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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선혜 Feb 18. 2023

내 강의를 누가 들으러 올까?

시시하지 않은 시작은 없으니까


하루에도 몇 번씩 스팸 전화가 걸려오지만, 앞자리가 9로 시작하는 번호는 무조건 받는다. 딸이 다니는 학원이거나, 휴대전화를 빼먹고 간 딸일 확률이 높으니까. 9번은 집 근처에서 걸려오는 전화다.




   

'02-944-****'

얼른 통화버튼을 누르자, 낯선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강사님, 안녕하세요. 롯데 백화점 문화센터입니다. 27일에 진행될 강의 때문에 전화드렸습니다."

'강의'라는 말에 스피커폰 버튼을 끄고 휴대전화를 귀에 가져다 댔다. 








아이는 어릴 때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촉감 놀이나 쿠키 만들기 같은, 집에서 하기엔 엄두가 안나는 일을 낯선 또래들과 마음껏 할 수 있었다.  아이가 크면서 갈 일이 없어진 그곳에서 지난달 강의 관련 미팅을 했다.





강의를 기획하는 담당자님은 3040 여성들, 특히 주부들을 위한 에세이 강좌를 열고 싶었다고 하셨다. 나이대가 비슷한 강사라 수강생분들이 더 친근하게 여길 거라 기대하시는 듯했다.





"문화센터는 저희 아이가 첫 사회생활을 한 곳이에요. 아이가 다 컸다고 문화센터를 떠나는 게 아니라, 엄마들도 여기서 다시 연결되어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내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시더니 추가 질문 없이 봄학기 강의 시간을 잡아주셨다. 3월부터 12주 동안 '나의 마음을 돌보는 글쓰기'를 진행하기로 했다. 담당자님은 본격적인 강의 시작 전에 원데이 특강도 한번 하자고 제안하셨다. 나는 망설임 없이 수락했다.





이렇게라도 정세랑 작가님 옆에 있을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문화센터에 처음 지원서를 보낼 때는 '누가 나한테 강의를 맡길까?' 의심했다. 막상 강의를 맡게 되니 '누가 내 강의를 들으러 올까?' 걱정됐다. 누군가가 문화센터 전단지를 들여다보다가 '해볼 만하겠는데?'라는 만만한 마음으로 수강신청 해주셨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하지만 도서관이나 지자체에서 무료로도 들을 수 있는 좋은 강의가 넘친다. 아니, 유튜브만 켜도 고수들의 글쓰기 팁을 쉽게 접할 수 있지 않은가. 한 명도 안 올 수도 있다, 폐강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예방주사를 맞듯 실망에 대비하려니 강의 준비도 잘 되지 않았다.





"강사님, 27일에 있을 특강 신청자는요..."

'아무도 없구나. 나 같은 무명작가한테 글쓰기를 배우겠다는 사람이 있을 리 없지. 굳이 돈까지 내면서 말이야.'

나는 침을 한번 꿀꺽 삼키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네 명이 신청하셨어요. 혹시 몇 명 이하면 폐강하실 예정이세요?"








'이게 내 흑역사가 되면 어떡하지?'



책을 준비하면서 내 글이 별로라는 생각 들 때마다 걱정했었다. 나중에 읽으면 얼마나 어설프고 민망할지 미리 부끄러워했다. 강의도 마찬가지였다.  '내 이름을 걸고 하는 강의인데, 인원이 너무 적으면 부끄럽겠지?' 그냥 지금 폐강해 버리면 서로 민망한 상황은 피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비록 멀리있지만, 내 눈엔 크게 보였던 윤홍균 작가님


 


그때 자존감 수업을 쓴 윤홍균 작가님께서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지금은 이렇게 큰 시청 강당에서 강의하고 있지만, 아주 초창기에는 아무도 안 와서 관계자 세명만 모아놓고 강의하는 민망한 상황도 벌어졌었다고. 수많은 청중들이 함께 웃고, 작가님도 웃으셨던 그날의 기억이 적절한 타이밍에 떠올랐다.  





"저는 인원이 적다고 해서 꼭 폐강해야 하는 규칙이 있는 게 아니라면, 신청자가 한 명이어도 강의하고 싶어요. 그분이 저를 믿고 선택하신 건데, 인원이 적다고 취소할 수는 없어요. 혹시 신청하신 분이 너무 소규모라서 불편할 수도 있으니 사전에 고지해 주시면 좋겠어요."





의욕 넘치는 나의 대답에 담당자는 "재료비가 없는 수업은 당일에도 취소하는 사람이 많다"면서 진정시켰다. 그래도 마음은 바뀌지 않았다.








아이와 도서관에 갔다가, '세상에서 가장 큰 나무'라는 책을 본 적이 있다. 세계에서 제일 큰 나무는 아파트 37층 높이쯤 되는 세쿼이아 나무인데, 그 씨앗은 고작 토마토 씨앗만 하다고 했다. 세쿼이아가 그렇게 오래 살고 크게 자라는 건 씨앗이 크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를 잘 지키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세쿼이아 줄기에 있는 타닌이라는 물질이 곰팡이가 피지 않고, 곤충이 다가오지 못하게 해 준다고.







처음 씨앗일 때는 누구나 작다. 모든 처음은 시시하다. 어쩌면 흑역사가 아닌 시작이 있긴 할까? 씨앗처럼 작은 나의 시작을 흑역사라고 꼬리표 붙이지 않고, 얼마나 커질지 모르는 세쿼이아 나무가 될 거라고 기대하고 싶다. 부끄럽고, 쑥스럽겠지만 나의 마음을 스스로 잘 지켜가면서 계속 자라고 싶다.





나는 이제 폐강될 걱정은 그만하고, 특강비 만원을 낸 사람이 '시시하다'라고 느끼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준비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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