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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월의 솔 Aug 08. 2023

너의 내일로부터

Aug 8, 2023

연식이 오래된 아파트 단지는 나무가 울창해서 좋다. 도심에서 살다 보면 계절의 변화에 무심해지기 쉬운데 나무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계절의 지금과 한층 가까워지는 느낌이 든다. Y를 만난 날에도 그가 조부모와 함께 살고 있다는 아파트 단지 사이를 걷다가 문득 계절이 지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초록이 무성해지고 있던 봄밤이었다.


"선생님, 저는 제 친구들이 다 예뻐 보여요."


놀이터에 세워진 가로등 불빛 아래를 막 통과하고 있을 때였다. Y는 자신의 친구들을 '정말' 좋아한다고 고백했다. 그런 예쁜 말을 하면서 '거짓말이 아니'라고 여러 번 힘주어 말하는 게 마음에 걸렸다. 세상엔 합리적인 의심이라는 말로 타인의 진심을 쉽게 부정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고, Y는 지금까지 그런 어른들을 더 많이 만나왔는지 몰랐다.


"좋아하니까 더 예뻐 보이는 게 아닐까."


그렇게 맞장구를 치고는 '내 눈엔 Y도 너무 예뻐. 왜냐하면 Y를 좋아하니까.'하고 말했다가 스스로 깜짝 놀랐다. 내가 이런 낯간지러운 표현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사람이었나. Y를 만날 때면 내가 알고 있는 단어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마음이 들곤 하는데, 그건 아무래도 그 애에게서 자꾸만 내 모습이 보여서 그런 것 같다. 그러니까, 아직 열아홉이던 내가.




서울 한복판에서는 조용한 동네가 귀하다. 종묘의 서쪽 담장을 따라 난 서순라길은 언제 가더라도 복작거리지 않아 좋다. H는 평소 시끄럽고 어수선한 분위기를 불편해하는 나를 배려해, 정작 자신이 오기에는 번거로운 이 동네에서 부러 만나자는 약속을 잡았다. 그런 마음씀씀이는 당연한 게 아니라는 걸 늘 기억하려고 한다.


"지금이 과거라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한결 편해지더라고요."


그는 언젠가 내가 권한 적 있는 책을 한동안 방치해 두었다가 최근에야 다 읽었다며 말했다. 올해 유난히 다사다난했고 그래서 힘들다고 생각한 시기도 있었는데 책 속 한 구절처럼 생각을 바꾸어 보니 그런대로 견딜만하더라는 것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하더라도 학생 태가 났던 그는 어느새 내 앞에 어른 같은 얼굴을 하고 앉아 있었다.


현재는 과거에서 보면 미래지만 미래에서 보면 과거다. 이게 무슨 궤변인가 싶겠지만, 이 궤변 같은 진리가 아무리 살아도 익숙해지지 않는 생을 살아가는 데 제법 도움이 된다. 다시 말해, 저기 저 담장 위로 뻗은 나무들의 우듬지를 뜨겁게 흔들어놓는 한여름의 열풍도, 차디찬 겨울이 오고 나면 그리워질 수 있다는 얘기.




여름의 초입께 평소 관심을 두고 있던 어느 소설가의 북토크에 갔었다. 그는 자기 얘기만 늘어놓지 않고 중간중간 자신을 만나기 위해 온 독자들의 삶에 대해 묻곤 했는데, 내게는 지나온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과 불행했던 시절 중 한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느냐고 물었다. 나는 크게 고민하지 않고 후자가 좋겠다고 답했다.


이유를 묻는 그에게, 불행한 줄로만 알았던 그 시절이 지나고 보니 아주 불행하기만 했던 건 아니더라고, 그 시간들이 있어 그때보다 조금 더 나은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다고, 그런 이야길 그때의 나에게 해주고 싶어서 그렇다고 말했다. 오늘의 내가 어제의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 어쩌면 또 다른 내일의 내가 오늘의 나에게 들려주고 싶을지 모르는 말.


태양 빛이 지구에 도달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약 8분. 우리는 지구로 떠나오기 전 아직 태양에 머물러 있던 빛의 미래를 보고 있으면서, 동시에 언제나 과거의 빛을 보고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제목은 정승환의 동명곡에서 따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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