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c 31, 2021
이태 전 영주에 있는 부석사에 갔었다. 여름의 끝자락이었다. 산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보통의 산사와 달리, 부석사의 가람은 좁고 가파른 산등성이를 따라 배치돼 있다. 그래서 본전인 무량수전에 이르기 위해서는 무수한 계단을 올라야만 한다. 본격적인 계단길이 시작되는 당간지주 앞에서, 나는 출처를 알 수 없으나 언젠가 읽은 적 있는 문장을 기억해냈다. '무량수전에 닿을 때까지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 방문객들 사이에서 잠언처럼 전해 내려온다는 문장이었다. 나는 앞의 문장을 인용하면서 동행인에게 계단을 오르는 동안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당부했다. 동행인은 그런 내 요구를 가볍게 거절하며 말했다.
"나는 툭하면 뒤돌아보는 사람인 거 잘 알잖아. 난 그냥 뒤돌아보면서 갈게."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무량수전을 향해 걸었다. 지나온 계단의 수가 늘어날수록 두 사람의 말수는 줄어갔다. 처음보다 거칠어진 서로의 숨소리만이 아직 사위에 남아 있는 늦여름의 공기 속을 불규칙적으로 파고들었다. 범종각과 안양루를 지나는 동안, 이마에는 어느새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이 보이기 시작한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나는 곧장 뒤를 돌아보지 않고 숨 고르기에 나섰다.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다시 천천히 내뱉기를 반복하면서, 매 순간 호흡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자주 잊고 지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시원한 산바람이 이마의 땀을 훔쳐내는 사이, 밭은 숨이 머물던 자리에도 가지런한 숨이 들어섰다. 그때에야 비로소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뒤돌아선 나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뜻밖에도 지나온 고찰의 전각들이 아니라 그 배경으로 펼쳐진 소백산맥의 능선이었다. 산 너머 산, 다시 그 산 너머로 또 다른 산이 유려하게 이어지는 풍경은 아름답다 못해 경이롭기까지 했다. 앞만 보고 계단길을 오를 때는 미처 상상하지 못한 풍경이었다. 내가 눈앞의 풍경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자, 옆에 가만 서 있던 동행인은 '내가 본 풍경과는 다른 느낌일까'하는 혼잣말을 했다. 한 사람은 중간중간 뒤를 돌아보았고, 다른 한 사람은 마지막 계단을 오를 때까지 뒤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결국엔 뒤를 돌아보았다는 점에서 그 풍경이 아주 다르지는 않았을 거라고, 그날의 일기에 나는 그렇게 썼다. 뒤돌아보면 지나온 풍경은 늘 아름다웠다고도.
다시 한 해가 저물어간다. 그해 부석사에 함께 다녀온 동행인과 나는 해마다 <연말정산>을 한다. 올해는 보신각이 보이는 종로의 어느 카페에서 한 해를 되돌아봤다. 보신각은 새해 타종 행사를 여는 곳이므로 묵은해를 마무리하기에도 제법 의미가 있지 않겠느냐고, 만남의 장소를 제멋대로 정하고 나서 동행인을 만나 그 이유를 설명했다. 사소한 일에도 곧잘 의미를 부여하는 편인 나를, 동행인은 이제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는 것 같다. 오랜 인연의 좋은 점이 이런 데 있다. 연말정산을 하며 1년간 차곡차곡 쌓아온 하루의 기록들을 되돌아보고 있자니 괜히 기분이 몽글몽글해졌다. 만났던 사람들, 주고받은 마음들, 행복했거나 무언가를 내려놓고 싶었던 순간들, 끝내 말이 될 수 없었던 감정들까지도 돌아보면 모두 아름다웠다.
뒤돌아보면 아름다운 날들, 올해도 그런 날들을 살았다.
올해도 덕분에 행복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