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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tgrim Oct 29. 2019

67년생 강인구 vs. 82년생 김지영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66년생 강인구가 라면을 먹다 그릇을 집어던진 후 치우는 장면과 82년생 김지영이 아이를 안고 남편과 아이가 식사를 마친 식탁을 치우는 장면에 대한 이야기다.


1. 생활밀착형 폭력세계의 아버지

배우 송강호가 <넘버3> 이후 9년 만에 조폭으로 돌아왔다며 화제를 모았던 <우아한 세계>(2007).  정작 이 영화는 조폭영화라고 태그 붙이기에는 무리라는 평이 많다. 조직의 2인자로 온갖 ‘조폭짓’으로 근무에 시달리다가 퇴근(?) 후 집에 돌아가면 중학생 딸과 예전의 꽁냥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나름 애쓰는 흔한 중년 가장으로 그려진다. 플롯은 클리세하고, 다소 뻔한 조폭 풍경이나 아버지 송강호의 디테일들은 사뭇 생활밀착형 직장인과 다름이 없는, 뭐랄까 조폭으로 은유한 가장들의 생존 다큐 같은 면이 있다. 1인자가 아닌 우리 시대 2인자들의 동화 같기도 하다.


경제발전의 급성장기를 겪었던 우리 사회는 어떤 의미에서 조폭의 세계와 닮아 있다. 가부장적 폭력성이 난무한다. 지금의 성인지 감수성으로 보자면 온갖 대사에서 버튼이 눌려진다. “이 여편네가, 서방이 말하는 데 말이야, 어디서 가시나가, 여자는 말이야” 등등 너무 뻔해서 멍하게 보다 보면 언듯 들리지 않을 정도랄까. 그러나 조직 안에서 송강호의 생존기는 리얼 세계의 우화에 가깝다. 보스의 동생이라는 이유로 거들먹거리며 자신의 계급성을 지키려는 못난 중간보스와의 경쟁 상황에서도 대빵 보스에 대한 충성을 끝까지 지켜내려는 강인구는 조직 구성원으로서는 성실(?)하나 우직하고 우매하다. 딸이 일기장에 ‘깡패 아빠 따위 죽어버렸으면 좋겠어’라고 쓴 것을 보고는 술에 취해 딸 앞에서 칼을 들고 설칠 만큼 자제력도 없고 인내심도 없는 사내다. (경찰서 조사 화면에서 강인구가 67년생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인구는 “살아서 가족들을 챙겨야 해!”라는 직진 마인드 탑재하고 얻어터지고 칼에 찔리고 총에 맞으면서도 살아남는다. 폭력 조직 안에서 폭력으로 대응하며 살아남은 그가 결국 딸이 그토록 원하던 캐나다 스타일의 집을 마련하던 날, 아내는 아이들과 캐나다로 떠나버리고 그는 기러기 아빠가 되어 홀로 서울에 남는다. 혼자 밥을 먹고 빨래를 하고 설거지를 하고 대충 술 먹고 잠드는 날들의 연속. 그는 자기 앞에 앉아있는 환자와 눈도 맞추지 않는 의사 앞에서 당뇨 진단을 받는다. 의사는 “당뇨가 왔네요”라는 짤막한 말 이외는 아무런 말을 해 주지 않았고, 강인구는 “에이, 씨발~”이라며 의자를 박차고 나간다.


그리고 그 다음 장면이 바로 이 장면이다. 혼자 라면을 먹다가 캐나다에 있는 가족들로부터 비디오 소포를 받고 혼자 껄껄 웃으면서 보다가, 점차 눈물을 짓다가, 끝내 목을 놓고 엉엉 통곡해 버리는 강인구. 그리고 격한 감정에 먹던 라면 그릇을 내동댕이 친 후 곧바로 걸레를 들고 치우는 모습. 참, 희한하지. 이 장면에서 나도 그와 함께 울어버렸다. 왜 그랬는지는 잠시 후에 설명할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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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활밀착형 억압세계의 어머니

너무나 잘 알려진 82년생 김지영의 플롯에 대해 긴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겠다. 세간의 평처럼 원작 소설보다는 영화는 각 캐릭터들의 다층적인 입장에 대해 이해하며 다가간다는 점에서 책이 주는 어떤 거리감보다는 친근하다. 그러나 원작이 하고자 했던 이야기는 충실하게 서술한다. 대한민국에서 지난 몇십 년 동안 ‘여성’이라는 사회 구성원들이, 그저 ‘착해야만 했던’ 그녀들이 가랑비에 옷 젖듯 강요된 억압과 폭력에 어디가 어떻게 베이고 어디가 얼마큼 다치고 있는지 설명한다. 이 땅의 ‘지영이’들이 경험한 억압은 67년생 조폭 아재 강인구가 은유적으로 전달하는 억압과는 다른, 매우 표피적이고 오감적인 체험의 폭력이다. 73년생 송주영 나조차도 책으로 풀어낸다면 한 권 거뜬한 분량의 사연이 있으니 말이다.


