 이 열쇠를 잃어버리면 현관문과 다른 세대 주민들의 열쇠까지 모두 바꿔야 하고, 그 비용이 어마어마하기에 열쇠 보험을 드는 일도 다반사다.
9년 전 독일에 왔을 땐 인터넷 뱅킹이 없었다. 돈을 뽑을 때나 이체를 할 땐 무조건 은행에 가야했고, 입금을 처리하는 별도의 기계가 있어 그곳에서 매달 월세를 이체했다. 기계는 또 얼마나 낡았는지, 잘 눌리지도 않는 구식 자판기를 힘껏 누르며 은행 업무를 봤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입금이 완료되면 기계에서 입금 내역이 인쇄된, 가로로 긴 직사각형 모양의 증명서가 인쇄되었다. 이것이 곧 통장의 역할을 했다. 물론 지금은 인터넷 뱅킹도 되고 카카오뱅크 같은 간편한 은행 어플도 출시됐다. 3년 전 독일에 와 전에 사용하던 은행에서 다시 계좌를 열었는데, 내 인적사항이 남아있었는지 담당자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아주 자랑스럽게 말했다. “독일도 이제 인터넷 뱅킹 할 수 있어요! 예전에 쓰실 때는 안 됐잖아요. 인터넷 뱅킹 신청해드릴까요?” 목이 끊어져라 위아래로 고개를 끄덕이며 의사를 표현했다. 네, 제발요.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신청해주세요.
그러나 노년층에서는 인터넷 뱅킹을 이용률이 극히 적고, 비교적 젊은 중장년층에서도 인터넷 뱅킹을 이용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때문에 여전히 은행에는 입출금을 위한 기계들과 행원들이 업무를 보고 있다. 적지 않은 나의 독일 친구들 역시 인터넷 뱅킹 보다는 직접 은행에 가 업무를 보는 것을 선호한다. 단 두 가지의 사례만 놓고 보아도 이들은 현대 문명의 이기를 누릴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에 반해 한국은 트렌디하다. 1-2년의 주기로 흩날리는 유행에 따라 길거리 풍경이 변하고 요즘 뜬다는 동네에 들어서면 온통 영어로 가득해 LA에 온 것 같은 착각마저 일으킨다. 그런가 하면 어릴 때 공상과학 만화에서만 보던 ‘로보트가 사람의 일을 대체할 것이다!’라는 예언은 현실이 된 것만 같다. 아니, 대체하는 정도가 아니라 로봇들의 사이버 세상에 내가 눈치 없이 얹혀살고 있는 느낌이다.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라는 단 한 문장의 주문을 네모나고 차가운 스크린 위에 손 끝으로 전해야 하고, 주문한 음식을 전하러 온 로봇은 무심하게 서서 음식을 가져가기만 기다렸다가 감사 인사를 전할 새도 없이 떠나버린다. 모든 서비스를 디지털로 제공하는 것이 가능해지니 동네에 하나씩 있던 은행 지점들은 더 큰 동네에 ‘본점’이라는 이름으로 통폐합 되었다.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고 인화해서 간직하기 보다는 간편하게 드라이브에 저장하기 시작하면서 동네 사진관들 역시 모습을 감췄다.
변화가 빠른 곳에는 활기가 있다.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아이템들로 간판과 메뉴판을 휙휙 바뀌고, 최신 유행의 단물을 즐길 새도 없이 다음 타자가 손을 흔들며 기다리고 있다. 그만큼 빨리 변하는 유행을 따라가다 보면 지루할 틈이 없다. 흔히 한국을 ‘재미있는 지옥’이라고 부르는 이유에는 이 ‘트렌디함’이 큰 몫을 했으리라 추측한다.
변화를 반기고 즐기려면 그것에 적응할 힘이 전제되어야 한다. 쫓아가고 쫓아오는 것들을 모두 살피려면 그만한 힘도 능력도 필요하다. 말 대신 손 끝에 닿는 차가운 스크린의 감각에 익숙해져야 하고 ‘직관적’으로 디자인 되었다는 햄버거 가게의 키오스크에서 주문을 제대로 하기 위한 직관도 있어야한다. 어디 그 뿐인가. 카페에 가려면 ‘Café’를, 주문한 음식을 받아오려면 ‘Pick up’이라는 영어 단어도 알아야 한다. 그래서일까, 요즘 좋다는 곳에는 힘이 넘치는 젊은이들만 가득하다. 사실상 길거리는 젊은이들에게 점유되어있다. 햄버거 집 키오스크 사용법을 몰라 결국 주문을 못한 어머니가 집에 돌아와 “엄마는 이제 끝났어”라며 오열했다던 한 사연은 며칠 간 뉴스와 칼럼으로 보도되며 정신없이 변화만 좇던 한국 사회에 노란불을 켜주었다.
독일은 지루하고 촌스럽고 구식이다. 기존의 것을 고수하는 이유는 새로움에 대한 신뢰의 부족일수도 있고, 이상한 아집일수도 있고, 정보 자체의 부족일 수도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독일의 이런 촌스러움이 변화에 적응할 힘이 없는 이들에게는 안정을 준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무엇이든 바뀌기야 하겠지만, 새로운 것과 기존의 것 중에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것. 익숙한 방식을 벗어나 새로움을 선택하기까지 충분한 시간을 준다는 것. 그것 자체로 사회는 다양한 사람들을 끌어안을 수 있다. 속도가 1이든 10이든 런닝머신은 달리는 사람을 재촉하지 않는다. 그저 다양한 속도가 있음을 알려주고 입력된 속도값에 따라 벨트를 돌려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