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정체성 갖기
출근하지 않은 지는 이제 좀 되었다. 다만 아직 연차 소진 중이라 엄밀하게는 퇴사를 앞두고 있다.
https://www.sedaily.com/NewsView/29URQQY158
이미 뉴스로도 나왔으니. 살면서 한 번 쯤 겪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레이오프 대상자가 되었고, 아마 내가 외국계 커리어를 이어간다면 언젠가는 또 겪을 수 있는 일이라 미리 경험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며 한 달이 지난 이제는 조금 덤덤해졌다.
지난 시간을 돌아볼 때 센드버드는 나를 알아봐 준, 지금의 매니저와 팀원들을 만나게 해 준, 디자이너로써 더 멀리 꿈꾸고 성장할 수 있게 해 준 참 고마운 회사였다. 오피스에 마지막으로 가서 노트북을 정리하고 함께 일해왔던 매니저와 밥을 먹었다. 두고 온 물건이 없는지 사무실을 층마다 돌아보면서 눈가가 조금 촉촉해졌다.
팀 메신저에 인사도 못하고 떠나게 됐는데 협업했던 분들과 연락이 닿으니 괜히 마음이 슬펐다. 하루 아침에 슬랙 알람도, 출근할 곳도, 하던 일도 없어져서 한동안은 마음이 허했던 것 같다. 정신없이 퇴사 절차를 밟고 포트폴리오와 외주 작업을 하면서 보내니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사람들을 만나면 분명 근무할 시간인데 나와있어서 휴가 낸 거냐고 물어오곤 했는데,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되었는지 입이 떨어지지 않을 때가 있었다. 어쩌다 솔직하게 얘기하면 괜히 분위기가 숙연해지기도 했다. 주변에 알릴 때 ‘이런 일이 있어서 퇴사했는데 금방 이직해서 지금은 더 좋아졌어’라고 하고 싶어서 급하게 다른 회사에 지원해보기도 했다. 그 회사 덕분에 포트폴리오도 업데이트하고 오랜만에 영어로 인터뷰 준비도 하면서 내가 해온 일들을 정리할 수 있었는데 아쉽게도 최종에서는 떨어졌다는 연락이 왔다. 나보다 더 연차 높고 디렉터의 역량을 가진 지원자를 뽑았다고 했는데 지난 3주간의 노력과 기다림이 아쉬워 그날 하루는 속이 쓰렸지만 며칠이 지난 지금 돌아보면 그 산업이, 팀이 나와 핏이 맞지 않았던 거라고 받아들였다. 그래도 처음으로 인터뷰에 참여했던 디자인 헤드에게 커피챗과 인터뷰 피드백을 요청해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얻기도 했다.
비록 채용으로 연결되지는 않았지만 두 번의 영어 인터뷰를 통해 아예 글로벌한 환경에서 일하는 것을 도전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한국에서 5년 후, 10년 후에도 가고싶은 회사가 있을까? 라는 질문에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고, 그 때가서 외국으로 가는 걸 도전하는 것보다 지금이 더 도전하기도, 적응하기도 수월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생각이 점점 뚜렷해지자 영문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glassdoor, blind, linkedin의 잡 리스트 중 나의 연차와 분야에 맞는 공고를 리스트업하는 페이지를 만들었다. 미국 석사 이후 계속 일하고 계시는 학교 선배께 링크드인으로 커피챗을 요청하기도 하고 블라인드도 미국 계정으로 다시 가입했다. 그간은 미국에서 외국인 신분으로 일할 수 있는 비자에 대해 잘 몰랐는데, 당장 현지에서 바로 스폰서를 받기가 쉽지 않을 거라는 것을 깨닫고는 기업 지원과 동시에 대학원도 준비해 보려고 한다. H1B는 4월에 비자를 신청해서 10월부터 일할 수 있는데 그것도 심지어 1/3 확률로만 비자가 나온다니.. 지금 지원해도 기업 입장에서는 나를 고용하기 위해 비자 발급만을 위한 4천만 원의 추가 예산을 쓰면서 내년 10월 입사까지 지금부터 1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건데 아무리 포트폴리오가 좋다고 하더라도 정말 쉽지 않은 일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대학원에 특별히 뜻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STEM 과정이 있는 학과를 졸업하면 3년의 시간을 벌 수 있기 때문에 만약 장학금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것도 방법이겠다 싶었다.
근래 업데이트된 나의 정체성이라 하면, 한국에서 4년의 디자인 경험을 가진 퇴사를 앞둔 디자이너이자 프리랜서 포토그래퍼로, 수많은 기회와 가능성을 앞두고 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아직 해결이 안 된, 답을 찾아가는 과정 중에 있어서 정해지지 않은 미래가 불안하기도 하고 스스로 혹여나 위축될까 봐 알리기 꺼려지기도 했지만, 오히려 내 상황을 알리면서 적극적으로 주변의 도움을 구해보기로 마음먹었다. 흥미로운 포지션에 관한 대화, 해외 유학 혹은 이직에 관한 조언, 특별한 목적없는 커피챗 등등에 열려있다.
일단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시도해 보려고 한다. 4월 정도까지 일하지 않아도 스스로 용인할 수 있는 수준의 소득이 있을 때, 나는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무엇을 준비할지 고민하던 차에 한 영상을 봤다.
https://youtu.be/Si7WfBeX5OY?si=18FaoBXlmHhjOdxK
샘 알트만도 본인만의 여유를 가지고 1년 정도는 쉬면서 해보고 싶었던 공부를 하고, 여행하고, 사람들도 만나며 많은 것을 배우고 기회를 얻었다고 했다. 급한 마음으로 어디든 이직하는 것보다 몇 달은 푹 쉬는 게 좋을 수도 있고 지금은 생각하지 못하는 새로운 방향을 찾을 수도 있을 텐데, 한창 열심히 일할 연차이기도 하고 내가 마음 편히 쉬지 못하는 성향의 사람이라서 말이다. 영상, 3d, ai 그래픽, 웹 포폴, 웹사이트 공부 등 하고 싶은 것들은 많았는데, 쉬는 동안에 통으로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촘촘하고 부지런하게 꾸려갈지 고민해 봐야 할 것 같다.
쉬는 동안 내가 해야 하는 일 딱 한 가지가 있다면, '나에게 어려운 일'에 도전하기, '숨이 턱 막히고 두렵고 도망치고 싶은 그런 일을 굳이 해보기'인 것 같다. 다행이라면 이번 달에는 영어 인터뷰, 처음 해보는 유형의 사진 외주가 나의 컴포트존을 벗어나는, 껄끄럽지만 해볼 만한 것들이었다. 완벽하다고 할 수 없지만, 그래도 해낸 경험이 뭔가를 도전하는 데 있어서 용기를 주는 것 같다. 앞으로도 '돈을 받고 진행하는 부담스러운 멘토링', '평가받을까 두려운 포지션 지원', '떨어진 자리에 대한 피드백 받기', '유학이든 / 취업이든 홀홀단신으로 도전해보기', '교환학생 갈 때조차 피했던 영어 성적내기' 등등이 남아있다. 그래서 무섭지만.. 기쁘기도 하고 양가감정이 든다. 이제 남는 건 시간 뿐이니 하나씩 부수는 재미로 남은 시간들을 채워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