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정우 Oct 05. 2021

종교권유x 결혼식x 장례식x 옥장판x

SNS에 돌아다니는 유머글을 보다 우연히 <오랜만에 친구에게 연락하는 법>이라는 제목의 밈을 하나 봤다. 오랜만에 연락하는 친구에게 뜻밖의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잘 지내니?“라는 말에 앞서 네 가지 X 항목들을 나열한다. 


종교권유x 결혼식x 장례식x 옥장판x. 


특별히 뭘 부탁하려고 연락한 게 아니라 순수하게 상대의 안부가 궁금하다는, 아주 간단하고 직관적인 메시지인 셈이다. 일종의 안전장치라고나 할까. 


나는 기본적으로 연락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다. 하루 종일 메신저를 붙잡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즐긴다는 것이 아니라, 가벼운 안부나 인사를 전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는 뜻이다.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고 차곡차곡 쌓이는 인연들이 많아지면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관계의 거리가 멀어지고 가까워지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굳이 엄청난 사건이 개입되지 않더라도 말이다. 일에 치이고 생활에 치여 아주 가벼운 안부조차 손가락으로 톡톡 써 내려갈 에너지가 없을 뿐. 그렇게 몇 번 타이밍을 놓치다 보면 3-4년의 공백은 금방 우스워진다.  그러나 시간의 공백이 마음의 공백까지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믿기에, 나는 누군가 생각이 나면 주저 않고 연락을 하는 편이다. 가느다란 실로 연결된 플라스틱 종이컵이 꽤나 그럴듯한 전화기의 역할을 해내듯 고작 몇 문장의 짧은 안부로도 우리가 여전히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아, 들리나 오버. 나, 아직 여기에 있어.


작년 추석 즈음이었다. 명절을 앞두고 가족들과 친구들이 모처럼 휴가를 계획한다는 소식이 연이어 들려왔다. 그러다 갑자기 친구 한 명이 떠올랐다. 2년 전 즈음, 같은 동네에 사는데도 좀처럼 보기 어려웠던 그를 추석 연휴기간에 만나기로 했었다. 그런데 마치 기다렸다는 듯 약속한 날짜에 번갈아 일이 생기는 바람에 결국엔 흐지부지 되어 보지 못하고 독일에 오게 되었다. 그 생각이 나 오랜만에 연락처를 뒤져 메시지를 보냈다. "A야, 잘 지내?“ 두근거리며 보낸 메시지가 무안해질만큼, 돌아온 대답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응, 근데 이렇게 갑자기?“


찬 물을 원샷한듯 머리가 찌르르, 얼얼해져왔다. 뭐지. 혹시 내가 이 친구랑 끝이 별로 안 좋았던가? 깔끔하게 마무리 되지 못한 그 때 그 약속에 감정이 상했나? 수만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뜸했던 친구들에게 먼저 안부를 묻는 편이지만 상대방의 이런 반응은 난생 처음이었다. 대부분은 반가워하고 근황을 묻는 말로 이어지기 마련이니까. 그렇게 1차 공격에 얼떨떨한 마음을 부여잡는 동안, 연이은 2차 공격은 단번에 나의 K.O. 패를 이끌어냈다. 


"너 혹시 신천지는 아니지?“


딱 두 문장. 저 두 문장에 나는 지난 삶을 되돌아보고 그간 나의 행실을 다시 한 번 점검했다. 나는 과연 타인에게 어떤 사람이었나. 지금까지 그 어떤 자기계발서와 위인들의 눈물 나는 스토리도 이 정도로 내 삶을 진지하게 성찰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신천지라니. 내 평생 종교를 가져본 적이 없는데! 당혹감에 몇 분 간 답장을 하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A는 다른 동창들에게 내 소식을 물어 신천지가 아님을 확인했다며, 그제서야 반갑다는 답을 보내왔다. 그 후 아주 일반적인 대화가 오고 갔지만 형용할 수 없는 실망감과 충격 때문에 서둘러 대화를 마무리 해야했다.


문제는 이 딱 한 번의 경험이 너무나 충격적이라 그런지, 이제 더는 누군가에게 연락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안부에 담긴 진의가 의심될 정도라면 친구가 맞기는 한걸까? 나는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상대방은 아니었다면? 이런 것들이 고민될 정도면 친한 건 아니었던 게 아닐까? 그래, 그냥 연락하지 말자. 구차하다. 당시에는 안부 인사에 해명까지 덧붙여야 하는 팍팍한 현대사회의 인간관계에 대한 나름의 항변이라 생각했지만, 사실은 앞으로 받을 지 모를 상처에 대한 방어 기제가 작동한 결과였다. 충격의 잔상이 꽤 긴 시간 남아 그 후로도 나는 몇 번이고 그리운 사람들의 카카오톡 프로필을 터치했다 말기를 반복하고는 했다. 상처 받을 일은 없었지만 씁쓸함은 남아 입맛이 썼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내게 신천지냐 물었던 친구 A가 오랜만에 연락이 된 친구에게 종교를 권유 받은 경험이 있다고 했다. 반가운 마음에 달려나간 약속 장소에서 목적지를 알 수 없는 곳으로 끌려갈 뻔 했단다. 사람이 방어적이 되는 데에는 반드시 계기가 있기 마련인데, 왜 그 생각은 못했을까. 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한번쯤은 물어보아도 됐을텐데. 그저 유치한 섭섭함에 매몰되어 친구의 사정을 이해해볼 시도조차 하지 않고 너무 빨리 대화를 끝맺은 건 아니었나 후회가 됐다. 


시간이라는 게 그렇다. 모래바닥에 남긴 크고 작은 흔적들을 순식간에 집어삼키는 파도처럼, 시간 또한 많은 것들을 속절없이 무력화 해버리고 만다. 백사장에 아무리 깊게 I LOVE YOU를 새긴다한들 파도 한 번에 마치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리는 그 허무함. 그 헛된 수고로움에 대한 아쉬움은 누구라도 경험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시간의 태연한 공격에 맞서 이 기억들을 지켜내려면 수고로움을 감수하고서라도 부단히 새기고, 또 새겨야하는 것이다. 시시포스가 된 양 매번 찾아오는 허무감을 딛고 끊임없이 관계를 이고 지며 걸어나가는 데에는 사실 꽤나 큰 에너지와 용기가 필요하다. 한 쪽만 힘을 내는 관계는 오로지 그 사람에게 결말이 달려있고, 가끔은 상대와 마음의 템포가 맞지 않아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 이 작은 생채기에서 비롯된 두려움은 쉽게 포기로 이어지기도 한다. 사실상 폭탄 돌리기와 다를 바 없는 이 복불복의 눈치게임은 인간을 고슴도치로 만들기에 충분하다. 


시간 앞에 무너진 관계를 재건하는데 인간은 얼마나 큰 두려움과 불안을 가지고 있는지, 차분히 나열된 문자메시지 속 X들이 말해준다. 워낙 적나라한 단어 선택 덕분에 안타까운 마음이 먼저 밀려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곱씹어보니 현대의 대인관계 특성에 새로이 적응해보겠다는 우리 인간의 의지로도 읽힌다. 그리고 그걸 우리는 ‚배려‘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그래도 x항목을 나열하는 건 어쩐지 좀 딱딱해보인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 

안부 궁금 O, 보고 싶음 O.

작가의 이전글 바람을 타고 넘어, 연과 같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