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문동에 위치한 '태림산채정식'이라는 식당을 좋아한다. 백반과 한정식 사이쯤의 가격대인 식당인데, 그곳에서 판매하는 더덕구이는 불에 살짝 그을린 고추장 사이에 부드럽게 익은 더덕의 향이 향긋하다. 봄나물에서 느낄 수 없는 뿌리채소의 묵직한 바디감과 감칠맛, 향은 매년 가을을 기다려지게 만든다.
더덕이 일상적인 재료는 아니다. 양파, 감자, 당근처럼 요리에 활용 빈도가 높지 않고, 가격 또한 저렴하지 않기 때문에 1년에 한두 번 '더덕(고추장) 구이'로 해 먹는 정도로 충분해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더덕에도 재료 본연의 다양성은 당연히 존재한다. 다양성을 알면 고추장구이 외에 이 재료가 가진 향을 활용해 다채롭게 먹고 싶어 진다. 꼭 요리를 하지 않더라도, 매년 돌아오는 가을마다 더덕을 마주치면 '더덕, 진짜 다양한데' 하는 생각이 들며 장보는 재미가 하나 더해질 수 있다.
한국, 중국, 일본 중 유일하게 더덕을 먹는 나라
한반도에서는 더덕을 언제부터 먹었을까?
고려 중기, 송나라 사절이었던 서긍이 지은 책인 <고려도경>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관에서 매일 내놓는 나물에 더덕이 있으니, 그 모양이 크고 그 살이 부드럽고 맛이 있어 약으로 쓰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중국에서는 약으로 사용하고, 일본에서는 관상용으로 재배하는(심지어 공원에 널려있다고 한다) 더덕을 한반도에서는 무려 고려시대부터 '매일 내놓는 나물'이었다니 그 기나긴 식용 역사를 짐작볼 수 있다.
제주 더덕의 싱그러운 향, 봄 더덕의 단맛
대부분의 농산물이 그렇듯 더덕도 그냥 '더덕'이라는 이름으로 판매된다. 최근 마트에 가면 토마토나 딸기에는 품종명을 붙여 판매하기도 하는데, 이는 사람들이 해당 품목에 대해 관심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구입하는 빈도가 늘어나면 매일 먹던 것보다는 새로운 것, 조금이라도 다른 것을 고르게 되는데, 더덕은 먹는 빈도수가 적기 때문인지 다양성이라는 키워드가 어색하게 느껴진다.
더덕/도라지 골목이 있는 '경동시장' 에는 '약용', '반찬용'으로 구분해 판매한다. 잔뿌리가 많으면 '약용', 잔뿌리가 적고 원뿌리가 굵으면 '반찬용'이라고 명명한다. 재배 년수가 길수록 잔뿌리가 많아질 수 있으나, 토양에 돌이 많을 경우(강원)에도 잔뿌리가 많아진다. 사포닌은 껍질 부근에 많기에 비교적 껍질 부근의 표면적이 큰 잔뿌리가 많은 더덕이 약효면에서 더 높을 것으로 예상되나 정확한 연구 결과는 찾아볼 수 없다. 아무튼 이번 글에서 소개하고 싶은 내용은 약효보다는 지역과 계절에 따라 다른 더덕의 맛과 향이다.
① 강원 더덕 / 제주 더덕
강원과 제주의 더덕 생산지를 갔을 때, 육안으로 봐도 토양이 확연하게 달랐다. 우선 강원의 땅은 수분기가 적은 푸슬푸슬한 흙에 모래와 유사한 옅은 색이었다. 또한 돌이 굉장히 많아서 수확하면서도 큰 돌과 작은 돌을 빼내야만 했다. 제주의 경우 알려진 대로 검은흙에 수분기가 많은 촉촉한 흙이고 그 입자가 매우 곱다. 돌은 거의 없다. 뿌리채소 입장에서는 생장하는데 방해 요소가 없고, 수분과 양분이 적당하면 빠른 속도로 자랄 수 있을 거다. 그러한 측면에서 보자면 강원은 더덕에게 조금 버거운(?) 환경이다. 때문에 생장 속도도 느리다. 제주 더덕은 2년 만에 수확할 수 있는 것에 비해 강원 더덕은 3년을 키워야만 시장에서 판매할 정도의 크기가 된다.
