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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망샘 Mar 01. 2020

암 진단이 차라리 반가웠던 그녀들

삶의 밑바닥에서 피어나는 희망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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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방암을 진단받고 수술 전 6개월간 선 항암이 이루어졌다. 항암주사를 맞는 일은 어떤 한의사 표현을 따르자면 '독극물을 때려 붓는 일'과 비슷하다. 링거 바늘을 통해 약제가 흘러들어 가는 동안 마치 마루타가 된 기분으로, 그러나 거부할 수도 없는 치료니까 최대한 컨디션이 나빠지지 않기 위해 좋아하는 유튜브를 보거나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차라리 잠들기 위해 노력한다. 이 과정이 끝나서 집에 오면 다시 항암주사 맞으러 가는 3주간 내 몸속 구석구석을 흘러 다니는 항암제가 드러내는 부작용에 하나하나 극진히 응대해야 했다.


아프기 전에 기초체력이 나쁘지 않아서인지 심한 부작용은 없었지만 구내염과 식욕부진은 끝까지 나를 괴롭혔다. 입안이 헐고 식욕이 도무지 나지 않으니 당연히 식사를 못하는데 체내 항암제 독성을 이겨내려면 잘 먹어야 한다는 딜레마에 빠져 매일 허덕였다. 6번째 항암제를 맞고 나자 컨디션이 심하게 나빠지고 열이 올라 가까운 대학병원 응급실에 가야만 했다. 무균실에서 검사 후 특이사항 없다고 하고 되돌아온 후에도 다시 열이 오르자, 나는 그제야 백기를 들고 요양병원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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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양병원은 우리 사회의 또 하나의 거울이었다. 여성암 전문병원이라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이들을 보며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고 그녀들 삶의 결이 우리 사회를 잘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셋씩 모이면 우리는 왜 암에 걸렸을까가 늘 화제로 올랐는데 여러 가지가 모두 빗나가도 공통적인 요인 한 가지는 바로 심적인 스트레스였다. 살면서 스트레스가 어찌 없을 수가 있느냐고 할 텐데 너도 나도 스트레스가 쌓여 그것이 암이 되었다는 사회가 정상은 아닐 것이다. 어떤 경우는 심하게 말해서 제목에서처럼 차라리...... 암 진단이...... 반가웠다고 한다.

반가운 이유가 거액의 보험금 때문이라는 그런 단순한 차원의 것이 아니다. 보험금이 아무리 커도 목숨 값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녀들이 암 진단받아서 다행이라고 (실제로 그렇게 말했다) 한 이유는 암이 아니면 도저히 이 숨 막히는 삶의 수레바퀴를 멈출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내 귀를 의심했고 두 사람째 들었을 때는 가슴이 무너져 내렸고 세 사람째 들었을 때는 눈물이 흘렀다. A는 지방에서 식당을 오랫동안 경영하는데 장사가 잘되든 못되든 단골을 뺏기지 않으려 하루도 쉬지 못했는데 암에 걸리니 이제야 쉴 수 있다고 했다. B는 맞벌이하는 직장인인데 일과 육아에 지쳐 쉬고 싶어도 안정된 직장을 그만둘 수 없으니 브레이크 없는 기차처럼 달릴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내 눈에서 눈물 흐르게 한 C는 홀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갈등이 심해 돈보다는 숨통 트이기 위해 직장에 나갔고 하루 쉬는 휴일에도 출근하는 것처럼 혼자 사는 여동생 집에 가서 오직 잠만 자다 오는 생활을 십 수년 했다고 했다. 암에 걸려 이 곳 요양병원에 들어오지 않았으면 계속 그렇게 살고 있을 거라고 흐느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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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걸리는 게 어떻게 다행일 수 있을까. 암의 공포는 그 어떤 것보다 무서운 것이지만 그것 이상의, 삶을 찍어 누르는 듯한 고통과 스트레스가 컸다고 볼 수밖에 없다. 암에 왜 걸렸는지 모르겠다고 억울해하는 경우도 드물게는 있었다. 그러나 암 진단받는 시점으로부터 10년~15년 전에 이미 암세포가 몸속에 자리 잡았다는 의학상식을 감안하면 정말로 한국사회를 살면서 스트레스가 없을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한국 사회에서 스트레스받지 않고 사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는 남보다 뛰어나야 한다는 의식이 만연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어떻게든 어떤 분야든 특별해지려고 기를 쓰며 살았고 그렇지 않으면 낙오된다고 교육받았다. 최선을 다해 열심히 바쁘게 사는 것이 지상 최대의 미덕으로 여겨지고 늘 타인과의 비교가 뒤따른다. 누구나 삶의 주인이 자신이라는 걸 알지만 현재의 모습에는 만족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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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먹방이 많아 제목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우리나라 연예인이 북유럽에 가서 포장마차를 열어 음식을 파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그들 나라의 오후는 마치 휴가라도 온 듯한 느긋한 모습이었는데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들이 그렇게 살 수 있는 이유가 엄청난 세금 징수로만 가능한 복지정책 때문이라고 하겠지만, 내가 부러운 것은 그들의 사고방식이다. 무엇을 가져야만 행복하다는 생각 자체가 없는 듯이 보인다. 남을 부러워하지도 않고 모방하지 않는다. 그래서 타인에게 지나치게 관심을 보이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존중한다.


이누 파르타넨의 <우리는 미래에 조금 먼저 도착했습니다>에는 '얀테의 법칙'이 나온다. 얀테라는 가상마을에서 사람들이 지켜야 할 사고방식을 십계명으로 표현했는데 이것이 북유럽 사람들의 심성을 잘 보여준다.

1. 당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2. 당신이 다른 사람들처럼 선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3. 당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4. 당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낫다고 확신하지 마라
5. 당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안다고 생각하지 마라
6. 당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7. 당신이 뭔가를 잘한다고 생각하지 마라
8. 다른 사람들을 비웃지 마라
9. 누구든 당신한테 관심을 갖는다고 생각하지 마라
10.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한마디로 자신이 특별하다는 생각을 버리라는 거다. 삶의 기준을 타인이 아닌 자신으로 삼으라는 뜻이다. 우리 사회가 가진 민첩함과 세련됨도 버릴 수 없는 중요한 가치긴 하지만 몇 년 사이에 크게 아만자가 늘어나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그래서 무엇이든 자꾸 내려놓고 낮추고 비우는 연습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 같다. 만약에 이런 사고방식이 우리도 가능하다면 스트레스는 절반 이하로 줄일 것이고 암을 예방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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