아들 하나 더 낳으라며 나의 어머니에게 협박에 가까운 말을 서슴지 않았던 친할머니와 함께 살면서 “남자는 손에 물 묻히는 거 아니데이. 니가 가 오빠 밥 차려온나”라는 말씀에 토 달지 못하고 부엌으로 들어갔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있다. 명절이면 장남인 아버지의 7남매와 그 식솔들 도합 서른 명이 2박 3일 동안 북적대던 동안, 새벽녘까지 남은 설거지 달그락거리던 어머니의 뒷모습은 일상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아버지 복은 있어서, “주영아, 대학 졸업하자마자 바로 결혼하고 그러면 니 내 딸 아니데이. 니는 글로벌 시대에 맞게 살아야 한다”며 대학교 내내 성적표 검열하시며 딸의 ‘입신양명(?)’을 기원했던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 그러나 오히려 그 때문이었는지, 과잉의 자존감 탓에 학교에서도, 직장터에서도 나는 ‘over-qualify’(표준초과)가 ‘under-estimated(저평가)’ 되고 있다는 다소 오만한 마음가짐이 원인이 되어 스스로 행복하지 못했다. 그 불행의 원인이 내 마음에 있음을 자각한 후 바로 지금의 남편과 결혼하여 인생 2기를 시작했다.


결혼할 당시만 해도 해외에서 오래 살 줄 몰랐는데, 결국 두 아이를 모두 타국에서 낳아 길렀기 탓에, 젖 떼고 걸음마 떼고 기저귀 떼던 그 모든 과정이 순도 98%의 ‘나홀로육아’였다.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읽다가 지영이가 아이를 데리고 키즈카페를 가던 대목에서 솔직히 나는 부러웠다. 젖먹이 아들을 업고 아직도 기저귀를 차고 떼쓰던 어린 딸을 안아 올리다가 ‘이 놈들 둘 중에 누굴 던져버릴까’ 속삭이던 내 안에 있던 5초의 악마를 확인하고는 그 자리에 주저 않아 펑펑 대성통곡하다가 그 길로 병원으로 달려가 ‘아무 약이나 좀 달라고!’ 부르짖었던 순간과 오버랩이 되었으니까.


귀국 후에 어린이집이라는 호사(?)를 누리면서 ‘under-qualifiy(표준이하)’인 나일지라도 ‘over-estimated(고평가)’해주는 곳 하나는 있지 않을까 하며 일할 곳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서울 시내 한복판 무려 국가에서 운영하는 대형 미술관에 서류통과, 면접통과하여 계약을 앞두고 급히 남매들을 돌볼 시터를 구하려 사방팔방으로 알아보았다. 영화에서 지영이가 결국 시터를 구하지 못하던 과정과 단 하나의 다름이 없는 같은 이야기다. 그리고 단 하나도 다르지 않은 모양과 색깔로 “아이 때문에 일을 할 수가 없게 되었네요”라며 담당자와 마주했다. 가진 것 많아 보였던 73년생 주영이도, 키즈카페라는 알량한 호사를 누렸던 82년생 지영이도 그렇게 자아실현은 덮어두는 것이 되고 만다. 영화에서 지영이의 말대로 ‘그 누구의 탓도 아니다.’ 그러나 수용만 하기에는, 웃으며 그저 끄덕이기에는, 이미 그 자체로 억압이고 폭력이다. 아무리 착하고 어진 남편과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가 있다고 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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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먹고 남은 음식을 치운다는 것 – 가족이라는 이데올로기

그렇다면 질문이 남겨진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아이와의 긴밀한 애착관계를 포기하지 못하는 엄마라는 이유로 느껴지는 억압과 폭력은 제거할 수 없는 것인가? 애초에 결혼을 하지 않거나, 아이를 낳지 않았다면 지영이들에게 음성적으로 가해지는 억압과 폭력은 사라지는 것인가?


