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여행 4: 독일유학생활

새로운 도전을 위해 미지의 세계로

by 메아스텔라meastella

28년 전 이맘때쯤 나는 독일 아욱스브룩에 도착했다. 독일어라고는 '당케' 하나밖에 못했지만, 두려움보다는 설렘이 더 컸다.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대학을 간다고 할 때 반대가 많았다. 유학을 간다고 하자, 대학 간다고 할 때보다 더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가만히 기억해 보면, 내가 무엇을 시작하던 그냥 쉽게 진행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아르바이트와 직장생활을 해봤기에 직접 벌어 무언가를 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덜했다. 심사숙고해서 결정한 것에 대해서는 '직진'한다. 비록 그것이 얼마나 오래 걸리던. 또 '될까 안 될까'라고 필요 없는 걱정은 안 하는 편이다. 이런 고민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오랜 생각 끝에 결정한 것이라면 그냥 가면 된다. 가다 보면 결론이 나올 것이고, 만약 그 결론이 원하던 것이 아닐지라도 최선을 다했으니 후회는 없다. 직장 생활을 할 때, 내가 나에게 선물 한 유일한 '사치품'은 피아노였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배우고 싶었던 피아노. 나에겐 그림 속에 있는 잡히지 않던 꿈이었는데, 그것을 내가 번 돈으로 나에게 선물했었다. 그 꿈을 팔아 또 다른 꿈을 꾸기 위해 독일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1995. 9. 17. 일요일
내 인생에 있어서 새로운 장이 열렸다. 나는 독일로 왔다. 부산을 출발할 때의 날씨는 왠지 을씨년스러웠다. 뿌연 안개가 낀듯한 하늘은 왠지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8시 비행기를 타고 서울에 도착해서 다시 13시 35분 비행기를 타고 드디어 독일로 향해 떠났다. 비행기는 좁았으나 쾌적했다. 12시간의 대장정을 마치고 프랑크푸르트에 도착, 2시간을 기다려 뮌헨 가는 비행기를 갈아탔고 다시 지하철로 뮌헨 중앙역까지 갔다. 역내는 정말 혼란스럽고 시끄러웠다. 10월 맥주축제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은 그 늦은 시간에도 우르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우리 일행들이 약간의 불안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다시 역에서 2시간 정도를 기다려 새벽 1시 20분 기타를 타고 아욱스브룩에 도착했다. 늦은 시간에 우리 일행 3명은 또 택시를 타고 숙소인 Pension에 드디어 도착했다. 체크인을 하고 간단하게 정리를 한 뒤 잠자리에 들 때의 시간은 새벽 3시가 다 되어서였다. 서울을 출발할 때부터 시작된 편두통은 더욱 심해져 정신을 못 차릴 정도였다. 숙소에 도착한 후 약을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렇게 피곤하고 마구 쏟아지던 잠이 막상 자려고 하니 오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 숙소 주변을 둘러보았다 드넓은 공원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산책로를 따라 걸으면서 꼭 영화에 출현한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이 순간 이곳에 있는 것이 너무나 행복했다. 오후에 어학원을 알아보기 위해서 일행 3명은 길을 떠났다. 물어물어 어학원에 도착하여 버스 노선도 알아놓았다. 고마운 독일 아저씨 덕분으로 어렵지 않게 움직일 수 있었다. 50대 정도로 보이는 아저씨였는데 너무나 친절하여 오히려 미안한 감이 들 정도였다. 국제전화를 걸 수 있게도 도와준 그 아저씨께 정말 감사드린다. 언어가 안 돼서 아저씨께 충분히 전달은 못했지만 아저씨도 아실 것이다.


1995. 9. 19. 화요일
오늘 기숙사로 이사를 했다. 현지에 있는 유학생들의 도움으로 쉽게 방을 구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수녀원에서 관리하는 기숙사는 참 깨끗했다. 정갈하면서도 차분한 분위기가 정말 맘에 든다. 원장수녀님도 마음이 좋아 보여서 기쁘다. 방값도 생각보다는 싸다. 보증금 200DM에 달세 240DM으로 적게 드는 편이다. 깨끗하고 싼 방을 구할 수 있게 도와준 유학생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Pension에서 이사를 하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무거운 트렁크를 옮기기에는 힘이 부족했지만 결국에는 옮겨서 방 정리를 끝냈다. 저녁에는 이 기숙사에 있는 한국 유학생들과 함께 라면과 밥 그리고 전으로 만찬을 즐겼다. 라면과 밥이 그렇게 멋진 식사가 될 줄은 미쳐 생각을 못해봤다. 다들 모여서 한국의 사정을 묻고 대답하며 무려 2시간 동안 저녁식사를 즐겼다. 흑백 TV도 한대 구했다. 먼저 있던 유학생이 자신의 흑백 TV를 버리려고 해서 얻었다. 채널은 1개만 잡혔지만 그런대로 귀를 틔우는 데는 도움이 될 것 같다. 내일은 장을 봐야겠다. 침대 시트와 먹을 것을 좀 장만해야 할 것 같다.


