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예과에 합격하다
1992년 12월 31일에 썼던 일기를 읽었다.
오늘은 나에게 있어서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저녁을 하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같은 입시학원에 다니는 동훈이었다. '누나, 어떻게 됐어요?' 하고 물었다. 아직 합격 발표도 되지 않았는데 무슨 소린가 했는데, 알고 보니 그날 벌써 합격 발표가 난 것이었다. 나는 떨리는 가슴으로 전화기의 번호를 눌렀다. '700-2000.3.xxxxxx'. 전화기 건너편에서 소리가 들렸다. " 합격하셨습니다. 축하합니다!" 순간 나는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 그동안 가슴 조이던 것이 확 풀렸다. 믿을 수가 없어서 다시 한번 더 확인했다. 사실이었다. '그동안 고생한 것이 헛되지 않았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나 행복했다. 언니들에게 사실을 알렸다. 모두들 기뻐했다. 미애에게도 알렸다. 역시 축하해 주었다. 동훈이는 '인간승리'다 라며 축하했다. 동훈이도 고려대학에 합격했다. 나 역시 축하해 줬다. 그동안 열심히 했던 우리 반 애들도 여럿 합격했다 한다. 아직까지도 믿기지 않는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에 가슴 졸였었다.
93학번의 다른 새내기들보다 6살 정도가 많은 나를 동기들은 언니, 누나라 부르며 허물없이 대해줬다. 학교 생활은 정말 좋았다. 좋아하는 강의 듣고 애들이랑 어울려 학교 앞 식당에서 점심 먹고, 또 학교 뒷산에 커피 들고 산책도 가고. 화창한 오전에는 은행나무 아래에 있는 벤치에 앉아서 햇볕도 마음껏 받고, 정말 꿈만 같은 날이었다. 과제가 많은 날은 학교의 작업실에서 밤샘을 해가며 작업을 완성했다. 물레로 똑같은 컵을 100개나 만들어야 했을 때는 정말 죽을 것만 같이 힘들었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만든 작품들을 가마에 넣고 굽는 날은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밤새 가마 불을 확인해야 하기 때문에 누군가는 가마 앞에서 지켜봐야 했다. 원하는 사람들은 함께 밤을 지새웠고 그런 날엔 가마솥뚜껑에 돼지고기 삼겹살이나 목살, 두부, 거기에 김치까지 넣어 함께 구워 먹으며 소주도 마셨더랬다. 알코올이 어느 정도 오르면 자연스럽게 작품에 대해, 사회에 대해, 그 외에 모든 것에 대한 토론들이 오갔다. 토론할 때는 이전과 정말 다른 세상에 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1차로 밥 먹고 2차로 술 마시고 3차로 노래방에 가는 것이 정식 코스처럼 여겨졌던 직장에서의 회식.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주로 상사나 선배가 하는 말을 묵묵히 듣고 있어야만 할 때가 많아 답답했었다. 오고 가는 대화도 스트레스 쌓이는 내용들이 대부분이었고, 각자 회사생활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풀어가는 방식도 각양각색이었다. 하지만 학교 작업실 가마 앞에 앉아서 이들과 나누는 대화는 나를 자극시키기에 충분했다. 예술가로 살아가고자 하는 많은 젊은 생각들이 나를 들뜨게 했다. 예술가는 무엇인가? 앞으로 어떻게 작품을 해 나갈 것인가? '순수 예술가'로서 먹고살 수는 있을까? 우리의 미래는 어떨까? 거기에 누구의 연애사업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다, 등등. 젊음이 한창 무르익어가는 그들과의 대화에서 나이 차이는 전혀 문제 될 것이 아니었다. 기나긴 독일 생활 중 가장 그리운 시절이 바로 이때이며, 이 장면이다. 다시는 올 수 없는 시간이기에 더더욱 그리운 시간이다.
1993. 7. 25.
개인적으로 즐거운 일, 행복한 일이 있다. 과수석을 했다. 비록 내가 기대한 만큼의 성적은 아니지만 1학기 동안 열심히 노력한 것이 보답으로 돌아온 것이다. 2 학기 때는 더 열심히 하리라. 내 목표를 위해서는 2학기 때의 성적이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이다.
1994. 2. 13.
2학기 때에도 나는 열심히 했다. 그 결과, 4.5 만점에 4.35라는 높은 점수로 과수석과 A장학생이 되었다. 94년에 접어든 지도 벌써 2달이 다 되어간다. 그런데 아직 올 한 해의 계획도 포부도 설정해 놓은 것이 없다. 작년 말에 건강상 좋지 않은 일이 있어 모든 계획이 다 흐트러졌다. 전혀 내 계획에 없던 일들이 일어났다. 올해 하려고 마음먹었던 것까지 엉망이 되겠다.
지난 일기를 뒤적여 보니, 좀 쑥스럽기도 하다. 뒤늦게 시작한 대학생활을 나는 정말 열심히 했구나!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온 어린 동기들과는 달리 나는 이미 '세상'을 알았다. 직장생활이 어떤 것인지, 학교 밖의 세상이 얼마나 치열한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어린 동기들에게 이야기를 해줬던 것 같다. 하지만, 경험해 보지 못한 이들에겐 나의 이런 말들이 전혀 와닿지 않았을 것이다. 학교생활의 소중함을 알기에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노력했다. 노력하는 순간 초차도 즐겁고 행복했다. 비록 어릴 적 꿈이었던 그림 그리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흙을 만지면서 또 다른 기쁨을 맛보았다. 흙을 만지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손 안에서 느껴지는 흙의 감촉이 너무나 좋았다. 마음이 평온해지고 따뜻해졌다. 흙과 내가 잘 맞았다. 화가가 아닌 도예가가 되어도 좋을 것 같았다. 비록, 우리 선조들이 이뤄 놓은 그런 위대한 사기장은 못 되어도 흉내는 낼 수 있지 않을까? 라며 한 때 꿈을 꿨었다.
