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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월의 솔 Apr 01. 2023

무용함에 대하여

Mar 31, 2023

광화문 교보빌딩 근처에 횡보 염상섭 선생의 동상이 있다. 선생이 벤치에 앉아 누군가에게 자신의 곁을 내주고 있는 듯한 형상을 한 동상이다. 동상의 뒤로는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는 글귀가 새겨진 바위가 늠름하게 서 있다. 이는 교보문고 창립자인 고(故) 신용호 회장이 생전 남긴 말이라고 전해진다.


동상과 바위의 옆으로는 커다란 벚나무 두 그루가 있다. 그동안 여러 번 지나치면서도 거기 벚나무가 서 있는 줄은 몰랐다. 얼마 전 볼일이 있어 주변을 지나다가 우연히 빨갛게 올라온 꽃망울을 발견했다. 그 후로 점심시간이 되면 부러 그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매일 조금씩 피어나는 꽃들을 감상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처음 며칠간 소극적으로 망울을 터뜨리던 벚나무는 기온이 오르자 순식간에 만개했다. 볕이 잘 드는 자리에 있어 그런 듯했다. 꽃이 풍성해지니 이번엔 염상섭 선생의 동상과 신용호 회장의 명언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소설가와 책과 꽃이 한데 어우러진 모습이 퍽 근사하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문학 작품을 즐겨 읽는다는 내 말에, 소설 같은 걸 왜 읽는지 모르겠다고 천연하게 대꾸한 지인이 있었다. 생활에 도움이 되는 정보도 아니고 읽어봐야 시간 낭비라는 것이었다. 사실 중심의 사고를 하는 지인의 평소 성정을 생각할 때 아무런 악의 없이 한 말이었겠지만 그 말을 듣는 내 마음은 좀 쓸쓸했다.


무용한 것들이 좋다. 소외된 이웃의 삶이나 복잡한 인간의 내면을 섬세하게 그려낸 문학 작품들, 아름다운 선율과 노랫말로 지친 마음을 보듬는 음악들, 나뭇잎 사이를 포근하게 스며드는 햇살과 고단한 하루의 끝을 위로하는 달빛, 살결을 스치는 한봄의 기분 좋은 바람과 긴 겨울을 견디고 마침내 꽃을 피운 나무, 그리고 그 꽃나무 아래에 선 사람들의 행복한 표정 같은 것들.


오늘도 점심시간을 이용해 무용한 것들을 만나러 다녀왔다. 꽃은 어느새 절정을 지나 다음 봄을 기약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쉬운 마음으로 찰나의 아름다움을 눈에 담는데 일순 바람이 일었다. 연분홍 꽃잎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며 비산했다. 그러자 꽃나무 아래에 있던 사람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와아‘ 하는 탄성을 쏟아냈다. 서로 의도치 않았던 합창에 당황했는지 이번엔 곳곳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흩날리는 꽃잎이, 꽃나무 아래에 선 사람들의 무해한 웃음이,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 듯한 염상섭 선생과 그의 소설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책들이, 그런 무용한 것들이 세상을 좀 더 풍요롭게 만든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오늘도 무용한 것들로 인하여 행복 충만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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