1995. 10. 7. 토요일
내 나름대로 정해 놓은 한 달이 다 되어가는데 아직도 귀머거리에 반 벙어리 상태다. 왜 이렇게 그들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지 모르겠다. 한 달 정도 되면은 어느 정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그렇게 쉽지가 않다. 한국에서 미리 공부하고 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정말 뼈저리게 느낀다. 같이 온 그녀는 오기 전에 열심히 공부를 해서 수업에 별 어려움이 없는 것 같다.
다시 마음을 다 잡아야겠다. 나는 할 수 있다. 내가 누구인가! 어떠한 어려움도 이겨 왔지 않은가. 지금 와서 나와의 싸움에서 진다면 내가 아니다. 나는 할 수 있다. 어떠한 상황도 잘 극복할 수 있다.




지난 일기를 읽으며 그 당시를 회상하니 참으로 난감하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온 것일까! 아마도 몰라서 가능했던 일이지 싶다. 지금 돌이켜 보면 정말 간도 큰 일을 한 것이다. 생면부지 독일로 오면서 거주할 곳도 마련하지 않고 달랑 어학원만을 등록하고 왔으니, 이 얼마나 겁 없는 행동이었던가. 다행히 바로 지낼 기숙사를 구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무식하면 용감하다'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어학을 준비하면서 독일 내 대학교에 입학신청서를 준비했다. 우선 대학입학신청을 위한 기본조건이 기준에 맞는 어학공부시간(오래되어 기억이 나질 않는다)이 필요하다. 나는 한국에서 어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시간을 독일에서 채워야 했다. 사설학원을 부지런히 다니며 그 시간을 채워 등록했다.

독일 대학 입학 신청을 하면서 고민을 많이 했다. 계획했던 대로 미술대학교를 지원할 건지, 아니면 수업시간에 너무나 재미있게 들었던 미술사를 선택할 건지. 결론은 '일단은 Uni(독일 종합대학)에 가서 서양미술사를 공부하면서 Mappe(포트폴리오)를 준비하자.' 그러면서 작가의 길을 걸어가자'라고 결정했었다.


나는 한국에서 작가가 되는 것은 포기했다. 어릴 적 꿈을 좇아 들어온 대학은 내가 꿈꿔왔던 세계와는 많이 달랐다. 학연과 지연, 친목 그리고 돈이 얼마나 많은 것을 결정하는지 알게 되었다. 소위 '친목질'이 주는 폐해는 무시 못 한다. 물론 긍정적인 면이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결국은 각자의 이해에 따라 행동한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난 이 '친목질'을 잘 못 한다. 예술가로서 최소한 '밥 먹고 살 정도'가 되려면 '인맥'없이는 힘들 것 같았다. 한국에서 난 절망했고 다른 세계에서 새로운 도전을 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일단은 미술사를 전공해서 이론적으로 더욱 단단한 사람이 되자고 결심했다.

지금은 독일대학의 학제가 달라졌지만 그 당시엔 문과계 대학은 전공 1 개와 부전공 2 개를 선택해야만 했다. 나는 전공으로 서양미술사 부전공으로 고전고고학, 라틴어를 선택했다. 미술사 수업은 너무나 흥미진진하고 재밌었다. 이전 한국서 교양과목으로 맛만 보았던 것을 깊고 다양하게 공부할 수 있어서 정말 좋았다. 고전고고학은 고대 그리스 로마의 미술만을 다루는 학문이라 나에겐 새롭고 흥미로운 영역이었다. 라틴어 또한 완전히 미지의 세계였기에, 특히 라틴어를 유려한 독일어로 해석하고 분석해야 했기에 많이 힘들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비록 힘들었지만 정말 행복한 시기였다.






유학시절이 마냥 행복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좋아서 온 유학이니 어떤 어려움도 다 감당하겠다는 각오가 되어 있어서 충분히 견딜 만은 했다. 유학시절 나에게 가장 큰 충격을 주었던 두 사람의 죽음이 있다. 내 인생에 있어서 결코 잊을 수 없는, 크나 큰 충격을 준 두 가지의 사건. 고 노무현 대통령님의 서거와 고 김광석 씨의 죽음이다. 1995년 말 독일로 건너와 한참 언어와 외로움으로 힘들어할 때쯤, 그러니까 1996년 1월이었던 것 같다. 김광석 씨의 죽음을 함께 온 다른 유학생을 통해서 처음 듣게 되었다. 충격이었다. 처음엔 거짓말인 줄 알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자살'이라는 단어가 지금처럼 그렇게 흔하게 들리는 단어가 아니었기에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혹, 사고사라면 모를까, 자살이라니!


