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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월의 솔 Feb 19. 2023

청계천에서

Feb 17, 2023

날이 많이 포근해졌다. 매일 조금씩 봄이 다가오고 있다고 생각하면 괜히 마음이 간질거린다. 새로운 곳으로 직장을 옮긴 지도 어느덧 한 달이 지났다. 처음에는 늘 시끌벅적하던 전 직장과 분위기가 사뭇 달라 당황했지만, 이제는 적막한 새 직장의 분위기에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사람은 역시 적응하며 사는 동물인 것이다. 새 회사는 근처에 서점과 청계천을 두고 있어 좋다. 덕분에 점심시간을 이용해 신간을 살펴보거나 청계천을 따라 산책할 수 있다. 날이 풀린 뒤로는 천변을 걷는 날이 더 많다.


산책로 좌우로 펼쳐진 빌딩 숲을 올려다보고 있으면 묘한 기분이 든다. 이 거대한 도시의 풍경 속으로 다시 돌아오게 될 줄은 정말이지 꿈에도 몰랐다. 수년 전 도망치듯 이 도시를 떠날 때 나는 다짐했었다. 이제 이곳으로 돌아오는 일은 없을 거라고. 무슨 일이 있어도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그러나 시간은 흘렀고 나는 이렇게 다시 돌아왔다. 사람의 일이란 언제나 성급한 예측을 빗나가고, 다짐이란 언제든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모양을 달리하는 가벼운 마음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채로.


살다 보면 노력해도 되지 않는 일이 있고 충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는데도 이루어지는 일이 있다. 때마다 어쩔 수 없이 해야 할 일을 점점이 했을 뿐인데 그게 하나의 선으로 이어지는 경험도 한다. 각자 다른 곳에서 발원하여 굽이굽이 흐르다가 어느 한 지점에서 합류해 흐르기 시작하는 물줄기처럼. 인생은 그렇게 흘러간다. 졸졸 흐르는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청계천변을 걷다 보면 불과 십수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 위에 도로가 지나고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지금껏 내가 지나온 날들과 마찬가지로.


한낮의 청계천에는 여러 이야기가 흐른다. 무료한 일상을 달래기 위해 산책 나온 어르신의 이야기,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벗어나 잠시 호흡을 고르는 직장인의 이야기, 설렘을 안고 익숙한 일상을 떠나온 외국인 관광객의 이야기. 그리고 그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이 도시를 예전보다 조금은 좋아하게 되었을지도 모를 내 이야기. 맑은 날에 광교에서 청계광장 방면으로 걷다 보면 어김없이 높다란 빌딩 숲 사이로 스며들어오는 하오의 햇살을 마주한다. 그럴 때마다 이번에는 조금 더 오래 견뎌낼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든다.

  

빌딩 숲 사이를 흐르는 청계천과 수면 위로 부서지는 햇살의 조각들과 거기 반짝거리는 무수한 이야기의 존재를 알게 되었으니까.



2023년도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반짝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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