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별다른 집중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일을 할 때 TV 프로그램을 틀어 놓는 버릇이 있다. 독일에 와 혼자 지내면서 생긴 버릇인데, 배경에 깔리는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를 듣노라면 비어있는 일상이 조금은 채워지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날도 과제를 하던 중이었다. 즐겨 보는 음악 프로그램이 하는 날이라 패드에 틀어놓고 옆에 세워두었다. 프로의 컨셉이 바다를 배경으로 바를 열어 일반인들을 초대하고 라이브로 음악을 연주해주는 것이라, 바다와 음악을 좋아하는 내게 종합 선물세트 같은 프로였다. 과제를 하면서 힐끔힐끔 곁눈질을 하며 프로를 보는데, 잠깐.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큰 눈에 짙은 눈썹, 웃을 때 시원스레 올라가는 입매까지. 그는 정확한 연도조차 기억 나지 않는, 아주 오래 전 헤어진 전 남자친구였다. 눈을 의심하며 두 번 세 번을 다시 보았지만 그 애가 맞았다. 여자친구와 같이 온 모양이었다. 보통의 커플들처럼 서로의 손을 꼬옥 잡고 감미로운 노랫소리에 눈을 맞추며 웃는 모습이, 좀 웃기지만, 사랑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좋은 감정으로 헤어지지는 못했어도 다행히 시간이라는 약이 잘 들어 미움이 무뎌져 옅은 추억이 됐다.
잠깐의 추억여행 정도면 괜찮았을텐데 안타깝게도 그 순간 책상 위에 놓인 거울 속 나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지져쓰, 이런 몰골이라고? 아무렇게나 묶어 올린 머리, 주스 마시다 흘린 자국이 얼룩덜룩한 트레이닝 복, 거기에 뱅글뱅글 아로미 안경까지. 심지어 최근에는 인생 최고 몸무게를 갱신하고도 줄지 않는 식욕에 스스로 감탄을 금치 못하던 차였다. 박수 세 번 짝짝짝! 길거리에서 마주친 것도 아닌데, 괜한 수치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왜, 모두가 한 번쯤은 그런 상상을 하지 않나. 누가 봐도 뒤집어지게 멋진 모습으로 우연히 헤어진 전 연인과 재회하는 상상. 화면에는 계속해서 그 아이가 더없이 행복한 표정을 짓고 나오는데 나는 겨우 이런(..!) 모습이라니. 왠지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졌던 거다.
동시에 이 감정이 당황스럽기도 했다. 도대체 내가 왜? 잘 되는 것으로 복수하겠다는 그런 원대한 계획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분노에 이를 갈 시간도, 그리워할 시간도 없이 나 정말 열심히 살았는데. 이 감정의 꼬리를 잡고 끝없이 타고 올라가보니 그 끝엔 일상과의 권태가 있었다. 매일 걷는 산책로의 강물도, 버스의 창 밖으로 스치는 풍경도, 이제는 거의 한 몸이 된 것 같은 어지러운 책상도, 그 모든 것들이 따분함을 넘어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일렁여야 할 감정들이 메마르고 나니 하루하루가, 그리고 그 하루를 대하는 마음도 단조로워졌다. 내가 나의 일상을 하대 하다 보면 스스로를 돌보지 않는 것에도 익숙해진다. 영양가 없는 것들로 끼니를 때우고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몸의 모든 근육들을 뻑뻑하게 굳혀버렸다. 그 아이가 함께 있는 사람과 순간의 기쁨을 온전히 누리는 그 모습에 초라함을 느꼈던 것은 내 현재의 삶을 보듬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한 미안함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예기치 못하게 찾아온 자기 객관화의 쓰라림을 시원한 바람으로 가라앉히고 싶어졌다. 오랜만에 걷는 산책로에서 강물은 시시각각 다른 줄기를 땋아가며 흘러가고, 어느새 바람에는 가을의 건조한 공기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시간은 이렇게 똑같이 흘러가는데, 계절의 변화를 눈치채지도 못할 만큼 창 밖의 세상엔 관심이 없었나보다. 권태로움에 승복한 대가로 삶의 귀한 순간들을 놓치는 가혹한 벌을 받았구나. 우거진 녹음의 찬란함도 이제 돌아갈 차례임을 아는 듯 마지막 힘을 쏟아내며 다음의 계절을 준비하고 있었다.
가을냄새가 나기 시작하면 반드시 하는 루틴이 있다. 영화 <비긴어게인>을 보는 것인데, 2013년 작품이니 벌써 8년째 가을이 오면 연례행사처럼 이 영화를 보고있다. 모든 장면이 아름답지만 유독 요즘 따라 생각나는 씬이 있다. 두 주인공이 이어폰을 나누어 끼고 서로의 플레이리스트에서 노래를 골라 들으며 뉴욕의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는 장면이다. 마크 러팔로가 연기한 남자 주인공 댄은 음악을 들으며 보통 때와 같은 공원의 밤풍경을 바라보다 이렇게 말한다.
„이래서 내가 음악을 좋아해. 이런 평범함도 음악을 듣는 순간 의미를 갖게 되니까. 가장 따분한 순간이 갑자기 아름답게 빛나는 진주처럼 변하지. 그게 음악이야.“
댄의 말에 조금 더 보태자면 평범함을 특별함으로 바꾸는 순간은 음악을 고르는 손가락 끝에서, 아니 엄밀히 말하면 그것과 연결된 마음에서부터 시작된다. 하잘 것 없는 가장 보통의 순간에서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아름다움을 포착해내고, 그에 맞는 장식으로 한껏 꾸며주려는 마음.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오로지 나로부터 시작된다. 랜덤으로 재생되는 플레이리스트를 틀고 길을 거닐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아, 지금은 그 노래가 딱일 것 같은데..‘ 그리고 그 노래가 바로 다음 곡으로 흘러나온다면? 형용할 수 없는 그 벅차오르는 감정은 오직 경험한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인생 최대의 설렘을 안겨준다. 생각해보니 그동안 나는 항상 이 우연의 순간에 기대왔던 것 같다. 언젠가는 좋은 날을 맞이할 수 있으리라는 사실상 체념에 더 가까운 희망을 가지면서 말이다. 나의 하루에 총천연의 색을 덧입힐 수 있는 힘이 온전히 내 손 안에 쥐어져 있었음에도 그저 한발 떨어져 삶을 관망해왔다. 저기 닿을 수 없는 곳의 '멋진 나‘와 끊임없이 현재를 비교하고 스스로 초라해지면서.
오늘 하루의 장르 정도는 내가 정할 수 있다. 나는 내 하루의, 내 삶의 연출가이자 주인공이다. 그럴만한 자격도 힘도 있다. 매일 강박적으로 틀던 독일 뉴스 방송을 잠깐 끄고, 음악 스트리밍 어플을 켠다. 일요일의 차분한 아침 해를 맞으며 Hamzaa의 Sunday Morning을 누른다. 웬일로 하늘이 온통 파랗다. 일요일 아침처럼 기분 좋게 해준다는 가사 속 You를 생각한다. 아마도 오늘 내 하루를 만들어 줄 너는, 파란 구름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