다음 날 한국에 전화하고서야 사실이라는 것을 알았다. 너무나 슬펐다. 왜 자살을 했을까? 무엇이 그를 자살로 까지 몰고 갔을까? 그의 죽음을 너무 슬퍼하니, 동생이 김광석의 '학전 공연 실황 테이프'를 보내 줬다. 당시만 해도 CD가 막 나오던 시절이라, 나에겐 CD플레이어가 없었다. 그런 나를 위해 CD를 카세트테이프에 복사해서 보낸 것이다. 3평 조금 더 되는 좁은 기숙사 방에서 그 노래를 들으며 얼마나 울었던지! 특히 '서른 즈음에'를 들을 땐 당시 유학시절의 내 감정이 이입되어 가슴을 후벼 파는 듯 아팠다. 당시의 힘들었던 유학생활 때문에 마침 '울고 싶었는데 뺨 맞은 것'처럼 그의 죽음은 그렇게 다가왔다. 어쨌든 엄청 울었다. 울고 또 울고 끝없이 울었다. 이후 이 학전 공연 실황 테이프는 내가 있던 도시의 거의 모든 한국 유학생들의 기숙사 방에서도 울려 퍼졌다. 우린 돌아가며 그의 목소리를 듣고 또 들었다. 영혼을 울리는 그의 노래는 당시 우리에겐 최고로 강한 처방약이었다. 너무나 아까운 사람의 갑작스러운 자살이 우리에게 남긴 상처는 어떤 약으로도 치유될 수 없는 깊은 것이었다. 오로지 그의 목소리만이 우리의 상처를 다독여 줄 수 있었다.




한국에서 미대를 다녔었지만 내가 독일에서 공부하려는 것이 서양미술사였기 때문에 학점 인정이 안 된다고 했다. 그래서 학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내가 독일 대학을 갈 때만 해도 한국과 독일과의 '국가 간의 조약'이 지금과는 사정이 많이 달랐다. 그래서 유학생들에게는 여러모로 불편한 점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당시 공부를 목적으로 온 유학생들 뿐만 아니라 단기 어학연수를 하기 위해 온 학생들도 적지 않았다. 내가 경험한 많은 유학생들은 독일에 오면 제일 먼저 교회를 찾았다. 믿음이 깊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한국사람들의 커뮤니티가 잘 형성돼 있는 곳이 한인교회이다 보니, 그곳을 통해 많은 도움들을 받았다. 약간의 '결벽증' 때문일까? 믿음이 없던 난 한인교회에 가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한국사람들과의 교류도 적은 편이었다. 학교 멘자(식당)에서나 도서관에서 가끔 얼굴을 보고 지내는 몇몇 유학생들과 점심을 함께 하거나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테니스를 치는 정도였다. 가끔은 문득문득 외로움이 찾아오기도 했다. 아르바이트를 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릴 때라던지, 늦은 밤까지 공부하다 가끔 발코니에 나가 시원한 바람을 쐴 때라던지, 외로움은 예고 없이 문득 찾아오곤 했다. 그럴 때면 언제나 마리아 칼라스의 아리아를 들었다. 그러다 더 외로움이 깊어지면 김광석의 노래를 들었다. 그의 음색으로 감성을 정화시키고 나면 다시 힘이 나서 공부할 수 있었다.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그의 목소리를 통해 치유를 받았다. 힘이 들 때는 힘든 대로 위로를 받았고, 기쁠 땐 또 그 기쁨을 배가 시켜 행복하게 했다. 이런 나 때문에 신랑도 김광석을 알게 되었고, 그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 김광석의 노래를 들을 때는 함께 소리 높여 따라 부르기도 한다. 대부분의 노래를 다 좋아한다. 과거 한국을 방문했을 때 김광석의 추모 앨범을 사 오기도 했다. 근데, 남편은 이 추모 앨범보다 '학전 공연 실황' 버전을 더 좋아했다. 목소리에서 전해 지는 '영혼의 울림'이 다르다고 한다. 노래 가사의 내용을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 노래에 담겨 있는 '슬픔의 미학'은 공통 언어인가 보다. 우리 연애시절, 신랑 친구들과도 함께 김광석의 노래를 듣곤 했었는데, 대부분의 반응이 비슷했다. 가사를 번역해 주며 함께 음미하기도 하고 그의 안타까운 죽음을 성토하기도 했다. 또 독일의 힙합그룹 Die Orsons이 유튜브를 통해 우연히 알게 된 김광석의 노래에 감동을 받아 추모곡 Kim Kwang Suk을 만들어 부르기도 했다. 한국 국민들의 슬픔이 최고치였던 지난 2009년 노무현 대통령님이 서거하셨을 때, 김광석의 노래는 작은 위안이었으며 슬픔을 더욱 고조시키는, 말로 어떻게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그 무엇'이었다. 누군가 그랬던가? '김광석의 목소리는 포유동물이 낼 수 있는 가장 슬픈 소리'라고. 나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어떠한 설명도 필요치 않는 '그의 음색 자체'가 바로 '슬픔'인 것을! 오늘 유난히 더 그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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