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둘째 고모가 해준 카레에는 사방 3cm는 되어 보이는 당근이 큼지막하게 들어가 있었다. 씹었을 때 감자처럼 부드럽게 으깨지지도, 그렇다고 애호박처럼 은근한 단단함이 살아있지도 않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당근의 식감이 괴롭기까지 했다. 그러한 당근 트라우마(?)를 깨고 겨울이면 제주 당근을 박스째 주문하는 당근 마니아가 되었다. 제주 당근에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을까?
근 2년이 지났지만, 제주도 구좌읍 당근밭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최근 버린 하얀 신발도 몇 해 지난 그때를 온몸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구멍 숭숭 뚫린 제주의 까만 돌은 세월의 풍파를 맞아 아주 고운 흙이 되었고, 현재 제주의 까만 흙인 ‘흑색 화산회토’가 되었다. 마치 까만 흑색의 파우더 같은 곱고 세밀한 흙은 운동화에 묻어 닦이지도 물에 지워지지도 않았다. 당근은 우리가 식용하는 부위인 주황색 뿌리를 땅에 묻고 있는 채소이다. 잎채소나 열매채소보다 토양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 것은 당연하다. 뿌리가 썩지 않고 영양분을 잔뜩 머금어야 하므로 물이 고여있지 않고 잘 빠져야 하며, 토양의 양분도 충분해야 한다.
봄이 되면 식물은 번식을 위해 줄기를 길게 늘이고 잎을 펼친다. 광합성을 충분히 하며 꽃을 피울 준비를 한다. 반면, 가을과 겨울이 되면 땅 위의 기관들은 가로수의 낙엽처럼 갈색이 되어 바싹 말라간다. 그때 통통 해지는 것이 뿌리인데, 추운 겨울을 무사히 지나 다시 새로운 봄을 맞이하기 위한 채비를 하는 것이다. 다른 지역과 다르게 제주에서는 겨울에 당근을 재배한다.(봄이 되면 경상도 지역에서 재배하는 식으로 따뜻해지면 재배지역에 점점 북쪽으로 향한다.)겨울에 자란 채소가 맛있다는 이야기가 많다. 식물은 겨우내 얼지 않기 위해 체내에 당 함량을 높여 어는점을 낮추기 때문. 학창 시절, 과학 선생님이 알려준 것처럼 설탕물이 생수보다 늦게 어는 것을 식물은 몸으로 알고 있다.
까만 흙을 씻어낸 당근을 썬다. 자른 단면은 물이 흐를 듯 촉촉하고 색이 선명하다. 기름에 달달 볶았을 때의 퍼지는 은은한 단맛도, 입안을 채우는 허브 계열의 향도 봄을 떠올리게 한다.
앞서 말한 흑색 화산회토가 제주 전 지역을 메우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방문했던 당근 농장은 제주 구좌읍 안, 각각 다른 환경에서 당근을 키우고 있었다. 산으로 둘러싸인 평지의 흑색 화산회토에서도 당근을 재배하고 있었지만, 바닷가 근처의 푸슬푸슬하게 마른 흙인 ‘패사토’에도 당근을 생산하고 있었다. 패류가 잘게 쪼개진 ‘패사토’에 감싸진 채로 바닷가 근처의 짠기와 강한 바람을 머금은 당근은 흑색 화산회토에서 자란 당근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흑색 화산회토에서 키운 당근은 미나리 같기도 한(실제로 당근은 미나리과 채소이다) 강한 허브향을 잔뜩 머금었다고 한다면, 바닷가의 강한 바람과 짠기를 머금은 당근은 단맛이 강하고 향이 순해 허브 계열보다는 감자 같은 서류 향이 났다. 같은 제주, 같은 품종의 당근이라도 환경에 따라 전혀 다른 맛을 낸다니 이 어찌나 신기하고 재밌는 당근의 세계가 아닌가.
제주 당근이 맛있는 이유를 알게 되니 마트와 시장에서 만나는 당근들의 고향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공부란 ‘세상을 보는 눈의 해상도를 높이는 행위’라는 말이 있다. 매일 식탁에 올라오는 재료와 음식의 뒷이야기를 알게 되면 매끼마다 한 뼘 더 행복해질 수 있으리라,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