1학년 때는 전공과목의 기초와 교양과목을 많이 들었다. 그중 제일 좋았던 것이 '미술의 이해'라는 수업이었다. 서울에서 내려오는 시간 강사가 이끈 수업이었는데, 미학과 더불어 서양미술사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다룬 수업이었다. 이 수업이 전공수업 못지않게 재밌었다. 과제물로 받은 논문형식의 리포트 작성에서 나의 '재능'을 발견했다. 관련 논문들을 찾아 읽고 자료를 정리해서 리포트를 제출하는 것이었는데 그렇게 재미날 수가 없었다. 아주 신나게 썼던 것 같다. 이때부터였나 보다. 이론과 실기를 병행한 그런 작가가 되자고 마음먹었던 것이! 본격적으로 전공수업을 들어가기 전 기초적인 미술수업이 진행됐다. 이 것도 재밌고 좋았다. 그 무엇이 되었건 내가 지금 누리고 할 수 있는 모든 일에서 행복감을 느꼈다.
지금은 없어진 예술대 건물 앞에서부터 도서관 건물까지 은행나무가 쭉 서있었다. 그 은행나무 아래로는 벤치가 놓여있었는데, 물레를 차다가 힘이 들거나 잠시 휴식을 할 때는 자판기 커피 한잔을 뽑아 들고 거기 앉아서 있기를 좋아했다. 치렁한 머리카락은 아무렇게나 틀어 올렸고 흙이 잔뜩 묻은 앞치마를 한 채로 넋 나간 여자처럼 하고 앉아 있으면 법대 아이들이 흘낏흘낏 쳐다보며 지나가곤 했다. 그러든가 말든가! 그럼, 난 그들을 되려 관찰했다. 이렇게 가만히 앉아 주변을 돌아보면 재밌게 관찰할 것이 의외로 많다. 주변의 모든 것이 다 예사롭지 않게 보이기도 했다.
과 동기들과 함께 어울려 술 마시는 것도 좋았다. 호프집에 가서 생맥주 시키고 소야 볶음(소시지 야채볶음. 이땐 최고의 안주였다) 시켜서 한참을 수다 떨고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았다. 인생선배, 사회 선배로서 동기들의 연애상담도 해줬고, 직장에서의 나의 경험도 들려줬었다. 자기들이 경험해 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에 대해 이들의 호기심도 컸다. 또 과 작업실 뒤쪽에 있는 동해식당에서의 식사도 정말 좋았다. 마음씨 좋은 아줌마 아저씨께서 특히 우리 과 학생들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언제나 푸짐하고 맛난 점심을 먹을 수 있는 곳이었다. 가마에 불을 때는 날이면 가끔 이 두 분도 함께 하셨는데, 그럴 때면 으레 양손에 고등어 통조림 김치찜을 들고 오셨더랬다. 얼마 전 카톡으로 연결된 동기에게 들었는데, 아저씨는 이미 돌아가셨다고 한다. 아직까지도 소식을 끊지 않고 서로 소통을 하고 있었다니 놀랍기까지 하다.
내가 막연하게 유럽으로의 유학을 생각하고 있을 때, 때마침 프랑스의 스트라스 부륵에서 온 교환학생이 한 명 우리 과로 왔다. 크리스토퍼라는 키가 큰 남학생이었는데, 그의 작업 스타일은 아직까지 접해보지 못한 것이어서 신선했다. 물레로 공을 만들어 그것을 자르고 붙여서 하는 작업이었다. 그때까지 우리는 과제로 나오는 것을 해결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시절이었는데, 이 남자는 우리완 완전히 다른 스케일로 작업을 하는 것이었다. 처음엔 언어문제로 소통이 좀 힘들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특히 다른 지방에서 열린 '도예가 지망생'들을 위한 세미나에 과친구들과 함께 참가하면서부터는 필요하다면 손짓 발짓까지 섞어가며 거침없이 서로 어울렸다. 우린 모두 서로의 작업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술도 나누고 노래도 함께 부르면서 그를 '한국 대학문화'에 동화시켰다. 교환수업이 끝나고 스트라스 부륵으로 돌아갈 때 그는 많이 아쉬워했다. '기간이 조금만 더 길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라며 아쉬움을 토했었다. 그때 크리스토퍼가 우리 과 학생들에게 남긴 여운도 적지 않은 것이었다. 물레작업에 새로운 시각을 접목해 작업하려는 노력들이 보이기도 했다.
나에게도 적잖은 후유증이 이었다. 유학에 대한 생각이 더욱 깊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이 아닌 보다 더 넓은 곳에서 다른 세상을 알아가고 싶어졌다. 기존의 내가 알고 있던 도예가 아닌 다른 세계도 알고 싶어졌다. 그래, 유럽으로 가자!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고 실행으로 옮겼다. 그땐 정보가 많지 않아 물어물어 여러 방법을 통해 한 유학원을 알게 되었고 그 유학원을 통해 독일로 오게 되었다. 나와 함께 2명이 같이 왔는데, 그들도 나와 같은 과정을 밝았다 했다. 유학원을 통해 어학사설학원도 등록을 했고 그 등록증으로 비자를 받았다. 그리고 얼마 후 드디어 독일로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