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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ulbi Nov 02. 2020

프롤로그의 무게

최윤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

어쩌면 프롤로그는 이 책에서 제일 마지막에 쓰였을지도 모른다. 처음엔 꼭 허공에 떠 있는 것처럼 손에 잡히지 않던 프롤로그 화자의 말이 1장, 2장을 지나 10장까지 따라간 후에야 비로소 그 말뜻의 윤곽이 드러나며 묵직하게 가라앉는다. 이렇게 우리가 화자의 말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하게 될 때, 그 순간 언뜻 드러나는 어떤 의도가 이 의미심장한 프롤로그 안에 새겨져 있었음을 처음엔 알지 못했다. 그렇다면 독자는 이 책을 아주 덮기 전에 다시 맨 첫 페이지로 돌아가 프롤로그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읽어야 하겠다. 왜냐하면 프롤로그는 이 책의 시작이고, 또 마침이니까. 그래서 그것은 프롤로그이고, 그리고 에필로그이다.


당신이 어쩌다가 도시의 여러 곳에 누워 있는 묘지 옆을 지나갈 때 당신은 꽃자주 빛깔의 우단 치마를 간신히 걸치고 묘지 근처를 배회하는 한 소녀를 만날지도 모릅니다. (p.217)


우리는 이 소설이 시작하는 첫 문장서부터 소녀의 존재를 보게 된다. 책을 펴자마자, 장이 소녀를 만나는 것보다도 먼저. 기본적으로 소녀가 누구이고 어디서 왔는지 따위의 최소한의 설명도 거두절미한 화자는, 소녀를 만나면 이러이러하게 대해 달라며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거의 부탁에 가까운 어조에 실어 담담히 옮겨놓는다. 한 소녀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는 우리의 뒤를 따라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화자는 우리에게 그녀를 못 본체 하고 지나갈 것을 권한다. 우리는 그녀를 조용히 지나쳐야 할 것이다. 섣불리 그녀를 동정하지도 말고, 함부로 그녀를 짓밟지도 말고.


여기서 우리가 쉽게 간과해선 안 될 것은, 화자가 우리 독자를 서슴없이 "당신"이라 칭했다는 것이다. 누군지 모를 화자가 초면부터 우리를 너무도 자연스럽게 "당신"이라 부르며 말을 걸었기에, 화자가 그렇게 함으로써 어느새 우리를 이 소설 ‘안’에 존재하게 했다는 것을 우리는 미처 알아채지 못한다. 이것을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될 것이, 화자는 처음부터 독자를 소녀가 길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 중 한 사람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화자는 독자인 우리를 그들과 구분 짓지 않았다, 대신 포개 놓았다. 그리고 그렇게 한 데엔 분명한 의도가 있다. 장을 보라, 그는 “무지스러운 도피의 욕구”(p.218)를 이기지 못한 사람이고, 그것은 소녀가 길에서 만난 다른 모든 사람들이 다 마찬가지다. 앞선 화자의 권고가 무색하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장은, 고로 우리 독자는, 점점 이 소설의 깊은 ‘안쪽’으로 파고들어간다, 좋은 싫은 “장본인”(p.258)의 심정으로.


소녀가 “‘감히’ 때 낀 손가락을”(p.217) 우리에게 뻗을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화자의 어조에서 독자를 소녀를 짓밟은 다른 사람들과 동일시하는 화자의 태도가 드러난다. 이렇게 굳이 독자를 ‘안’에 붙들고 있는 화자의 의도는 무엇일까. 화자는 끝에서 “또 다른 수많은 소녀들”(p.218)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지금까지 독자가 가감 없이 들여다본 그 ‘소녀’가 한 개인의 차원을 넘어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프롤로그는 자칫 비참한 소녀의 모습에 압도된 독자의 시야에서 가려질 수 있는 시대를 조명하는 장치이다. 독자는 이 작품에서 광주를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독자는 소녀의 딱한 처지를 멀리서 동정하는 데에만 그쳐서는 안 될 것이다. 화자는 그것을 경계하기 위해 우리를 진작부터 ‘안’으로 끌어들였다. 이 소설에서 프롤로그가 왜 꼭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가, 그것은 스토리 전개에 도움이 되는 내용을 담고 있지도 않다. 화자는 왜 우리를 주저 없이 "당신"이라 못 박았는가. 소녀로 시작해서 소녀로 끝나는 문장들 속에서 우리는 소녀를 관통하는 시대적 상황을 보아야 한다.


채 한 장이 안 되는 이 가벼운 프롤로그를 독자는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화자는 ‘당신’의 앞에도 어느 날 한 소녀가 나타날지 모른다고 말하고 있다. 그 소녀는 현실에서 온다.


2013. 04. 01




최윤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최윤 소설집』, 문학과지성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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