질문을 조금 달리 해보자. 남성이라는 이유로,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이라는 이유로 디테일하게 가족 구성원들 챙겨 돌아볼 줄 여유가 없는 바쁜 생계인이라는 이유로 느껴지는 억압과 폭력은 제거할 수 없는 것인가? 애초에 결혼을 하지 않거나, 아이를 낳지 않았다면 강인구 씨들에게 음성적으로 가해지는 억압과 폭력은 사라지는 것인가?


그럴 리가.


이 억압과 폭력은 수위나 강도의 차이를 당겨올 수는 있을지언정, 지영이들도 인구 씨들도 그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다. 아울러 남성들만 가장인 것도 아니다. 현실에는 김지영이면서 강인구여야 하는 무수한 사람들이 있다. (그 역도 마찬가지고) 이들에게 이중으로 가중되는 억압과 폭력은 어찌해야 하는가?


김지영과 강인구에게서 공통적으로 만나지는 어떤 슬픔은 ‘가족’이라는 이름에서 이루어진다. 함께 먹고사는 식구(食口)이기 때문에 우리는 ‘완벽한 가정’이라는 이데올로기에 쉽게 자아를 의탁한다. 행복하게 살고 싶기 때문에 모여 앉아 같이 먹는다. 그런데, 문제는 먹고 남은 자리를 누군가가 치워야 한다는 것, 그것이 가족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하는 행위의 상징이다. 지속하게 해 주는 어떤 역할을 한다는 것, 여기에는 필연적으로 “희생”이 달라붙는다. 여기서 우리는 가장 큰 모순과 직면하게 된다. 희생이 없는 관계는 애정의 지속가능성이 없다. 그러나 희생 그 자체는 억압과 폭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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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희생은 공감 받아야 한다

67년생 조폭 아재 강인구가 제 손으로 집어던져 깨져버린 라면을 치우는 장면에서 눈물이 났던 이유는 그 자발성 때문이었다. 개고생 해서 가정을 지켰는데 자기 자신만 홀로 버려진 느낌. 과거 습관 못 버리고 분노조절마저 안 되는 이 시대 아재들 상당수는 외롭다. 그리고 그렇게 늙어가며 병든다. 그렇다고 하여 그들의 폭력적 과거가 면죄받을 수는 없다. 물이 자주 끊기는 아파트에서 함께 살아보자며 애쓰던 아내에게도, 제발 쪽팔린 짓 좀 하지 말아 달라며 오열하던 딸에게도 아버지 강인구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다. 대한민국 남성들 그 누구도 여기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그는 욕설이 난무하는 현장에서 칼에 찔렸고, 총에 맞았으며, 살아남아 이제는 스스로 집어던져 깨진 그릇과 음식을 치우고 있다. 그래도 치울 줄 아는 그의 등에서 나는 눈물이 펑펑 나는 동질감 같은 것을 느꼈던 것이다. 그도 공감 받아야


82년생 아기 엄마 지영이가 “빨래는 세탁기가 해주고 청소는 청소기가 해주는 데 왜 손목이 아프냐고 의사가 그러더라”라며 그릇을 치우는 모습은 많은 것을 상징한다. 그래, 73년생 송주영도 배울만큼 배웠고 까불 만큼 까불 수 있도록 판이 깔렸던 제법 성평등을 이룬 첨단의 시대를 살지만 여전히 목이 메인다. 배웠던 시대였기 때문에 생기는 억하심정이 아니다. 어린 시절 내내 시골에서 어린 동생들의 육아 담당이라는 이유로 국민학교 졸업이 전부인 나의 착한 시어머니에게도 사회적으로 잘 성장해준 두 아들이 위로가 되는 삶이 아니다. 한동안 우울증 증세에 힘드셨다가 지금은 회복 중이시다. 지금까지도 아버지와 둘이 먹고 남은 식탁을 치우고 있을 우리 친정어머니도 사연은 무구하다. 왜 손목이 아프냐는 그러한 시선 자체가, 그런 관점만으로도 이 시대의 호사를 누리며 기껏 성장한 한 인격이 사라지는 고독함 속에 걷게 되는 일이다.


그래서 더욱,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많은 강인구 씨들도, 미래의 강인구 씨가 될 어린 인구 씨들도.. 여기 어린아이를 안고,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식탁을 치우는 지영이의 손을 잡고 눈물이 펑펑 나는 동질감 같은 것을 느껴야 한다. 그래야 맞다.

희생은 공감 받아야 한다. 그런 공감에서부터 변화가 가능하지 않겠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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