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정우 Aug 21. 2021

주머니 속 우주

한국에서 대학에 다닐 때, 교수들은 유학파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덕분에 수업 중간중간 묻어 나오는 무용담이란 높은 확률로 ‘얼마나 힘들게 유학생활을 버텨내고 이 자리까지 왔는지’였다. 동양인이 드물었던 그때 그 시절의 인종차별 이야기부터 접시를 닦아가며 공부했던 박사 시절의 이야기까지. 그중에도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어가며 박사를 했다던 교수는 매년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지, 학우들에게 그의 무용담은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왔다. 그에게 가난한 유학생 시절은 번듯한 훈장이자 자꾸 꺼내어 자랑하고 싶은 자서전의 한 챕터인 모양이었다.


사실 애초에 ‘가난한’ 유학생이라는 말이 성립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특히나 독일에서 유학을 하려면 매월 100만 원 이상의 생활비가 입금되는 계좌, 혹은 독일에서 정한 최소 생활비에 체류 예정기간을 곱해 산출된 목돈이 수중에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미국이나 영국 같은 나라에 비하면 저렴하다고 하지만, 몇 천만 원이 결코 적은 액수는 아니다. 유학을 올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최소한의 경제적 여건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최소는 최소일 뿐. 모든 유학생들이 넉넉하게 살 수 있는 건 아니다. 나만해도 한국에서 일을 하며 모았던 돈과 어머니가 무리하게 보태주신 돈으로 생활을 했고, 지금은 그 마저도 떨어져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독일어 과외를 하며 먹고 산다. 그나마 과외는 적은 시간을 투자하고도 상대적으로 괜찮게 벌 수 있는 직종(?)에 속하는데, 체력적으로 훨씬 소모가 큰 레스토랑이나 마트에서 일을 하며 공부를 병행하는 대단한 유학생들도 왕왕 있다. 하루에 한 번, 늘어날 리 없는 잔고를 확인하는 게 일상이지만 딱히 스스로가 가여웠던 적은 없다. 고생을 감수할 각오로 선택한 길이라 그렇다.


김영하 작가는 책 <보다>에서 자신의 어릴 적 일화를 소개한다. 당시 형편이 좋지 않았던 작가의 집에 놀러 온 부자인 친구가 거실 슬리퍼를 보고 “이렇게 작은 집에도 슬리퍼가 필요해?”라며 그 어떤 공격성도 없이 천진하게 물어봤다던 이야기. 책에서 그는 부와 가난을 보여주는 것은 ‘무지’라고 말한다. 가난에 대한 무지, 부에 대한 무지. 피식 웃을 수 있을 만큼 가볍게 묘사되었지만, 그 어릴 적 에피소드가 기억 속에 남아있던 것을 보면 그에게 꽤나 강렬한 인상을 주었음이 분명하다.


경험으로 추측컨대, 이런 무지는 보통 깜빡이도 없이 훅 들어와 종아리를 걷어찬다. 그렇게 주저앉은 곳에서 비로소 위, 아래가 보이고 나의 위치가 보인다. 언젠가 내가 하고 있는 아르바이트에 대한 이야기를 지인과 나누던 중이었다. 그는 말했다. “나는 너처럼 그렇게 열심히 못 살겠어. 귀찮아.” 듣자마자 피식 한 번 웃고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나의 개인적인 상황을 자세히 알지는 못하는 사람이었고 별다른 악의가 느껴지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하고 싶었던 대답은 있었다.


"먹고사는 데 귀찮은 게 어디 있니. 철딱서니 없는 소리 좀 하지 마라."


주머니의 크기가 인간의 잠재력까지 나타낼 수 있는 지표가 될 수 있을까. 우리는 너무나 쉽게 한 사람의 생을 숫자로 환산하여 판단한다. 누구는 빚을 내서 욕심부려 유학을 왔느니, 돈이 없어 병원도 못 간다느니, 그렇게 형편이 안 좋아 공부를 제대로 할 수나 있겠냐며 걱정인 듯 악담인 듯 알 수 없는 대화가 오갈 때가 있다. '네, 그 돈 없이 유학하는 사람 여기도 있네요.' 나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님에도 흠씬 얻어맞은 것 같다. 팔자가 늘어질 대로 늘어진 인간들의 시간 낭비라며 애써 외면해보지만, 넉넉지 않은 형편에 내가 욕심부리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혹시'가 자꾸 머리를 들이민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은 끊임없이 호주머니의 크기로 재단된다. 큰 꿈을 꾸면 맞지 않게 욕심이 많다고 혀를 차고, 그 크기에 맞게 살아가면 노력하지 않는다고 비난한다. 그래서 돈이 없는 사람들은 자꾸 작아진다. 호주머니를 아무리 매만져도 얕은 깊이를 다시금 확인할 뿐이다. 나 역시도 ‘가난’이라는 말의 무게를 감히 짐작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 쉽지는 않을지언정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고,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는 것은 분명 감사해야 할 일이다. 그럼에도 이따금씩 말 한마디가 머리와 마음을 헤집어 놓는 것을 보면, 아마도 내게 가난은 여물지 못한 마음에 있는 듯하다.



어렸을 때 도라에몽을 참 좋아했다. 영상보다는 만화책을 주로 봤는데, 진구가 곤란한 상황에 쳐할 때마다 도라에몽이 혀를 빼물고 주머니에서 신중하게 무기(?)들을 고르는 그 표정을 참 좋아했었다. 이번엔 무슨 기상천외한 도구들을 꺼낼까, 어떻게 위기의 진구를 도와주려나, 상상에 폭 젖다 보면 다음 장으로 넘기는 것도 까먹을 지경이었다. 그 찰나의 순간에 긴장감이 아니라 기대감에 젖어있었던 것은, 도라에몽의 그 주머니가 반드시 진구를 구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2021년, 나는 상상이라고는 한국 치킨을 떠올리는 것 밖에 하지 않는 현실에 쪼들린 서른 살이 되었다. 그런 내게 도라에몽은, 정답은 외연外緣이 아닌 심연深淵에 있다고 말한다. 그 주머니는 무려 4차원 공간과 연결되어 있어 그 어떤 크기의 물체도 넣었다 뺄 수 있고, 심지어 차원의 이동까지 가능하다. 쓸 만한 것이면 무엇이든 넣어 놓고 필요할 때 손을 뻗기만 하면 닿을 수 있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특별할 것 없는 주머니라도, 그 안에는 또 다른 우주가 있는 셈이다. 그것도 나를 구원할 수 있는 나만의 우주!


개개인이 가진 무한한 잠재력이 유한한 돈의 속성에 주눅 들지 않도록, 도라에몽의 주머니 하나씩은 품에 지니며 살고 싶다. 무용담을 늘어놓던 교수님께도 아마 그 시절 어려움을 극복했던 경험은 그 어떤 순간에도 자신을 지켜줄 소중한 무기가 되었을 것 같다. 그 경험을 무기 삼아 스스로 목표한 곳에 마침내 도달했을 때 비로소 그것은 훈장이 되었을 테다. 궁금하지도 않은 무용담을 쉬지 않고 반복하던 그 마음이, 이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내게도 이 순간이 훗날 빛나는 훈장이 되어 주머니 속에서 반짝일 날이 올 것이라 믿고 싶다. 오늘도 나의 주머니 속 우주는 시나브로 깊어지고 있기에.

작가의 이전글 파란 일상, 나는 우울과 춤을 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