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p 28, 2021
우리는 도서관 열람실에서 처음 만났다. 좋아하는 자리가 같았던 게 계기였다. 열람실 문을 열고 섰을 때 맨 오른쪽에 보이는 창가 자리로, 창밖으로는 훗날 우리가 졸업할 중학교와 운동장 둘레를 따라 적당한 간격을 두고 서 있는 플라타너스 나무가 보였다. 둘 중 누구도 그 자리를 포기할 마음이 없었으므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매번 같은 자리에서 마주쳤다. 서로에 대해 알기 전까지는 칸막이가 없는 4인용 테이블에 언제나 대각선으로 마주 앉았다. 창가에 더 가까운 쪽은 먼저 온 사람의 몫이었다. 서로를 마주 보고 창가에 나란히 앉을 수 있게 된 건, 둘이 같은 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부터였다. 중학생이 되고 난 첫봄, 우리는 그렇게 친구가 됐다.
내가 날마다 도서관에 갔던 이유는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기다리기 위해서였다. 당시 우리 집은 읍내에서도 버스를 한참 타고 들어가야만 하는 산골에 있었고, 그런 곳은 모름지기 버스의 배차 간격이 길게 마련이었다. 시간을 때우는 게 목적이었던 나는 주로 2층 자료실에서 책을 빌려 와 읽었다. 반면 그 애는 학원에 가기 전 남는 시간을 이용해 공부하려고 도서관을 찾았다. 그때만 하더라도 학년당 한 학급뿐인 작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시간을 내서 공부를 한다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경쟁을 모르던 시절이었다. 도서관에 온 이유는 서로 달랐지만 우리는 대화가 잘 통했고, 가까워질 이유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나와 친해진 그 애가 보통 아이들보다 공부를 월등하게 잘하는 아이였다는 사실은 1학기 중간고사가 끝난 후에야 알았다. 담임 선생님은 벅찬 표정으로 교탁 앞에 서서 '우리 반에서 전교 1등이 나왔다'며 그 애를 가리켰다. 교실 맨 앞자리에서 급우들의 박수를 받으며 겸연쩍어하던 그 애의 모습이 오랜 필름 영화의 잔상처럼 아직도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 애가 1등이라는 사실과는 별개로, 나는 등수와 이름이 일렬로 세워진 성적표가 칠판 옆 게시판에 공개적으로 붙은 데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도서관 열람실에서 공부라는 걸 시작한 건 그날 이후부터다. 그 애는 내가 공부를 하다가 모르는 걸 물을 때마다 귀찮아하는 기색 없이 알기 쉽게 설명해주곤 했다.
우리는 생일과 형제 관계가 비슷했고, 혈액형이 같았고, 취미와 관심사에 겹치는 데가 있었으며, 각자 말 못 할 사정을 끌어안고 있었다. 그런 공통점은 사춘기 소녀들의 사이를 더욱 끈끈하게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그런 공통점보다도 나는 그 애와 함께 나누는 대화의 깊이가 좋았다. 그때 나는 또래 아이들보다 내가 조금 더 어른스럽다는 착각에 빠져 지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주위에 믿고 기댈만한 어른이 없었던 데에 대한 일종의 결핍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스스로 괜찮은 어른이 될 수 있다고 믿었던 그때의 나는, 아주 어렸다.
2학년이 되면서 반이 달라졌지만 우리는 여전히 친하게 지냈다. 새로운 반에서 알게 된 급우들은 내게 와서 종종 그 애의 험담을 했다. '걔는 재수가 없어.' 그들은 그 애가 공부깨나 한다는 이유로 젠체한다고, 자기 할 말을 다해서 재수가 없다고 말했지만, 나는 속으로 그런 말을 부러 그 애와 친한 내게 와서 하는 그들이 더 재수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런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는 일은 결코 없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불필요한 갈등을 피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니까.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흘러 두 사람 모두 성인이 되었을 때, 그 애는 내게 '누구도 적으로 만들지 않는 게 너의 장점'이라며, '예전부터 그랬었지'하고 말했었다. 그 애는 나의 그런 점이 부럽다고 했지만, 나는 내가 이제껏 맺어온 관계에 대한 정곡을 찔린 듯한 기분이 들어 한동안 의기소침해 있었다.
주변에서 말이 많았어도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우리는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사이가 점차 멀어지기 시작한 건 서로 다른 고교로 진학하게 되면서부터였다. 그 애는 우리 지역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공부를 잘하기로 알려진 유명 고교에 진학했고, 나는 평범한 인문계 고교에 진학했다. 모든 인연에는 때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의 관계가 어떤 분기점을 지나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그땐 미처 알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며 서로의 빈자리는 새로운 친구들로 채워졌고, 그러면서 연락도 차츰 뜸해졌다. 그럼에도 인연이 완전히 단절되지는 않았는데, 그건 우리의 생일이 가깝기 때문이었다. 수험생이 되고, 대학생이 되고, 사회인이 되어서도 일 년에 꼭 한 번씩은 서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축하 인사인지 편지인지 모를 장문의 메시지에는 언제나 생일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잘 지내고 있다는 말이 적혔다.
각자의 사정으로 한동안 보지 못했던 그 애를 다시 만난 건 지난봄과 여름 사이의 일이었다. 서로의 생일 즈음이었고, 햇수로는 7년 만이었다. 그 사이 나는 네 번의 이직과 한 번의 해외 생활을 했고, 그 애는 한 번의 퇴사와 오랜 수험 생활, 한 번의 인턴 생활을 하다가 지난 연말 새 직장에 취업을 했다. 학창 시절 만나면 종종 인사를 나누던 우리 언니와 그 애의 여동생은 결혼을 했고 아이가 생겼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대전에 살고 있던 나는 서울과 일본을 거쳐 수원에 살게 됐고, 서울에 살던 그 애는 청주에 살게 됐다. 우리의 7년은 그런 식으로 간단하고 명료하게 압축되는 듯했다. 그 애가 준비하던 시험에서 거듭 낙방한 후 안면마비가 와서 한동안 고생했다는 얘기를 하기 전까지는.
지난 7년간 서로에게 보낸 메시지 속의 우리는 분명 잘 지내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 속의 우리는 그럴 수 없었다. 매번 좋을 수만은 없는 게 인생이었다. 알면서도 모르는 체 했던 나와 마찬가지로 그 애 역시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잘 지냈다는 말을 꺼내기까지 누구에게나 많은 일이 있게 마련이라는 걸. 힘든 시간이 있었지만 잘 견뎌내었다고, 그래서 이제는 괜찮다고. 잘 지냈다는 말에는 그런 함축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는 걸. 삶에는 각자의 몫으로 주어진 무게가 있다는 걸 알아서, 차마 내 몫의 짐까지 너에게 지울 수 없다는 말을 대신하는 게 잘 지냈다는 말이라는 걸.
한낮에 만난 우리의 대화는 한밤이 될 때까지 이어졌다. 7년이라는 시간이 무색할 만큼 어색함을 느낄 수 없는 대화였다. 그 애와 함께 있는 동안, 비록 지금은 서로 다른 곳에 서 있지만 오래전 우리가 함께 지나온 그 시절의 정류장만은 아직 거기 그대로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장 아홉 시간에 걸친 회포를 푼 후에야, 우리는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질 수 있었다. 부디 건강히 잘 지내자는 작별 인사를 주고받고서, 우리는 뒤돌아 각자 나아가야 할 곳을 향해 걸었다. 다시 만날 때까지 그 애가 잘 지냈으면 좋겠다. 물론 나 역시 잘 지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