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만남
몇 년 전 모 남자 배우가 19살 차이 나는 어린 신부를 맞을 때 세상 사람들은 그를 '도둑'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불렀다. 이 단어를 보는 순간 친정 엄마가 생각났다. 7살이나 어린 독일 남자와 결혼하겠다는 나의 말에 친정 엄마의 첫마디가 '도둑년'이었다. 요즘은 연상연하의 커플이 그렇게 낯설지 않다. 하지만, 19년 전 내가 결혼할 때만 해도 그렇게 흔한 조합은 아니었다. 나이 서른이 다 돼 공부하겠다고 그렇게 반대하는 유학을 가더니, 공부는 마치지도 않고 그것도 '외국 놈'이랑 결혼을 하겠다니, 기가 차셨나 보다. 11월 5일이면 결혼한 지 꼭 19년이 된다. 남과 남이 만나서 부부라는 이름으로 살다 보니, 이것저것 부딪히는 일들도 있고, 문화와 환경의 차이에서 오는 오해와 관점의 차이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다. 이는 국제커플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아마 모든 부부관계의 공통점 일 것이다. 서로 다른 곳에서 자랐던 두 사람이 만나 한 방향을 보며 앞으로 나가려면 보다 많은 대화와 서로에 대한 이해심이 깊어야 한다. 이 세상의 모든 '금성인 여자와 화성인 남자'가 '조화'를 이루며 더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우린 선생과 학생으로 만났다. 아르바이트가 필요했던 나는 대학식당 벽보에 한국어 개인수업 광고를 냈었다. 이 광고 쪽지를 붙이면서도, 설마 누가 신청할까? 반신반의였다. 근데 정말 거짓말처럼 반나절만에 전화연락이 왔다. 자신들은 의대생이며 한국에서 몇 개월간 프락티쿰을 해야 하는데, 가기 전에 한글을 배우고 싶다는 것이었다. 신청은 총 3명이었으나 나중에 한 명은 사정상 못 하게 되었고, 2명이 공동수업을 하기로 했다. 두 사람 모두 한국어 공부를 정말 열심히 했다. 단순히 한글을 읽고 쓰는 것만이 아니라, 한 주제를 정해 그것에 맞는 단어와 표현들을 배우며 스스로 말할 수 있도록 연습했다. 가끔은 수업이 끝나고 나서도 이야기가 길어져 좀 전에 다뤘던 주제와 관련 두 나라의 차이점들을 들며 열띤 토론을 하기도 했다. 우리 세 명은 의기투합해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되었고 맛난 음식도 해 먹으며 우정을 쌓아갔다.
한 집을 네 명이 함께 쓰던 기숙사에서 원룸의 기숙사로 이사 가던 날, 미하엘은 수업 때문에 바빴을 텐데 일부러 시간을 내서 이삿짐을 도우러 왔다. 학교 내 기숙사의 이동이었지만, 거리가 상당해서 그냥 옮기기엔 사실 무리가 있었다. 택시를 타고 옮기겠다고 하니, 여러 번 옮겨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택시비가 너무 많이 든다, 그러니 자기 차로 옮겨 주겠다고 제안했다. 나는 그 제안을 고맙게 받았고, 이삿짐을 도우러 온 다른 유학생들과 함께 열심히 옮겼다. 마지막 짐들을 차에 싣고 출발하려는데, 갑자기 억수 같은 비가 하늘에서 마구 쏟아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천둥까지 치기 시작했다. 와이퍼가 아무리 빨리 움직여도 한 치 앞을 볼 수가 없었다. 우린 차 안에서 잠시 비를 피하기로 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차 안엔 알 수 없는 침묵이 흘렀다. 항상 세 명이서 함께 했었는데, 이렇게 단 둘이 좁은 공간에 함께 있긴 처음이었다. 나중에 이 장면을 아이들에게 이야기할 때, 우린 이렇게 말한다. '제우스가 에로스를 보내 우리 두 사람에게 황금촉의 화살을 쏘게 했다'라고. 엄마와 아빠가 어떻게 만났는지 꼬마 때부터 궁금해하던 아이들에게 그리스 신화를 예를 들며 항상 이렇게 설명했다. 그 미묘한 감정을 아이들이 이해할리 만무하고,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 설명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지금도 가끔 우리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 내가 운을 떼면 아이들은 그 뒤의 레퍼토리를 줄줄 읊어댄다.
다른 기숙사 파티가 있던 날, 우린 걸어서 기숙사로 돌아가고 있었다. 밤길이 무서우니 그가 나를 기숙사까지 데려다주고 가기로 했다. 그날 우리는 기분 좋게 맥주를 마셨고,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늦은 시간, 거리에 사람이라곤 하나 없이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오로지 우리 두 사람의 발자국 소리만 울려 퍼졌다. 다리를 건널 때 즘 그가 갑자기 발을 멈추고 나의 두 손을 잡았다. 그리곤 한쪽 무릎을 굽히고는 청혼을 했다.
Willst du mich heiraten?