강원은 더덕의 최대 주산지이며, 전국 더덕 생산량의 71%를 차지한다. 우리가 먹는 대부분의 더덕은 강원산이라고 볼 수 있는 거다. 제주보다 재배 년수가 긴 강원에서 왜 더덕을 더 많이 생산할까? 제주는 워낙 타작물(당근, 무, 귤 등) 재배 역사나 생산량이 많은 편이라 상대적으로 더덕을 기를 확률이 낮아서 일수도 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건 고도가 높을수록 더덕 본연의 진한 향을 많이 느낄 수 있다. 농촌진흥청 조사에 따르면 재배하는 장소의 고도가 높을수록 사포닌 향기가 높아진다.
재배 환경(지역)에 따라 어떻게 맛이 달라질까?
경동시장에서 판매하는 제주 더덕(좌), 강원 더덕(우)
몇십 년간 더덕을 판매해온 시장 상인과의 인터뷰 및 실제로 비교해 먹어본 결과, 우리가 흔히 말하는 더덕향은 고도가 높은 강원 더덕에서 더 많이 난다. 묵직한 바디감, 감칠맛, 흙향, 우디한 향과 함께 쓴맛도 함께 가지고 있다.
반면, 제주 더덕은 토양이 함유하고 있는 수분이 많기에 비교하였을 때 정말 촉촉하다. 단맛도 강하고 아삭아삭하며 조직이 연하다. 더덕에서 쉽사리 느끼기 힘든 싱그러운 풀향, 과일 계열(풋사과)의 향까지 가지고 있다.
흔히 더덕구이를 할 때 밀대로 더덕을 두들겨 펴게 된다. 이 작업을 할 때, 제주와 강원 더덕의 조직이 확실히 다르다. 강원 더덕은 섬유질을 따라 펼쳐진다. 반면 제주 더덕을 펼쳐지지 않고 깨져버린다. 섬유질이 적고 수분이 많아, 마치 사과를 밀대로 쳤을 때처럼 부서지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아래와 같다.
- 강원 더덕 : 묵직한 바디감, 감칠맛, 흙향, 우디 한 향, 수분이 적음, 섬유질이 많음 - 제주 더덕 : 단맛, 싱그러운 풀향, 과일향(풋사과), 수분이 많음, 조직이 연함
② 봄 더덕 / 가을 더덕
대체로 지상부의 잎과 줄기가 낙엽처럼 저무는 가을 즈음에 뿌리채소를 수확한다. 작물은 가을이 되면, 겨울을 나기 위해 뿌리로 양분을 저장하는데 인간은 그 시기를 노려(?) 수확해 홀라당 먹어버리는 것이다. 식물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그때가 영양가가 높고, 맛도 있다.
더덕 또한 가을부터 시작해 봄까지 수확하여 판매한다. 월별로 나누자면 일반적으로 가을 더덕은 10~11월에 수확한 것을 뜻하고, 봄 더덕은 3~4월 즈음에 수확한 걸 말한다. 맛으로 보면 겨울을 지나 월동했을 때 수확한 봄 더덕의 단맛이 더 강하다. 모든 월동 뿌리채소가 그렇듯 전분 형태로 양분을 저장했던 뿌리채소가 시간이 지나 호흡을 하며 양분을 소모한다. 이때, 전분을 포도당으로 잘게 분해한다. 인간은 전분 형태보다는 포도당으로 잘게 분해된 형태에서 단맛을 더 높게 느끼기에 월동한 채소가 맛있다(단맛이 높다)고들 한다.
과일 같은 제주 더덕, 단맛이 강한 봄 더덕의 맛을 알고 나면 고추장 구이로만 해 먹기엔 무언가 아쉽다. 식재료의 다양한 맛과 향 정보와 더불어 본연의 특성을 활용한 조리법이 필요한 이유다. 다음화에는 더덕순과 청더덕, 홍더덕에 대해 다룰 예정이다. 돌아오는 봄에는 더덕의 단맛을 활용해 어떤 요리를 해볼까 상상하고, 기대하게 되는 겨울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