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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망샘 Mar 12. 2020

동백꽃 피는 그곳에 가려네

삶의 밑바닥에서 피어나는 희망샘 이야기

작년 말 눈길을 사로잡았던 드라마가 있었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과 김유정의 <동백꽃>을 버무려 제목을 지은 듯한 <동백꽃 필 무렵>, 이 드라마는 흥행 돌풍이라고 할 만큼 인기를 얻었다. 로맨스와 스릴러를 넘나드는 탄탄한 대본에 주조연 단역 모두 빛나는 연기를 한 배우들이 흥행의 비결이라고 하지만 나는 다른 관전 포인트를 갖고 있었다. 프랑스 작가 뒤마가 쓴 소설 <춘희>가 떠올라 동백꽃을 가슴에 달고 다닌 창부의 사랑이야기가 어떻게 그려질까 하는 것이었다. 여주인공이 동백꽃 같이 아름답고 강인한 생명력을 가졌다는 모티브만 같을 뿐 다른 공통점은 찾아내기 어려웠다.


드라마에서 동백(공효진 분)이 운영하는 밥집(술도 파는) 입구에 ‘카멜리아‘라고 쓴 간판이 자주 클로즈업되자 나는 카멜리아를 검색해서 동백꽃의 영어라는 것을 알았다. 공효진은 고아 아닌 고아로 외롭게 살다가 미혼모로 아들을 낳아 키우는, 씩씩하면서도 매혹적인 동백이를 연기했다.
그녀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브라운관을 누비며 나를 울리고 웃겼다. 그녀는 둘도 없는 한국판 춘희가 되었다.



궁금했죠? 나는 이렇게 생겼어요.


<동백꽃>이라는 소설을 학교 다닐 때 배운 이후로 그 꽃이 줄곧 보고 싶었다. 여러 번 허탕을 친 후에야 어느 해 초봄 선운사에서 동백꽃을 보았을 때의 감격은 아직 잊지 못한다.


선운사의 동백꽃이 유명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송창식의 노래로, 최영미의 시로 막연히 상상만 하다가 내 눈으로 선명한 자태를 보는 순간 저절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노란색도 하얀색도 아닌 아주 진하고 강렬한 붉은색에 놀라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꽃들이 거의 다 진 후에 한두 송이가 나뭇가지에 남아있었는데 그 고혹한 아름다움을 무엇으로 표현할까. 마치 ‘궁금했죠? 나는 이렇게 생겼어요.’라고 속삭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미 절정기가 지난 후였다. 늘 동백꽃과는 술래잡기를 하는 것 같았다. 한겨울에 피는 동백을 보기 위해 남쪽으로 여행 다니는 삶은 내 주변만 어슬렁거릴 뿐 도무지 손에 쥐어지지 않았다.  내 삶은 신산했다. 동백은 기억에서 멀어져 갔다.


몸속의 수액으로 엿을 고듯 진하게 졸여서 뿜어내


그러다가 최근 투병생활에 선물같이 찾아온 기회를 얻어 제주도 동백꽃을 원 없이 두 눈에 담아 돌아올 수 있었다. 서귀포의 주상절리를 걷다 보니 동백나무들이 가로수로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한겨울 찬바람에 더욱 단단하게 꽃송이를 피워내면서도 연신 송이째 떨어지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나무 주위를 피로 물들여놓은 듯해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현장과 마주했다. 아, 이 붉은색은 어디서 왔을까. 꽃들이 저마다의 색을 만들어내는 것이 신비로웠다.


파브르는 <파브르 식물기>에서 식물은 제 몸속을 흐르는 수액에 맞는 재료를 섞어서 꽃의 색과 향기를 만들어낸다고 했는데 동백꽃의 색깔은 남도의 한을 담아 제 몸속의 수액으로 엿을 고듯 진하게 졸여서 뿜어내는 것 같았다. 기묘한 느낌을 주었다. 나는 사진 밝기 조정으로 진분홍의 동백나무로 만들었다. 동백꽃이 지천으로 피어있는 제주도에서 나는 생명의 아름다움을 느꼈다.


‘6명에게 새 삶 선물한 10대 소녀, 동백꽃 되어 우리 곁에’


제주에서 돌아온 나는 인터넷 신문에서 어떤 기사를 충격적으로 접했다. 한 소녀가 꽃이 되었다니 소설 속 이야기인가 궁금했다. 눈길을 사로잡는 제목에 홀린 듯 스크롤을 내리며 기사를 읽어가던 내 눈에 눈물이 맺혔다.


4년 전 제주도에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열여덟 살 소녀 김 양이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를 당해 뇌사에 빠졌다. 임종을 앞두고 부모는 6명의 이름 모를 미국인들에게 장기기증을 결정했다. 그중 한 명인 꽃다운 미국 소녀를 초청하여 김 양의 4주기 기일에 서귀포에서 동백나무를 식수하는 행사를 한 것이다.


법률에 따르면 장기기증 측과 이식인 측은 금전이 오갈 수 있는 우려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개인정보를 제공하지 못한다. 국내가 아닌 미국에서 이뤄진 장기기증이라 가능한 행사였다.  김 양은 동백나무가 되어 서귀포로 돌아왔다.
나는 눈물을 닦으며 동백꽃이 떨어져 피로 물들인 듯했던 그 주상절리로 향하는 가로수를 생각했다. 아름다운 제주에서 이역만리 땅으로 숭고한 생명이 그렇게 이어지고 있었다.



이것들도 나와 같구나


아프고 나서 달라진 것은 길가의 나무 한 그루, 공원의 꽃 한 송이에도 눈길이 오래 머문다는 것이다.  이것들도 생명이구나. 살아내려고 애쓰고 버티는구나. 그 안간힘으로 한겨울을 나고 있었다. 나의 투병과 다르지 않았다. 아니다. 식물들은 좌절을 모르니 나보다 수천 배는 강인하다.


거실 창문을 활짝 연다. 신선한 공기가 몽글몽글하게 바람을 타고 들어온다. 지천으로 봄꽃들이 흐드러질 따뜻한 봄날을 기다린다. 동백꽃은 다 떨어졌어도 그 흔적은 남아있을 남쪽의 섬을 그려본다.


어렵게 찾은 그곳에서 설령 동백의 흔적조차 보지 못해도 괜찮다. 내 마음은 이미 붉은 동백이 만발해있고 생명력이 용솟음치고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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