'Ja!'라는 나의 대답에 작은 무언가를 내 손가락에 끼워줬다. 은박지로 돌돌 말아 만든 작은 링이었다. '지금은 이것으로 대신하지만, 나중에 진짜로 바꿔줄게'라고 하며 쑥스러워했다. 반지가 무엇으로 만들어졌던 그게 무슨 상관이랴. 우린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고 미래를 함께 설계해 나가자고 약속했다. 그 이후 남편은 의사국가고시 준비(Staatexamen, Approbation)에 전력을 다했고 나도 수업과 지도 교수님의 Kolloquium에 참가하며 바쁜 시간을 보냈다.
우린 서로의 일정에 맞춰 결혼식 날을 잡고 각 집의 부모님들에게 그 소식을 전했다. 그 뒤론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었다. 내가 법적으로 결혼에 아무런 제한이 없음을 확인하는 서류를 한국 해당 관청에서 발급받아, 독일 시청에 제출하면 시청에서 맞는 날짜를 골라준다. 그날 이 결혼식이 되는 것이다. 우리 일정에 맞는 날을 골라 결혼식날을 정했다. 독일에서는 반드시 먼저 시청에서 혼인신고를 겸한 결혼식을 올려야 한다. 증인 두 사람은 필수다. 하객들이 참석해도 되고 그렇지 않아도 된다. 모두 신혼부부의 제량에 맡긴다. 남편 측은 부모님과 대학 동기, 동네 친구들이 참석했고, 내쪽에서는 가까이 지내는 몇몇 유학생들과 한글학교 교장선생님, 박사과정 동료들, 그리고 지도교수님이 참석했다. 시청의 웨딩홀이 아주 작기 때문에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도 없을뿐더러, 작고 조용하게 하길 원했던 우리에겐 딱 맞는 규모였다. 보통은 이렇게 시청에서 결혼식을 올린 뒤 날짜를 따로 잡아 교회에서 다시 결혼식을 올린다. 우리가 생각하는 보통의 결혼식이 진행되는 것이다. 하얀 드레스를 입고 생애에서 가장 예쁜 모습으로 등장하는 신부와 그런 신부를 마주하는 신랑의 모습. 우린 이런 결혼식은 올리지 않았다. 나중에 한국의 식구들도 참석할 수 있는 그런 결혼식을 올리자고 했다. 대신 시청결혼식에 참석한 하객들을 위한 작은 파티를 직접 준비했다. 장소는 친구 안네가 제공을 했고 결혼식 전날 내가 준비한 한식과 시부모님이 협찬한 케이터링 독일음식을 준비했다.
한국에선 중요하게 생각하는 혼수. 두 가족 간의 분쟁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특히 서로가 한쪽이 기운다고 생각한다면, 더 심각한 문제가 되기도 한다. 결국은 새로 출발하는 신혼부부에게도 돌이킬 수 없는 상처로 남는 쉽지 않은 문제다. 우리는 서로 혼수를 하지 않았다. 그 당시, 난 아직 유학생 신분이었고, 남편도 막 졸업을 해 아직 병원에 자리를 잡기 전이라 둘 다 가진 것이 없었다. 두 사람이 결혼을 결심하고 양가에 알렸고 우리가 계획한 대로 진행을 했다. 미래의 시댁에서는 우리의 결정을 축하한다는 말과 결혼 날짜는 정했는지 물어볼 뿐, 그 어떤 코멘트도 하지 않으셨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에서는 일반적으로 그렇게 한다. 물론, 개인적인 차이는 있겠으나, 결혼은 당사자들의 문제이므로 두 사람의 결정이 중요하다. 혼수? 독일에서는 그런 개념이 없다. 아마, 집안의 풍습에 따라 작은 선물 등은 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시어머니께 물려받는 반지나, 목걸이 등. 어차피 이곳 독일에는 혼수라는 개념도 없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첫출발을 무리하지 않고 작게 시작하고 싶었다. 다행인 것은 이런 부분에서 신랑과 내가 한마음이었다.
독일에서는 보통 두 번의 결혼식을 올린다. 먼저 시청에서 간단하게 혼인신고와 함께 결혼식을 올린다. 이때 가까운 사람 몇몇을 불러서 시청에 마련된 사무실에서 결혼 담당 공무원 입회하에 결혼 서약을 한다. 그리고 얼마 후 교회나 성당에서, 흔히 외국영화나 드라마에서 봤던 그런 결혼식을 한다. 그러나 사정에 따라서 이 두 번째의 결혼식을 생략하는 경우도 많다. 우리는 간단하게 시청에서만 결혼식을 올렸다. 아직 둘 다 사회에 자리를 잡은 것도 아니고, 그렇게 크게 하고 싶지가 않았다. 이다음에 둘 다 자리를 잡고 나서, 우리 힘으로 멋진 결혼식을 올리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을 듣고 시부모님은 서운해하셨다. 어쩜 당연하다. 자식이 둘이 있는 것도 아니고, 유일한 아들인데! 결혼 비용 때문이면 걱정 말라고, 당신들이 알아서 해 주겠다고 하셨는데, 우리는 정중히 거절했다. 처음엔 서운해하셨지만, 우리의 결정을 인정해 주셨다. 다음에 한국에 가서 제대로 된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 친정엄마가 보내 주신 돈으로 결혼반지와 남편의 예복을 장만했다. 시어머니는 나의 예복을 선물해 주셨다. 이것마저 거절할 수는 없었다. 이 것이 우리가 장만한 '혼수'의 전부였다.